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미국을 기회의 땅(The Land of Opportunity)으로 여기고 자신들의 꿈을 이루려고 하는 희망을 의미한다. 미국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이미지란, 경제적 부유를 바탕으로 마당이 있는 좋은 집에서 여유로운 삶을 뜻한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이 이러한 긍정적인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전 세계에서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국가다. 수많은 민족과 인종이 뒤엉키면서 자연스럽게 이주민과 정착민 간의 갈등같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도 발생했다.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 간의 충돌과 세력화는 급기야 범죄까지 불러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마피아(Mafia)'는 왜곡된 아메리칸 드림이 낳은 부끄러운 유산으로 지금도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8월 2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는 '아메리칸 드림이 낳은 괴물-아메리칸 마피아'를 주제로 미국사 전문가인 김봉중 전남대 교수의 강연이 펼쳐졌다.
 
미국으로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건너오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등장한 마피아는 약 100년 가까이 미국 사회의 검은 지배자로 군림해왔다. 지금은 잔혹한 범죄조직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마피아가 시작부터 지금같은 이미지였던 것은 아니다. 마피아의 기원은 이탈리아의 한 섬인 시칠리아에서 비롯됐다. 본토로부터 떨어져 중앙정부의 관리로부터 벗어나 있던 시칠리아는 오랜 세월 대지주들에 의한 부패와 전횡이 만연했다. 시칠리아인들은 비극적인 역사가 반복되면서 외부인들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게 됐고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가족과 자신을 지켜야 했던 주민들이 의지했던 것은 각 마을의 우두머리였다. 이들은 마을의 수호자이자 분쟁을 해결하는 현자같은 역할을 수행해야했다. 이러한 우두머리나 조직을 지칭하며 쓴 '두려움없는', '자신감 넘치는'이라는 시칠리아 방언에서 유래한 것이 바로 오늘날 마피아의 어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피아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사례를 받는 관례가 거듭되면서 점차 폭력이나 살인까지 대행해주며 청부업자로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같은 출신지 위주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뭉쳐서 '패밀리'를 형성하며 조직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시칠리아 마피아가 자치 모임에서 범죄조직으로 성격이 변화하는 시점은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으로 추정한다. 영화사의 걸작으로 남은 <대부> 시리즈는 시칠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인 콜레오네 패밀리를 중심으로 마피아의 탄생 배경과 서사, 속성 등을 가장 잘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세기 시칠리아인은 자연재해 등으로 살기 어려워진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진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했고 여기에는 마피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다수가 뉴욕의 이스트 할렘 지역에 정착하며 이탈리아 할렘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탈리아인 외에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19~20세기초를 미국사에서는 '대이주의 시대'로 칭하고 있으며 당시 미국 인구의 1/4 이상이 이주민이었다.
 
이탈리아 이주민들은 초기에 미국에서 많은 텃세와 차별에 시달렸다. 조셉 A 셰익스피어 당시 뉴올리언스 시장은 "우리 중 가장 게으르고 사악하며 무가치한 인간들. 이 극악무도한 자들을 끝장내며"라며 이탈리아인들을 노골적으로 비하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인들은 뉴욕의 빈민가를 이미 먼저 장악하고 있던 아일랜드 갱들에게도 많은 탄압과 착취를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동포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등장한 세력이 바로 마피아였다.
 
1900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이탈리아인의 80%가량이 마피아의 근거지였던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남부 출신이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범죄를 저지르고 미국으로 도피한 마피아이기도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으나 이후 세력이 커지면서 점차 본색을 드러내 오히려 동향인 이탈리아인들을 갈취하는 범죄집단으로 바뀌게 된다.
 
아메리칸 마피아가 세력 키운 결정적 계기 금주법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아메리칸 마피아의 시초로 모렐로 패밀리가 꼽힌다. 보스인 주제뻬 모렐로는 선천적으로 오른손에 집게손가락밖에 없어서 '갈고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모렐로는 위조지폐, 납치, 술집, 살인과 폭행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모렐로는 '검은 손'으로 불리는 편지를 써서 돈을 내지 않으면 불을 붙이거나 폭탄으로 날려버리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03년 4월 14일 모렐로 패밀리의 한 조직원이 목이 잘린 시체로 뉴욕 이스트할렘의 거리에서 발견되는 '드럼통 살인사건'이 벌어지며 마피아의 잔혹한 범죄가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 승승장구하던 모렐로 패밀리는 보스인 모렐로가 훗날 위조지폐 유통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으며 몰락한다.

금주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메리칸 마피아가 세력을 키우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금주법을 비웃듯 사람들은 몰래 술을 찾았고, 밀주업이 크게 성행하면서 당시 마피아들의 연간 수익은 한화로 1조 원에 이르렀다. 시칠리아 마피아 출신인 주세페 마세리아는 금주법을 계기로 성장한 대표적인 마피아였다.
 
