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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입니다. 11월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수도권입니다. [편집자말]
쫓기듯 시작한 서울살이였다. 1991년 군부독재의 마지막은 험난했다. 강경대를 필두로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죽어 나가고, 학생 운동에 몸 담았던 나는 당연하다는듯 수배자가 되었다. 언제 어디서 잡혀갈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 학생회관이나 지인의 자취방에서 쪽잠 생활 3년을 거쳐 학생운동 마감을 선언하고 대구경북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교육운동을 표방하는 연구소 연구원 신분이었지만 월급도 따로 없었다. 같이 있는 연구원들과 잠실 신천 재래시장 근처에 월세로 방 2칸 짜리 지하방을 얻었다. 옷가지 몇벌을 들고 이사 들어가던 날. 밥을 해 먹으려고 물을 틀었는데 싱크대 밑으로 물이 쏟아졌다. 하수 시설이 따로 없어 설거지물을 고무통에 모아 버려야 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덜컥 집을 계약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불을 끄면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아 밤인지 낮인지도 구별되지 않았다. 참 서럽고 두려운 서울 생활의 시작이었다.

서울 생활이 익숙지 않은 어느 날. 국회에서 교육 관련 책 출간 때문에 밤샘을 하고 새벽에 2호선 전철을 탔다. 깜박 잠이 들어서 내려야 할 잠실역을 한참 지나쳐 성수역에서 마주 오는 전철을 탔다. 그리고 졸지 않기 위해 자리에도 앉지 않고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정작 잠실역에서 또 내리질 못했다. 도망가듯이 밀려나가는 사람들 꽁무니에 서 있다 보니, 내릴 사이도 없이 차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또 한참을 가서 마주 오는 전철을 갈아 탔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 돌아갈래' 라는 절규가 저절로 나오던 그 때였다.

쫓기듯 시작한 서울생활

한강에서 모래놀이에 푹빠진 둘째와 셋째. 멀리 무역센터가 보인다.
▲ 서울이 고향인 아이들 한강에서 모래놀이에 푹빠진 둘째와 셋째. 멀리 무역센터가 보인다.
ⓒ 안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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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 20년째. 이제는 전철 몇 번째 칸에서 내려야 환승이 빠른지, 촛불 집회에 제 시간에 가려면 언제쯤 집을 나서야 하는지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는 서울내기가 다 되었다. 서울살이 20년. 결혼을 했고 서울이 고향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서울은 이제 타향이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머문 도시가 되었다. 번잡함과 화려함은 어느새 익숙한 습관이 되어 버렸고. 도시의 일부분으로 변해버린 내가 '경상도 산골 촌놈'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빛바랜 잡지책을 보는 것처럼 희미해졌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그러나 아직도 때때로 도시의 탈출을 꿈꾼다. 술한잔 거나하게 취하면 아이들 결혼, 최소한 대학 졸업이라도 시키면 미련 없이 서울 생활 정리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일 년에 한두 번 산 좋고 물 맑은 곳으로 휴가라도 갈 때면 아귀다툼 같은 서울 생활 빨리 청산해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시골에 홀로 계시는 칠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가 서울로 와서 살지 못할 바에야 남은 여생, 곁에서 지켜드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현실적인 고민도 있다.

비단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인들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대부분이 시골과 고향을 가슴에 묻어 두고, 힘들 때면 꺼내서 위안을 삼곤 한다. '아이들 결혼하고 나면' '정년 퇴임하고 나면' '10년 뒤에'라는 단서 조항을 달아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도시 탈출, 서울 탈출을 이야기한다. 전세난에 부평초 같이 떠돌아야 하는 삶이라면 이런 바람은 더 절실하다. 팍팍한 서울 생활, 언젠가는 벗어나 보고 싶다는 건 서울에 살고 있는 1% 특권층을 제외한 99% 서민들의 꿈이고 마지막 남은 동경이라 할 수 있다.

"서울에서 죽고 싶으신가요?"

어느 강연에서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은 청중들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서울서 살겠냐"가 아니라 "서울서 죽고 싶냐"고. 누구 한사람 쉽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시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의 꿈을 여지없이 깔아뭉개는 도발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서울에서 살다가 서울의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서울 근교의 화장터에서 흔적을 지우는 삶', 참으로 대답하기에 민망한, 대답을 거부하고 싶은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전우용 선생은 서울 사람 대부분은 노년을 시골에서 보내고 마감하는 생을 꿈꾸지만 이는 소수일 뿐, 서울 인구의 95%는 서울에서 노년을 보내고 서울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고 고향에 묻히는 꿈은 꿈일 뿐, 대다수의 도시민들은 서울에서 살고 죽어가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의 삶도 떠나가는 삶이 아니라 안착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강연의 요지였다.

서울을 떠날 것인가? 안착할 것인가

서울이 고향인 아이는 도시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 응봉산에서 바라본 한강 서울이 고향인 아이는 도시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 안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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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서울 생활 중 자전거로 출퇴근 한 지가 10년이 다되어 간다. 한강 자전거길을 통해 왕복 28km정도 2시간이 소요된다. 이제는 한강 물빛만 봐도 계절을 가늠할 정도가 되었다. 때맞춰 꽃이 피고 갈대가 어우러지고. 지금은 한강에 겨울 철새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어깨를 부딪쳐야 할 서울이지만 편리한 습관을 버리고 나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곳 또한 서울이다. 이제는 오롯이 한강은 나의 강이고 쉼터이고 안식처가 됐다. 

사실, 서울은 잘 꾸며진 도시다. 600년의 역사가 있고 인구 1000만 명을 지탱할 한강과 산들이 있다. 교육, 의료 등 꼭 편리한 시설이 지근거리에 있는 곳도 서울이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모든 것들이 자본에 의해 재설계되고, 자본에 의해 가치 평가되어 왔다. 사람 사는 땅이 아니라 기회의 땅으로 자리매김한 서울. 한몫 단단히 잡아 아들딸에게 아파트 한 채 물려주고 시골로 내려가 노년을 보내고자 하는 바람은 서민들이 꿈꿀 수 있는 가장 큰 욕심이다.

그러나 서울 사람 95% 이상이 서울에서 노년을 보내고 서울에서 삶을 마감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서울을 기회의 땅이 아니라 사람 사는 땅, 한몫 챙겨서 떠나가야 할 땅이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고 내 삶을 의지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드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때다. 부모들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탈출을 꿈꾸는 도시. 내 아이들이 똑같은 고민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도시의 비극이고 인생의 낭비이다.

요즘 곳곳에서 도시공동체를 논의하는 자리가 많아졌다. 자본에 의해 점령당한 도시에 새로운 도시문화를 만들자는 보자는 취지의 모임들이다. 환영하고, 적극으로 참여해 볼만한 일이다. 탈출을 꿈꾸는 에너지를 안착을 위한 에너지로 질적 전환을 한다면 도시를 풍요롭게 하고 도시민들을 유랑민이 아니라 도시의 주인으로 바꾸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쫓기듯 시작한 서울생활, 이제 부인할 수 없는 나의 생활터전이 되었다. 직장이 있고 집이 있고, 대부분의 인관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서울. 제대로 뿌리 내리는 삶을 고민해 볼 나이가 되었다.


태그:#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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