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극 중에서 드라마 주인공인 '나희도(김태리 분)'와 내 나이가 비슷해 쉽게 감정이입이 된다. 드라마의 배경은 외환위기가 있던 1998년. 고등학교 펜싱부인 나희도는 어느 날 갑자기 펜싱부가 없어진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한다.

희도는 코치 선생님께 어떻게 자신의 꿈을 빼앗을 수 있냐며 억울해한다. 코치 선생님은 '네 꿈을 빼앗은 건 내가 아니라 시대'라고 답한다.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나희도는 펜싱부로 유명한 태양고로 전학을 가고 국가대표 선발전에 가까스로 참여하게 된다. 전국 24위까지만 참여 가능한 대회인데 나희도 앞의 두 명이 IMF로 펜싱을 그만두게 되자 26위인 나희도가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태양고 코치는 나희도에게 "시대가 너를 돕는다"라고 말한다.

드라마는 계속 앞으로 나가는데 그 '시대'라는 말이 날 붙잡는다. 그때 나는 어땠는지, 어떻게 그 시대를 지나왔는지 생각한다.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한 장면 ⓒ tvN

 
시대, 날 붙잡은 단어
 
난 1998년도에 재수생이었다. 사실 대학에 가긴 갔다. 내가 합격한 과는 '사학과'였다. 당시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던 내 초미의 관심사는 졸업하고 어디에 취업할 수 있는지였다. 난 과대라는 선배에게 물었다. "사학과를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나요?" "교사가 될 수도 있고 박물관 관장도 될 수 있지." 스무 살인 나에게 박물관 관장은 너무 멀어 보였다.

학교 안 박물관을 구경시켜 주시던 관장님이 은퇴하기 전까지는 그 자리가 비지 않을 게 분명하다. 전국에 박물관이 얼마나 있다고. 그리고 국사나 세계사 교사는 한 학교에 한두 명이라 많이 뽑지도 않을 텐데. 난 일주일 후, 재수를 결심했다. 그해 갑자기 취업이 어려워져 취업이 잘 되는 교대 점수가 눈에 띄게 많이 올랐다. 중학교 때부터 항상 전교 3등 안에 들었던 친한 친구가 교대에 갔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백이진(남주혁 분)은 국내 유수 기업 회장의 장남으로 부유하게 지냈으나 아버지 회사가 부도 나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 당시 우리 집도 IMF 직격탄을 맞아 휘청했었다. 하지만 원래도 그리 잘 살지는 않았으니 극 중 백이진의 상황과는 다르다. 아파트에 살다가 그 평수 절반쯤 되는 연립주택으로 이사 간 정도. 연립주택으로 이사 온 후, 동생은 나에게 "언니, 깜깜한 밤에 방불을 켜면 바퀴벌레가 사사삭 숨는 소리가 들려" 하고 말했다.

아빠는 사업을 하셨는데 그 전에도 잘 되다 안 되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꾸준히 일은 하셨는데, IMF 이후로는 집에 계셨다. 집에서 오래 신문을 보셨다. 난 침울한 집안 분위기를 피해 구립도서관에 가서 공부했다. 우리 집에서 구립도서관까지는 걸어서 30분이 넘게 걸렸는데 버스비가 없어 그 길을 걸어 다녔다.

항상 점심 먹을 1천 원만 가지고 다녔다. 당시 도서관 1층 식당에서 팔던 우동과 김밥, 라면이 각각 1천 원씩이었다. 친구들은 그곳에 와서 자주 내 점심을 사주었다. 내가 재수한다는 걸 안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께서 국어 문제집을 보내 주셨고 예전에 다녔던 학원 선생님께서 영어 문제집을 매달 챙겨주셨다. 열심히 공부하면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당시 동생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동생의 같은 반 친구가 학비지원제도를 알려줘 고등학교 학비 걱정을 덜 수 있었고, 가방이 찢어져 난감해할 때 자신이 안 쓰는 가방이라며 브랜드 가방을 선물한 친구도 있었다. 문화생활은 언감생심이었던 내게 공짜 표가 생겼다며 영화와 뮤지컬을 보여준 친구들도 있었다. 낙심할 만하면 고마운 사람들이 곳곳에서 지원 사격을 해주었다.

얼마 전 만난 동생과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예전 이야기를 하게 됐다.
 
"언니, 나는 그때 가난한 게 부끄럽지가 않았어. 교통카드 하나만 가지고 다녀서 돈이 없었는데 친구들이 매점 갈 때 날 꼭 데려갔어.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고맙지."
"그랬구나. 참, 그리고 그때 노숙자가 엄청 많았었잖아. 내가 재수할 때 영등포역에 있던 서점에 책을 사러 갔는데 도와달라는 노숙자들에게 돈을 주다가 책값이 모자라서 그냥 집에 온 적이 있어."
"하하하. 맞아, 언니가 엄마에게 엄청 혼났던 기억난다."

동생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시절엔 가난이 부끄럽지 않았고 날 많이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내가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었던 건 그 상황에 매몰되지 않게, 고마운 사람들이 내 옆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만의 행복 비법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한 장면 ⓒ tvN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갑자기 IMF가 닥친 것처럼 코로나19도 갑자기 우리 삶에 끼어들었다. 그러길 3년째다. 당장 생계가 힘든 자영업자들도 있고 취업이 되지 않아 고민인 청춘들도 있다. 격무에 시달리는 의료진과 교사, 코로나19에 걸려 병상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드라마에서 나희도는 백이진이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백이진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어떤 순간에도 행복해지지 않겠다고 말한다. 무슨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그 순간, 나희도는 자신이 힘들 때 행복해지는 비법을 공유한다. 백이진을 고등학교 운동장 수돗가로 데려가 수도꼭지를 거꾸로 뒤집어 분수를 만든다. 그리고 둘이 있을 땐 아무도 몰래 잠깐만 행복하자고 말한다.

주변의 힘든 사람에게 조금 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자신의 가진 것을 흘려보내면 어떨까. 자신의 행복 비법을 나누어 주면 어떨까. 100% 행복한 사람도 100% 불행한 사람도 없으니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기대며 나아가면 좋겠다. 길게 보면 아득하지만, 조그만 행복 비법이 있다면, 날 응원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오늘 하루는 살만해질 것이다. 그 당시 나와 우리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어쨌든 난 재수 시절을 잘 보냈고 이전보다는 취업이 잘 되는 사범대에 가서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했다. 아빠는 주변의 도움으로 다시 작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도울 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이 시대가 날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나를 돕는 상황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이건 내가 나에게 거는 주문이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데 일이 없어 벌어놓았던 돈을 조금씩 까먹고 있다. 불안하지만 이 시간을 기회 삼아 더 능력을 키우자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스스로 격려한다. '그 시대를 그렇게 잘 넘어왔듯이 이 시대도 잘 넘어가지겠지' 하고 희망을 품는다.
덧붙이는 글 김지은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IMF #스물다섯 스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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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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