마세리아는 가석방으로 출소한 모렐로를 고문으로 영입하는가 하면, 킬러로 악명높았던 찰스 루치아노를 입단식을 거쳐 자신의 오른팔로 영입했다. 당시 시칠리아 마피아들은 입단식에서 손가락을 칼로 베고 그 피를 성자의 사진에 뿌려서 불태우고 "형제들을 배신하면 사진 속 성자처럼 불타죽을 것"이라는 '피의 선서'를 하게 했다고.
 
뉴욕의 지하세계를 장악하려는 마세리아의 야망은 필연적으로 암흑가의 패권을 둘러싼 유혈충돌을 불러왔다. 마세리아 패밀리에 도전장을 던진 것은 마란자노 패밀리였다. 두 세력 간의 대결이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이다.
 
초기에는 세력이 우세한 마세리아가 유리했다. 하지만 본인이 보스가 되고 싶었던 루치아노가 배신하여 마란자노 패밀리와 은밀하게 손을 잡고 모렐로와 보스 마세이라를 모두 제거한다. 루치아노는 마세리아의 패밀리를 흡수한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전쟁을 승리한 마란자노 패밀리의 수장 살바토레 마란자노는 자신의 조직을 비롯한 루치아노, 망가노, 갈리아노, 프로파치의 뉴욕 5대 패밀리를 소집하여 '코사 노스트라'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1인자에 오른다. 뉴욕 마피아들은 5대 계율을 정하고 마피아 조직을 위한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이 시스템은 이후로도 마피아 조직의 기본적인 조직 체계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피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란자노는 루치아노를 처리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이를 먼저 눈치챈 루치아노가 보낸 유대인 킬러들에게 역공 당하여 1인자가 된 지 약 5개월 만에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다. 패권을 잡은 루치아노는 1931년 마피아위원회를 결성하고 더욱 체계화된 시스템을 구축하며 당시 미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루치아노와 함께 이 위원회의 토대를 쌓은 또다른 마피아 거물이 바로 후대에도 널리 알려진 알 카포네였다. 얼굴의 흉터인 '스카페이스'가 트레이드마크였던 카포네는 "나의 친절함을 나약함으로 착각하지 마라"는 섬뜩한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카포네는 다른 지역의 마피아들과 연대하여 밀주사업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전성기였던 1927년 카포네 패밀리는 약 1억 달러(현재 가치 약 1조 7000억 원)가 넘는 총수익을 기록했다.
 
카포네는 1929년 2월 13일 경쟁자인 아일랜드계 갱들을 대거 살해한 '성 발렌타인데이 학살사건'으로 그 악명을 미국 전역에 떨치게 된다. 플로리다에 있었던 카포네는 결국 명확한 물증을 찾지 못하여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
 
카포네는 1930년 미국에서 금주법 폐지운동이 벌어지며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하여 우유 사업에 눈을 들였다. 이 과정에서 우유에 유통기한을 표시하는 제도를 도입하기 위하여 시의회에 로비를 하기도 했다. 물론 본인의 이익 때문이기는 했지만, 잔혹한 범죄자로만 알려졌던 카포네가 우유 유통기한 제도 정착을 통하여 일정 부분 사회적으로 기여하게 된 모양새는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암흑가의 대부로 군림하던 카포네도 1931년 22건의 탈세와 금주법 위반혐의로 결국 악명 높은 알카트라즈 감옥에 수감되면서 몰락했다.
 
미해군과 범죄조직 마피아의 연합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한편 뉴욕의 1인자가 된 루치아노는 유대계-아일랜드계 등 혈통을 초월한 기업형 범죄조직인 전미 범죄 연합회를 창설한다. 마피아는 금주법 폐지 이후 마약-매춘-도박장 운영과 할리우드 영화업계 진출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승승장구하던 루치아노는 1936년 매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62건의 혐의로 투옥되며 법의 심판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루치아노는 감옥 안에서도 킬러조직인 '살인주식회사'를 통하여 여전히 실권을 유지했다. 핑거맨(정보수집, 암살계획)-휠맨(운송담당)-이베포레이터(증거인멸 및 수습)-히트맨(타깃 제거) 등의 세분화된 시스템으로 구성된 살인조직에 의한 피해자 수만 미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것이 무려 63명에 이르며, 실제로는 400여 명에서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심지어 루치아노는 형기 50년을 다 채우지 않고 석방된다. 2차대전시기 미국 정부는 뉴욕 맨해튼 항구에서 벌어진 '노르망디호 화재사고'를 계기로, 이 지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탈리아 이주민들에게 영향력이 큰 루치아노에게 도움을 받는 조건으로 형량 거래를 제안했다.

