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후반은 예술영화의 전성시대였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국내개봉 관객숫자가 11만 명이었으니 지금으로선 상상이 불가능한 정도였다. 군사정권 시절 영화는 물론 대중문화 전반을 누더기로 만들던 검열의 시절이 민주화와 함께 걷히기 시작하자 틈새를 타고 봇물 터지듯 다양한 문화예술 향유를 위한 욕구는 분출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일정부분 분배되면서 확대된 중산층 시민들은 20세기 들어 거의 최초로 먹고 사는 문제 외에도 일정 구매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딱 맞춤 타이밍인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발맞춰 국제영화제가 갑자기 속속 탄생하고 '영화마을' 같은 비디오 체인점에선 이전에는 상상불가 수준의 다채로운 영화 컬렉션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곳곳에서 독립예술영화 제작과 상영이 이뤄지고 상업개봉이 시도된다. 공식/비공식 막론하고 여러 경로로 영화가 소개되던 시절이다. 그 가운데 '전설'로 회자되던 작품이 있었으니, 멀리 북유럽 덴마크에서 날아온 <킹덤>이라는 공포영화였다. 원래 TV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게 공전의 인기를 끌면서 8부작을 4편씩 에피소드 구분해 극장 개봉버전으로 재편집한 결과물이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해당 시리즈가 방영될 때 길가에 인적이 끊길 정도라 할 만큼 대단한 성공을 거둔 바, 이는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7년 연말, 지금은 사라진 동숭시네마테크에서 심야상영으로 사실상 단관 개봉한 <킹덤>은 당시 44회 상영이 모두 전석 매진되었다고 한다. '전설의 시대'가 달리 없다. 70분 전후 에피소드 4개를 묶었기에 일반 상영시간대에 배정하기가 힘들었고, 국내에 최초 상영했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심야상영으로 인기를 끌었기에 시도했던 도전일 테다. 그리고 영화는 말 그대로 작은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흥행과 화제를 모두 획득했다.

유령이 가득한 원념의 땅 '킹덤'으로 어서 오세요
 
"킹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킹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TV 시리즈의 편집판인 만큼 <킹덤>은 4개의 에피소드를 이어붙인 형태다. 영화가 시작되면 친절하게 직전 에피소드를 간략하게 요약해주고 출연진 소개와 영화 속 배경이 되는 킹덤 종합병원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복사해 붙이기처럼 거듭된다. 매 에피소드 말미에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등장해 조크를 섞어 에피소드 해설과 함께 다음 에피소드 예고를 입담으로 전한다. 4편의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1화 '지상의 무리'/ 2화 '그대의 왕국이 온다'/ 3화 '이물질'/ 4화 '살아있는 시체'
 
이야기는 병원이 자리한 지역의 기원을 언급하며 출발한다. 과거에 전염병 등으로 오염된 옷감을 빨래하고 표백하던 늪지대 위에 세워진 킹덤 종합병원은 덴마크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병원으로 성장한다. 국내 최고의 의료진이 결집한 병원은 의학 전반이 연구되고 합리주의 이성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이성과 진보에 대한 과도한 낙관이 팽배한 가운데 병원 터에는 오랫동안 묵혀 있던 원념과 유령들이 깨어날 틈을 노리고 있었다. 1919년의 어떤 은폐된 사건은 그 발화점이 될 준비를 마친 상황이다.
 
병원의 자랑인 신경외과 부서. 하지만 바람 잘 날이 없다. 스웨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해 덴마크로 넘어온 전문의 '헬머' 박사는 외골수에 고집불통이라 부서 내 팀원들과 소통상 문제가 많다. 말끝마다 자신의 고국 스웨덴을 예찬하며 평소 대화도 스웨덴 어만 고집하는 그는 권위적인 태도가 더해져 레지던트 '크로그'를 비롯한 이들에게 비 호감 캐릭터 그 자체다. 소문에 의하면 스웨덴에서 논문 표절로 쫓겨날 위기에 처해 킹덤으로 온 것이라 한다. 게다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나'라는 소녀의 뇌수술을 집도하던 중 의료사고를 일으켜 환자의 부모에게 고발당한 상태다. 거만하고 잘난 체 하지만 내부적으로 그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한편 '드루세'라는 노인이 신경외과에 입원한다. 병원 잡역부 직원 '볼더'의 엄마인 그는 심령술 영매로 활동하는 중이다. 그는 신경외과의 말기 환자들에게 심령술 행사를 열기 위해 꾀병으로 거듭 입원하며 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실제로는 직접 혼령을 만난 적도 없는 3류 영매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내에서 생애 최초로 실제 유령의 존재를 느끼고 목격한다. 자신의 재주를 전부 동원하고 아들을 들볶아 병원에 감춰진 과거의 비밀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누구도 드루세의 이야기를 망령 든 노인의 헛소리로 치부하지만 점차 유령의 존재는 드루세 외에도 몇몇에게 의구심을 불러오기 시작한다.
 
