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광고 트렌드, '심히 유감'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광고가 그립다

등록 2007.12.07 20:52수정 2007.12.10 15:28
0
원고료로 응원
이은정 기자는 울산대학교에 재학중입니다.
<오마이뉴스> 주최 '제2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이은정 시민기자는 울산대 수학과 2학년에 재학중입니다. <편집자주>

보험 안 들면 내일 당장 죽나


돈 모으는 방법에도 트렌드가 있는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스팸전화 내용은 특가로 나온 보험 상품을 특별 가입시켜 줄 테니 늦기 전에 가입하라는 것이고, 적금이라도 하나 들까 싶어 은행 창구에 앉았다간 노후대책 하나 마련해 놓지 않았다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게 되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TV만 켜면 나오는 보험광고의 '친절하지만 무시무시한 멘트'는 사람 간 졸이게 만들기 딱 이다.


코믹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신구 아저씨가 나와 "나이가 많아도, 병이 있어도" 가입된다는 보험 광고를 보면 순간적으로 "저 조건이면 우리 할머니도 하나 들어드릴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화면 아래 구석으로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지나가는 깨알 같은 약관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용돈이나 더 드리자고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쌍둥이는 가입 안 되는 태아보험, 신경정신과 진료 기록만 있어도 거부되는 건강보험, 포천에 살면 연장 안 되는 자동차보험 등 현실은 차갑지만, TV가 보여주는 보험 약관은 어찌도 이리 간단한지, 가끔은 저 정도면 사기 아닌가 싶은 마음까지 든다.


게다가 건강 문제를 진지하게 들먹이며 설교를 할 때는 광고가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사람이란 게 언제 어디가 아플지 모르는 존재이긴 하지만, 요즘 TV에 넘쳐나는 갖가지 건강보험 광고를 보다 보면 없던 병이 생길 지경이다. 똑 부러지기로 유명한 배종옥 언니가 냉정한 목소리로 "1억 있으세요?"라고 묻는 광고는 심히 섬뜩할 지경이라, 1억 없는 사람은 감히 암에 걸릴 자격도 없는 것 같은 자괴감에 휩싸이고 만다.

 

한 달에 1만 5천원이면 웬만한 병은 다 보장된다는 전직 아나운서의 친절한 설명, 그런데 저 병 다 걸려야 본전 뽑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건 사람 못 믿는 못된 성품 때문일까? 이유야 어쨌든 월급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건강보험만 들어도 건강검진 혜택 받고, 암 치료비 10%만 내면 된다는(물론 몇 년 기다려야 현실화되는 조항이다) 건강보험관리공단의 공익광고가 귀여워진다.

 

광고 덕에 저절로 되는 산아제한


각종 보장보험 광고를 보다 보면 묘한 반발심까지 생기는데, 서른이 넘어서도 미래를 위한 보장보험 하나 들지 않았냐고 혼내는 듯한 문구에 흥분해 "국민연금 내기도 억울해 죽겠는 뭘 또 가입하라는 거야!" 버력 소리가 질러진다. 여기에 아역 모델이 등장하는 보험 광고까지 보고 나면 흥분의 도가니탕이 되고 마는데,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예뻐서 '저런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아역배우가 술 먹고 온 아빠에게 "어휴, 또 술 먹었어?" 잔소리를 하고, 팔굽혀펴기 하는 아빠에게 "백 개는 해야지"라고 타박을 놓을 때는 '이것아, 지금 아빠가 너 살리느라 몸에 안 받는 술 마시고 체력이 팍팍 떨어지는데 너 끝까지 책임지느라 보험까지 들어야겠냐'고 한탄하며 가슴을 치게 된다.


뉴스에서는 저출산이 큰 문제라고 떠들어대도 광고가 보여주는 건 애 키우기 어렵다는 현실뿐이니 아이 낳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난다. 정열적인 사랑에 빠졌던 정준호가 애 주렁주렁 매달고 결혼은 현실이니 미리미리 보험 들라고 광고할 때부터 기분이 찝찝하더니, 아예 대놓고 네 쌍둥이 들이밀질 않나, 애 걸음마 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에비~ 무섭지? 그럼 보험 들어!" 라고 겁을 주는 광고를 보면서는 '저게 언제 나한테 돈을 뜯어갈까' 싶어 옆에 누워 있는 조카까지 무서워진다.

 

이제 애 하나 키우려면 알러지 케어(Alergy care) 되는 드럼세탁기도 사야 하고, 아토피 안 걸리게 공기청정기도 사야 하고, 초유(初乳) 성분 들어간 이유식도 사 먹여야 하고, 영어 유학 보내는 것으로 모자라 나 죽을 때 대비해 보험까지 들어야 한단 말인가. 금세 부러질 것 같은 아빠 어깨에 가족 탑을 쌓고 걷던 신용카드 광고의 공포가 떠오른다.

 

역시 소박한 공감이 최고


요즘 광고 트렌드는 열등감을 자극해 화를 돋우는 것인지, 아침 10시에 중형차 운전하며 출근하는 여자보다 고급 아파트에 앉아 차 마시는 여자가 성공한 여자라는 뉘앙스의 아파트 광고를 보면 열심히 일할 마음이 싹 가신다. 그나마 이런 상황에 작은 위안을 주는 건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을 보여주며 소비자에게 공감을 느끼게 하는 광고들이다.


비오는 날 할 일 없이 방안에 퍼져 있다가 불법 다운로드 받은 동영상 때리면서 후루룩 라면 먹는 재미, 방금 한 밥에 스팸 한 조각이면 배부른 소박한 포만감, 커피믹스를 이용한 싸구려 아이스커피가 주는 청량감을 담은 광고를 보면 없던 식욕이 당긴다.

 

"날 사랑하긴 하는 거야?"라고 묻다가 밥시켜 먹고 TV나 보자는 오래된 연인의 무료한 일상에는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고, 막힌 길만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때문에 비싼 기계를 부숴버리는 장면을 보면 '저 마음 내가 알지'하며 광고 주인공의 편을 들게 된다. 뚝뚝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 국물 때문에 벌어진 부부싸움, 처음 생긴 여자 친구 때문에 땀 냄새가 신경 쓰이는 사춘기 남학생의 설레는 마음, 빨아도 냄새나는 여름빨래의 꿉꿉함 등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생활 속 공감시리즈는 마음 한 구석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광고가 고도의 마케팅 도구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때로는 유치한 광고가 소비를 촉진시키고, 논란을 일으키는 비 호감 광고의 효과가 더 크다는 이론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차피 보는 동안 기분이라도 좋았으면 하는 게 큰 바람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을 지불하며 광고를 보면서도 열등감에 분노하고, 공포감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요즘엔 오히려 제품과 CM송만 등장하는 단순한 광고가 그리워진다.

2007.12.07 20:52 ⓒ 2007 OhmyNews
#광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