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1.
작가를 꿈꾸며 상경했던 혜영(한선화 분)은 아버지의 기일을 핑계 삼아 본가인 부산 영도집으로 돌아온다. 휴가로 일주일쯤 쉬게 되었다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겠다는 혜영의 모습이 가족들은 어쩐지 이상하다. 큰 언니 혜진(한채아 분)은 혜영과 달리 평생을 영도에서 벗어나보지 못했다. 그나마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이 영도 다리를 건너 있기에 물리적으로는 하루 두번씩, 출퇴근을 하며 영도를 벗어나고 있지만 더 멀리 나가본 일은 거의 없다. 아버지의 부재 이후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고 있다. 혜영은 아직 서울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막내 동생 혜주(송지현 분)는 아직 고등학생이라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한편, 막내 혜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혜영처럼 영도를 떠나고자 한다.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다. 세 남매의 이야기가 서로의 더께를 쌓아갈 즈음, 엄마의 도자기에서 일본어로 된 편지가 한통 발견된다. 그리고 이 편지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엄마의 이야기가 되며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나간다.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는 부산 출생의 김민주 감독이 연출한 첫 장편 영화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부산에서 지냈다는 그녀는 자신의 첫 장편 작품에서 어린 시절 보고 자랐던 풍경과 이야기를 담아냈다. 특히 영도라는 공간이 다른 작품에서 느와르/범죄 장르의 배경으로 주로 활용되었던 것과 달리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이식시켜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한 번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거나 영도 다리 귀신과 같은 실제 영도 토박이들만이 아는 이야기로 생생한 영도의 모습을 담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02.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지점은 제시되고 있는 인물 누구에게도 소홀하지 않다는 것이다. 감독은 사건 위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러닝 타임의 많은 부분을 극중 인물의 서사를 쌓는데 할애하는 모습을 보인다. 각자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낸 후에 그 이야기를 토대로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그려나간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극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둘째인 혜영처럼 (극의 처음을 시작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다양한 에피소드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보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혜진과 혜주에게도 시선이 주어진다. 엄마(차미경 분) 역시 세 딸의 이야기를 위해 그저 소비되지 않는다.

각자의 이야기가 쌓이는 과정에서 인물마다 제 사정에 따라 중심이 되는 소재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하나의 뼈대를 공유하고 있는 부분 역시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혜진의 삶에서 중요한 화두는 자신이 맏이로 태어났다는 것이고, 혜영에게 중요한 것은 남들이 바라보는 기대치만큼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부응하는 것이다.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은 막내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세 사람, 엄마라는 인물까지 포함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네 사람은 공통된 주제를 함께 공유하며 삶 속에 간직하고 있다. '버리지 못하고 외면하지 못하는, 쉽게 떠나지 못하는 어떤 마음'에 대한 것이다.

심지어 부서지고 망가진 것들조차 자신의 지난 시간과 관련된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의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 멀리 떨어져 지낸 엄마와의 서신을 이제는 제대로 읽지도 못한다면서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좋아하면 만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서, 추억은 그럴 수가 없기에 그 물건들이 자신에게는 그런 만질 수 있는 추억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진심을 슬며시 드러낸다. 멀리 떠나보고 싶지만 가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첫째의 책임감이, 혜영에게는 성공을 꿈꾸며 자신 있게 떠났던 서울 살이가 같은 지점에 놓여있다. 자신만큼은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눈치와 부담감이 막내에게까지 부여되어 있으니, 극중 모두가 서로의 사정은 다 알지 못해도 나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를 통해 그려진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지점에서 일련의 계기를 통해 이들 모두는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공통된 주제이자 문제를 각자의 방식대로 조금은 해소하는 듯한 장면이 제시된다. 작품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이 뼈대를 세웠는지에 대한 여부는 감독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놓고 보니 '한 번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는 영도의 전설과도 의미적으로 상응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영도라는 공간적 설정이 인물들의 심리와 동일화된 상태로 놓여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엄마의 존재에 엮여있는 두 가지 큰 문제인 치매와 일본 출생의 비밀은 이 가족의 시작점이자 끝점으로, 비유를 하자면 각각의 괄호 한 쌍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깥쪽에 놓인 큰 괄호의 자리에는 엄마의 일본 출생과 관련한 이야기가 놓여 있다. 일본인 할머니와 한국인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만나 결혼을 하고, 다시 돌아가지 못할 줄 몰랐던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의 엄마만 데리고 여기 영도에 정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영도에서 벗어날 줄 몰랐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서 한 가족을 이뤄 세 딸을 낳아 길렀다. 가족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이 출생의 비밀은 안쪽에 놓이게 되는 작은 괄호 치매를 딛고 가족이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출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홀로 간직하고 있던 엄마가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엄마와 세 딸의 여행은 앞서 이야기한 마음의 추를 던져버릴 수 있게 만든다.

다만 한가지 주의할 것은 이 영화에서 엄마의 치매가 내러티브 속의 중요한 장치이기는 하나 <스틸 앨리스>(2015)와 같이 치매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처럼 그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7일 영화제 극장 상영이 끝난 직후 관객과의 대화(GV)에 참여한 김민주 감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저도 이 소재를 선택하면서 조심스러웠던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함부로 다루고 있지는 않은지, 조사가 너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부분에서 말이죠. 실제로 이 병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상처를 드리게 되지는 않을지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중략) 제가 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기 보다는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마지막으로 되살려주고 선물해주자'라는 의도 아래에서 설정한 것이어서 그저 그동안 제가 고민해 왔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4.    
딸들이 조금이라도 더 멋지게 보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 직업을 소개하는 엄마. 자신의 처지가 가족들에게 부담이 될까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려는 둘째 딸. 가족의 부양에 대한 무게를 기꺼이 지고자 하면서도 자신보다 더 자유롭게 사는 동생들이 부러우면서도 미안하고, 고마우면서도 샘이 나는 첫째 딸. 아직은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고 도울 수 없지만 제 몫은 어떻게든 해내며 꿈도 키워가고 싶은 막내 딸. 이 가족의 면면을 지켜보고 있자면, 역시 우리 모두는, 제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서로의 사정을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으며 나름의 사정과 각자의 비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교토에서 온 편지>도 러닝 타임 내내 가족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앞선 인터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 녹아 있는 가족과 인물들에 대한 감독의 마음과 고민은 아주 깊은 곳까지 사려 깊게 닿아 있다. 그리고 영화가 그려내는 가족에 대한 표상은 그 깊이만큼이나 관객들의 마음 속 낮은 곳까지 전달된다. 누군가에겐 엄마라는 이름으로, 또 누군가에겐 형제와 자매라는 이름으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다. 영화에서 섬의 높은 언덕을 오르던 엄마는 돌아서 넓게 펼쳐진 항만을 바라보며 말한다. 내려다 보이는 바다의 모습이 마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일본의 고향과도 닮은 듯하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녀가 오랜 시간 영도를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을 나서며 생각했다. 그랬던 그녀가 오랜 시간을 딛고 그 섬을 벗어나 또 하나의 내일을 찾은 것처럼, 영도라는 섬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한 꺼풀 젖혀낸 김민주 감독 역시 또 한번의 시간을 딛고 영도를 벗어나 또다른 이야기를 그려낸다면 어떤 내일을 그리게 될까 하고 말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게 될지는 모르겠다.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막 걸음을 시작한 이 감독의 내일을 응원하며 기다릴 것이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교토에서온편지 한선화 한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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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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