충격적 끝 장면의 1부, 감질나게 만드는 2부로 이어진 '킹덤 유니버스'
 
'킹덤 유니버스'의 원형질이라 할 1994년 TV 드라마는 공전의 히트를 거두고 방영이 끝나자마자 연말에 신속하게 극장용 편집버전이 공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매회 끝날 때마다 등장해 친절한 척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관객을 갖고 놀다시피 이죽거리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속이 시원한 결말을 선사하지 않는다. 아마 그 시절 어렴풋하게 졸음을 견뎌가며 심야상영 당시 비몽사몽 관람했던 이들이라면 잊지 못할 1부 마지막 장면, 세월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게 회자되는 기이한 출산 장면에서 툭 끊어지다시피 마무리된다.

그리고 1997년에 두 번째 TV 드라마 편집본이 공개된다. 방송분량 중 5화 '수술대 위의 죽음'/ 6화 '철새들'/ 7화 '거인'/ 8화 '악마의 소굴' 4개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1부에서 본격적인 사건사고가 터져 분출하기 직전의 긴장감이 하나둘 병원으로 모여들던 느낌이 가득했다면, 이제 2부는 산 자의 욕망과 죽은 자의 원념이 넘실대는 핫스팟처럼 변모해가는 종합병원의 천태만상이 한가득 펼쳐지는 셈이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병원 내에서 다수의 등장인물이 엉겅퀴 줄기 마냥 뒤엉키다 보니 몇 개의 선을 따라 관심 둘 거리는 흥건하게 넘쳐난다.
 
공포 미스터리 장르로 간주되는 <킹덤>이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저 감정을 자극하는 공포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대 덴마크 사회와 의학의 역사, 사회적 계급 갈등을 세밀하게 풍자하는 맛을 겸비했다는 것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점에 탄생한 화풍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장대한 초현실주의 지옥도를 활동사진으로 옮겨놓은 형국처럼 1부에서 단서를 여기저기 뿌려뒀던 제작진은 2부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려 한다.
 
초점1. 근대의학의 위선과 오만에 일격을 가하다
 
"킹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킹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헬머 박사를 비롯해 킹덤 병원의 의료진은 스칸디나비아 전체에서도 최고 의료 엘리트를 자부하는 이들이다. 콧대 높은 전문의들은 병원의 지하 창고 은밀한 곳에서 '킹덤의 아들들'이라는 고색창연한 비밀클럽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여성과 다른 병원직원은 출입할 수 없다. 오직 남성 전문의에게만 가입과 활동이 허용된다. 이들은 의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정보 공유와 연대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병원의 기득권 집단으로서 일체의 개선에 저항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어쩌다 해외 뉴스 가십성 기사로 접하곤 하는, 민주주의와 시민혁명의 근원인데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유럽의 사립학교 신고식이나 폐쇄적 서클 소식과 닮은꼴처럼 (헬머가 접하게 되는) '킹덤의 아들들'은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신입회원 신고식을 치러야 하고, 의료적으로 부당한 행위라도 내부 구성원의 협조 요청에 응해야만 한다. 이들이 자행하는 의료윤리에 반하는 행태는 출세 지향에 독선적인 헬머 박사조차 경악할 정도로 선을 넘어도 한참 넘지만 폐쇄적 이너 서클의 전형 그대로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결국 뭐든 못할 게 없다. 킹덤을 위기로 몰아넣는 단초가 되는 1919년의 사건 역시 치료를 빙자해 의료살인을 자행한 선대 의료진의 범죄 행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킹덤에 존재하지 않는다.
 