미해군과 범죄조직 마피아의 연합이라는 초유의 사건은 코드명 '언더월드 작전'으로 불리우며 마피아는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미군의 눈과 귀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은 시칠리아섬을 공략한 '허스키 작전'에서도 루치아노를 앞세워 시칠리아 마피아들의 도움을 받았다.
 
루치아노는 정부에 협력한 대가로 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뒤 이탈리아로 추방됐다. 루치아노는 이후로도 몇 차례 미국 복귀를 시도했지만 미국 정부의 거듭된 추방 명령으로 루치아노의 영향력은 차츰 감소했다.
 
루치아노가 사라졌어도 뉴욕 마피아들의 세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뉴욕 5대 마피아들의 세력은 더 커졌고 그들은 마약이라는 새로운 사업에 눈을 돌렸다. 마피아들은 이른바 '프렌치 커넥션'으로 불린 해외 범죄조직과의 연계,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밀수 루트를 통하여 다양한 헤로인들을 밀수했다.
 
1951년에서 1973년까지 미국 헤로인 소비량의 80% 이상을 프렌치 커넥션이 장악했다. 1945년 2만 명에 불과했던 미국의 헤로인 중독자 수는 1973년에는 56만 명으로 급증했다. 또한 마피아들은 이외에도 양배추, 양초 등에 대한 독점사업으로 많은 수익을 거둬들였다. 마피아 취재를 전문으로 했던 셀윈 랍 <뉴욕타임스> 기자는 저서에서 "1960년대 20여 개 미국 마피아 패밀리의 범죄수익은 연간 70억 달러(현재 한화 약 90조 원)를 넘어섰으며 이는 미국의 10대 대기업의 수익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고 서술했다.
 
1957년 거대화된 마피아 조직의 실체를 드러낸 '아팔라친 모임'이 세상에 알려진다. 마약 밀수입과 불법거래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연방 마약법이 통과되며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전국 마피아 조직의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를 경찰이 급습하여 체포된 두목급만 약 62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미국 범죄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힌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그동안 미국에서 마피아에 대한 조사가 왜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는지는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FBI(미연방수사국)가 마피아와 결탁하여 범죄를 방관했다는 설부터, 자신들의 무능이 드러날까봐 공론화를 꺼렸다는 가설도 있다.
 
1960년대 들어 마피아 범죄를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지한 미국 사회는 마피아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리코액트(Rico act, 조직범죄 처벌법) 등을 통하여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다. 개별범죄를 조직 범죄로 묶어서 기소가능한 리코액트법의 도입은 1980년대 뉴욕 5대 마피아를 검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 뉴욕의 남부검사장을 지낸 루돌프 줄리아니는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범죄 척결에 앞장섰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가 검사로 재직하던 시절 약 4000건의 유죄를 이끌어내며 마피아 킬러라는 명성을 얻은 일화는 유명하다. 본인도 이탈리아계였지만 어린 시절 조부모들이 마피아의 착취에 시달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자란 줄리아니는 마피아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품게 된다.

1983년 뉴욕 연방지검장으로 부임한 줄리아니는 마피아 척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탈리아계 미국인들 중 마피아는 아주 적은 비율에 불과하다. 우리가 마피아를 제거한다면 이민자들은 더 이상 마피아가 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에게 매우 좋은 일"이라며 협조와 지지를 당부했다. 또한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3년 7월 28일 조직범죄에 대한 특별담화문을 발표하며 "마피아를 100년 동안 지속된 미국 역사의 오점"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소탕 의지를 드러내며 줄리아니의 든든한 우군이 됐다.

FBI는 지속적인 수사와 도청 등으로 통하여 뉴욕의 마피아 패밀리들이 '마피아위원회'라는 기구를 통하여 사업의 결정권이 긴밀하게 엮어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마약사업을 독식하려다가 살해 당한 카르미네 갈란테의 미제 살인사건을 재수사한 FBI는, 그 배후에 마피아위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85년 리코법에 따라 안토니 코랄로, 폴 카스텔라노 등 거대 마피아 보스로 알려진 마피아위원회 위원 9명이 기소됐고 가석방 기간 중 다른 조직원에 실해 당한 1명을 제외하고 전원 유죄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들은 100년 이상의 형을 받았고 이로써 뉴욕을 지배하던 5대 마피아 패밀리는 몰락했다. 1990년까지 보스급 외에도 약 천명에 이르는 마피아들이 리코법에 의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
 
마피아의 위협에 굴하지 않았던 줄리아니는 "용기란 두렵지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마피아는 결코 영화에서처럼 멋있는 갱스터가 아니었다. 불법적이고 손쉬운 방법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욕심을 채웠던 마피아는, 성실한 가치를 추구하던 이민자들을 착취하여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빼앗은 악인들에 불과했다.

시대와 나라, 상황은 달라도 꿈을 이루는 방법은 모두 자신들의 선택에 달렸다. 책임질 줄 아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정당한 방식으로 꿈을 이루는 사람들이 더 존중받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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