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픈 더 도어>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픈 더 도어>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1.
미국 뉴저지. 늦은 밤, 치훈(서영주 분)은 매형인 문석(이순원 분)의 집을 찾아간다. 함께 술 한잔 기울이며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하기 위함이다. 힘들고 아픈 것들 다 잊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만 기억하자는 두 사람의 의기투합과 달리, 술이 조금씩 취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강도를 당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치훈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와 문석의 아내이자 치훈의 누나인 캐서린(김수진 분)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이야기가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불행과 관련한 이야기가 하나 둘 던져지고, 이에 감정이 격해진 문석은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이제 두 사람의 대화가 일어났던 밤, 그날의 시점을 기준으로 과거로 향하고 숨겨진 이야기는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 <라이터를 켜라>(2002)를 시작으로 가장 최근의 <기억의 밤>(2017)까지 다양한 모양의 작품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 온 장항준 감독이 이번에는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의 영화 <오픈 더 도어>의 연출과 각본을 맡았다. 코미디 장르에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던 과거와 달리 최근의 작품들에서는 미스터리 장르를 기반으로 숨겨진 비밀을 헤쳐가는 형식의 작품에 훨씬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는 감독. 이번 작품 <오픈 더 도어> 역시 그의 최근 행보와 걸음을 함께 하는 작품이다.

02.
영화는 구조적으로 두 가지 큰 특징을 가진다. 먼저, 이 영화는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다양한 작품에서 하나의 작품이 장(章)이나 챕터로 나누는 형식이 차용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챕터를 활용하는 방식은 다른 작품들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각각의 챕터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작품이 마치 무대 위의 연극이 연출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 하나다. 무대 위의 연극이 막과 막 사이에 암전을 통해 구분되고, 각각의 막이 가지는 주된 이야기가 상이하듯이 이 작품 역시 그 구조를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장항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는 작품의 타이틀인 <오픈 더 도어>의 의미처럼 각각의 이야기가 열고 닫히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표현된 것과도 유사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 챕터의 순서를 따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챕터 2의 이야기는 챕터 1의 이야기에서 6시간 전의 상황이 되고, 챕터 3의 이야기는 다시 또 챕터 2로부터 5년 전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전체적인 순열로 보자면, 챕터 1과 챕터 2는 가까운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고, 챕터 3, 4, 5는 5년 전 이후의 이야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대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를 역순으로 그려내는 식이 된다.) 비밀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장르에서 시간을 전복시켜 그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영화 전체가 과거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독창적인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픈 더 도어>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픈 더 도어>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미국 뉴저지 한인타운으로 설정한 것은 이야기의 바운더리를 좁히고 폐쇄성을 유지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 가족이 느끼게 되는 고립감과 당시 교민사회가 느꼈던 팍팍함 같은 이미지를 부여하여 극중 가족의 처지를 조금 더 처절하게 만드는 장치라고나 할까. 막다른 골목에 놓인 가족의 간절함이 욕망과 파멸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만 집중하도록 관객 역시 몰아세우는 요소인 셈이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엄마의 죽음과 누나에게 가해진 폭력, 그 뒤편에 놓인 진짜 이야기들은 모두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와 어떤 선택에 의해 시작된다는 점에서 공간적 설정은 더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 인물 모두가 어떤 '잘못'된 선택을 할 때마다 자신들 이외에는 주변에 그 누구도 적절한 조언을 해주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민자 가족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작품은 실제로 존재했던 한 사건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는데, 그 실제 사건의 배경이 미국 뉴저지였다고도 한다. 실제 사건의 배경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 특징적인 부분을 극을 각색하는 과정에서도 잘 녹여 활용한 것이다.

04.    
영화 속 인물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사이에 숨겨진 진실은 덩치를 점점 더 키워나간다. 그 무게는 임계점에 다다르는 순간 인간의 내면과 인간성을 모두 짓눌러 압살해 버리고 마는데, 여기에서 앞서 언급한 구성,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부분이 있다. 영화의 시간이 거꾸로 배치되어 과거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는 뜻은, 다시 말해서 미래로 향하는 쪽의 시점과 이야기는 막혀 있다는 뜻이 된다. 이 영화로 따지자면, 챕터 1의 마지막 장면이 영화 상의 가장 현재에 놓여 있고, 여기서 던져지는 장면 이후의 결말은 작품 속에서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일종의 열린 결말을 제시하며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관객들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품의 타이틀인 <오픈 더 도어>의 또다른 의미가 하나 더 모습을 드러낸다. 해석적 용법이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에서 '문을 열다'라는 뜻을 가진 '오픈 더 도어'라는 표현은 크게 두 가지 용법으로 활용된다. 먼저, 표현 그대로 물리적 공간을 나누는 장치, 문(Door)을 열고 닫는 행위를 말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카메라가 중요하게 비추는 집안의 문은 단 한번만 열린 상태로 관객들을 마주하는데, 이는 극중 인물들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자 감독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다른 예술의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듯이 어떤 문을 연다는 행위는 타인 혹은 다른 대상에게 마음을 여는 행위와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이 부분에서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작품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연극의 막과 막 사이를 분절 시켜 놓은 것처럼 '챕터'의 구성을 활용하고 이를 열고 닫는다는 의미에서 '오픈 더 도어'라는 표현이 사용된 부분도 분명하게 엿보인다. 작품 속 장면 속에서 활용된 문의 의미가 단어적 용법의 차원이라면, 이번에는 영화의 구조적 용법에 가깝다. 관객이 각각의 챕터의 문을 열고 들어와 그 안에 구현된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다시 문을 닫는 형식의 구성. 문을 열고 닫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작품이 차용하고 있는 미스터리라는 장르적 특색을 한층 더 깊이 따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해석적 용법. 인물들의 행위를 문을 열고 닫는 것으로 표현하는 부분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전까지는 제대로 제어되고 있던 도덕적 행위의 경계를 깨고 일탈에 가까운 새로운 행위를 가져갈 것인가, 가져가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인물이 실제로 문을 열고 닫는 행위와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점에 해당하는 챕터 1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면 어떤 의미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픈 더 도어>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오픈 더 도어>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7일 영화제 공식 상영이 끝나고 열린 GV 자리에는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장항준 감독과 함께 화제의 팟캐스트인 '씨네마운틴'을 진행하고 있는 송은이 컨텐츠랩 비보 대표였다. 두 사람은 사석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 영화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단편, 아직 시나리오가 탈고도 되지 않은 작품의 뼈대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송은이 대표는 직접 제작을 맡겠다고 제안까지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송은이 제작'이라는 글자가 꽤 큰 글씨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방송인 송은이가 아니라 이 영화 <오픈 더 도어>를 제작한 제작자의 이름으로 자리에 함께한 것이다. 20분 정도의 단편에 불과했던 초기의 아이디어는 두 사람의 협업으로 현재의 장편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의 장항준 감독을 TV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만나온 사람들은 그의 재치 넘치는 입담과 언변에 그의 진면목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갈대가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까닭은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외연으로는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나는 장항준 감독이 꼭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 <오픈 더 도어> 역시 마찬가지다. 장르의 특성상 영화의 주요 내용과 관련한 핵심적인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하느라 이 영화의 매력을 면면이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장편 영화치고는 짧은 72분의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지금의 장항준 감독이 얼마나 감각적으로 날이 서 있는지를 확연히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오픈 더 도어. 문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이 영화의 문을 꼭 한번 열어보시기를 추천한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오픈더도어 장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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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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