스웨덴을 예찬하며 덴마크의 모든 걸 우습게 알던 헬머는 과장이 알려준 또다른 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스웨덴에 비해 환자 친화적으로 보이던 덴마크 의료계는 환자에게 진료차트가 공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암호화 작업을 해놓고 있던 것이다. 헬머는 맞춤법 틀린 라틴어 표기라며 비웃지만 실은 의도적으로 틀리게 써서 환자가 알아보지 못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환자와의 정보 비대칭성을 유지하기 위한 '꼼수'다. 배운 자가 자신의 지식을 대중을 기만하는 데 써먹는 행태의 모범사례 자체다.
 
'킹덤의 아들들'은 근대 의학의 과학적 합리성을 종교처럼 신봉하는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한국 의료계도 거의 동일하게 서구 중심으로 발전한 근대 의학에 어긋나는 모든 의료행위와 유사한 것들에 배타적이긴 하지만 <킹덤> 속 종합병원 의료 엘리트들은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명분일 뿐 점점 비이성적이고 그들이 혐오한다던 미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대체의학 요법조차 부정하던 이들 구성원은 어느새 강령 행사를 개최하고 허무맹랑하다 비웃던 아이티의 부두교에 의지해 정적을 해치우려 한다. 병원 내 의사집단은 층층이 서열과 직책에 따라 나눠지고 상층으로 갈수록 마치 귀족처럼 군림하려 한다. 하지만 얼핏 전문가 집단의 불유쾌한 자부심으로 비치던 그들의 자신감은 실은 그저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부각하려는 '눈속임'에 불과했음이 차츰 드러난다.
 
초점2. 의료민영화의 그림자가 드리우다
 
"킹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킹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킹덤의 아들들'을 정점으로 병원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듯 보이는 전문의 그룹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있다. 1부 후반부터 등장하는 병원장과 행정 엘리트 집단이다. 원장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눈속임 수단으로 정상적인 병원 운영을 가로막는 전문의들과의 투쟁을 선포한다. 그가 눈으로 확인하고 밝혀낸 킹덤의 문제점은 산더미처럼 쏟아진다. 그나마 상식과 개념을 갖춘 이가 드디어 등장하는가 싶지만 그런 병원장의 속내는 수익성과 실적에 꽂혀 있을 뿐이다.
 
원장은 등장하자마자 기막힌 꼴을 연거푸 목격한다. 킹덤 병원에서 오래 묵은 비리와 편의주의의 향연이 펼쳐지는 격이다. 마치 지하세계처럼 광활한 병원의 지하 공간은 병원 성격에 맞지 않게 기괴한 용도로 여기저기 사용 중이고, 직원들은 의료물품을 공공연히 횡령하는 중이다. 예를 들어 의료용 에틸알코올을 몰래 전용해 칵테일로 제조해 원내에서 음주가 이뤄지는 식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급차를 용도 이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불법 도박의 수단으로 위험천만한 카레이싱에 동원하는 지경이다. 
 
하지만 원장과 전문의들 사이 갈등의 축은 '골든 키' 문제다. 전문의들의 판단으로 각 진료과별로 배정된 병실 중 일부를 과밀화를 막기 위해 잠가둘 수 있는 이 관행은 병원 행정 입장에선 의도적으로 환자 수를 조절해 줄이는 편법으로 수입을 줄이는 좌시할 수 없는 행위다. 헬머가 몸담은 신경외과에서 속출하는 사고와 해프닝을 빌미로 병원장은 골든 키 관행을 분쇄하고 전문의들과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려 의도한다. 물론 '눈속임'이라 보기 충분한 관행이지만 원장이 개혁하고자 하는 방향이 대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병원 수뇌부는 그저 더 많은 입원 실적과 정부당국에 홍보할 건수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국내에서도 점진적으로 진행된 '영리병원' 흐름의 판박이 모델인 셈이다. 한국의 의료민영화 추진 역시 원래 다 외국에서 수입해온 최신 경영전략이라 따져보면 당연한 일이다.
 
초점3. '노르딕' 국가들이라 해서 도매금은 아니다
 
이 외에도 한국 관객들이 간파하긴 언어와 문화적 거리 때문에 쉽지 않지만 북유럽 사회와 역사에 밝다면 깨알 같은 풍자 개그 코드가 넘쳐난다. 헬머 박사는 스웨덴에서 사고를 치고 쫓겨나다시피 했으면서도 자기를 받아준 덴마크를 혐오하고 천시한다. 자신이 처한 난감한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을 덴마크 비방으로 풀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자동차도 스웨덴의 자랑볼보 모델만 고집한다. 줄거리가 전개되면서 거듭 수난을 겪고 박살이 나도 다른 차를 타려 하지 않고 집착적으로 볼보를 수리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스웨덴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런 이중성이 냉소적인 블랙 유머로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언어 접근성 때문에 국내 관객이 덴마크 관객에 비해 놓칠 수밖에 없는 한계점 1순위라면 덴마크 어와 스웨덴 어의 차이를 활용한 언어유희 포인트일 테다. 덴마크 수도 한복판의 종합병원에서 일하면서도 헬머는 스웨덴 어 구사를 고수한다. 일정부분 공통지점이 많아서 대부분 그럭저럭 통하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정확한 의사소통이 필수인 병원 내 의료행위 가운데 헬머의 고집은 결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가 자기 건강상태를 확인하던 중 언급하는 '바사 호'는 스웨덴이 30년 전쟁 당시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극하면서 해군을 야심차게 키우기 위해 건조한 거대 전열함이다. 하지만 시험운항 중 급작스럽게 침몰하는 바람에 지독한 불운의 대명사가 된 역사적 유물이기도 하다. 그런 조크 요소를 국내 관객이 몽땅 흡수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니 말이다.
 
게다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중세 이후 역사에서 덴마크와 스웨덴은 패권을 놓고 수백년 동안 각축하던 사이이기도 하다. 우리는 똑같은 '바이킹' 나라들이라 여기지만 '데인'이나 '노르만'처럼 주요 국가별로 명칭도 다를뿐더러, 진출하는 방향도 달랐다. 스웨덴 바이킹은 동유럽과 러시아로 향했고, 덴마크 바이킹은 영국 쪽으로, 노르웨이 바이킹은 프랑스를 공략했다. 그런 라이벌 관계가 알게 모르게 <킹덤>의 번잡한 수다 속에서 확인 가능한 것이다.
 
근대 서구 합리주의와 시스템에 대한 신랄한 도전
 
"킹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킹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그런 체크포인트가 쏠쏠하지만 결국 <킹덤>의 세계는 근대 과학과 합리주의가 이면에 감춘 위선과 모순의 폭로와 조롱으로 치닫는 게 본령이다. 여기에 썰렁하기 그지없는 북유럽 유머가 양념처럼 뿌려진다. 해부 수술이 거북해 늘 구역질을 내며 수술실 밖으로 뛰쳐나가던 의대생은 정작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부류의 고어영화에 탐닉한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공포물이다 보니 피와 창자가 빠질 수 없지만 말초적 고어 장면은 (비용 문제도 걸리는 바람에) 최소한으로 억제된 대신에 '그로테스크'한 효과가 간결하지만 효과적으로 투입된다. 생리작용만 아니라면 영화상영 시간을 견디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게 면밀하게 심어둔 장치들에 힘입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초지일관 '금기에 대한 도전'을 수행한다. 이 지독한 반골정신은 '킹덤 유니버스'에서 사회의 축소판이자 또 하나의 '작은 사회'인 킹덤 종합병원, 실제로 덴마크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의료기관을 무대로 거대한 인간 군상들의 불협화음처럼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온다. 마치 자신들의 세대가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아니 방조하고 공모했던 근현대 유럽의 역사와 부모세대의 권위에 대해 게릴라 전투를 감행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감독의 냉소적 비판의식은 전 방위적으로 진행된다.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유럽이라는 상징 자체를 부숴버리려는 파괴공작원 아닌가 할 만큼.
 
겉으로는 번드르르한 전문가 집단과 기득권층은 영화 내내 초라하고 부도덕한 본색을 까발려지고 조소당한다. 과학을 신봉하던 이들은 주술과 미신을 탐닉하고, 의료윤리는 땅바닥에 떨어지며 오랫동안 묵혀온 원념들은 지옥문이 열리듯 개방될 기회를 노린다. 이쯤 되면 킹덤의 지하는 거대한 '던전' 혹은 (미디어에 의해 왜곡된) 심령 스폿 그 자체 격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당대 유럽의 합리성과 권위, 시스템 전체에 대해 블랙 코미디로 전격 기습작전을 감행한 셈이다.
 
하지만 지옥문의 개방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희생하는 일단의 '선인'들이 있다. 그들은 거의 전부 사회 주류에선 무시하거나 천대하는 존재들이다. 돌팔이 영매, 병원 잡역부, 경계성 지능장애인, 심지어 저주받은 아이까지 더 큰 파국을 막기 위해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겉보기에는 기괴한 행색으로도 고군분투한다. 과연 그들의 집념이 어느덧 유령으로 가득해진 거대한 병원의 틈새를 막고 원혼들을 성불시킬 수 있을까? 1부에서 잔뜩 감질나게 2부를 예고했던 악동 감독은 2부의 마지막도 두근두근 종말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장난을 친다. 그렇게 사반세기 넘게 기다려온 이들에게 세기말의 기억을 품은 대단원의 막, <킹덤: 엑소더스>가 대기 중이다.
 
전설의 확인을 두려워하지 말라!
  
<킹덤>이 작업된 1990년대는 통상적인 드라마를 넘어서는 시도가 동시대적으로 활발하던 시절이다. 일반적인 공중파 방송에 더해 새롭게 탄생한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들은 영화적 수위와 규모를 가진 다양한 드라마 시리즈에 도전했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트윈픽스> 시리즈 같은 초현실적 미스터리 공포물의 영향력이 <킹덤>에도 일정하게 확인된다. 감질나게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특유의 약 올리기 수법은 시즌 제를 채택한 '미드' 태동기의 전형적인 양태이기도 하다.

동 시대 드라마 시리즈와 비교해 보면 재미난 분석이 가능할 테다. 잔뜩 기대하고 보게 될 이들에겐 아쉽게도, 표현수위 또한 요즘 같이 OTT 드라마의 한껏 개방된 폭력과 고어에 익숙하다면 미지근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시리즈의 진가는 말초적 수위가 아니라 축축하게 조금씩 젖어가듯 관객의 뇌리에 기어들어가는 섬뜩함과 슬픔, 그리고 블랙 유머의 조화에 있다.
 
지금 현재까지도 금기에 위악적으로 도전하길 거듭하며 문제적 거장으로 등극한, 그리고 수많은 사고를 쳐가며 논란의 중심에서 떠나지 않는 라스 폰 트리에의 청장년 시절 '똘끼'는 중년 이후 그가 선보인 막 나가는 수위에 비해 옅게 보일지언정 결코 우리가 흔히 TV 드라마에서 상상하는 수위는 아득히 초월하는 파격으로 가득하다. 30년 전 텔레비전 시리즈가 지금 와서 현재의 관객을 놀라게 할 수 있겠냐며 방심하다가는 큰 코 다칠 게 분명하다.

그 시절에 거의 실시간으로 <킹덤>을 목격했지만 오랜만에 1세기가 지나 재회한 킹덤 병원의 유령과 그보다 더 기괴한 인간들의 군상 극은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마법의 갑옷을 두른 듯하다. 혹시나 극장에서 영접할 기회가 있다면 절대 놓치지 말기를 기원한다. 사반세기 걸려 도착한 완결판 <킹덤: 엑소더스>를 볼 생각이라면 기왕 복습 겸 이 놀라운 세기말의 전설부터 도전해 보시라.
 
<작품정보>
 
킹덤 Riget, The Kingdom
1994|덴마크|공포/드라마/코미디/미스터리
1997.12.23. 개봉|273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라스 폰 트리에, 모르텐 안프레드
각본 라스 폰 트리에, 닐스 푀르셀
주연 에른스트 휴고 예레고르(헬머 역), 키르스텐 롤페스(드루세 역)
출연 홀거 유울 한센(모에스고르 역), 페터 뮈긴드(모게 역),
       비르기테 로베르그(주디스 역), 우도 키에르(아게 역),
       로라 크리스텐센(모나 역), 기타 뇌르비(리그모어 역)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킹덤 2 Riget II, The Kingdom II
1997|덴마크|공포/드라마/코미디/미스터리
1998.07.16. 개봉|286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라스 폰 트리에, 모르텐 안프레드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킹덤 라스폰트리에 덴마크영화 심야상영 킹덤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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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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