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포스터.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듣지 못 한다"라는 문구가 섬찟하다.

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포스터.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듣지 못 한다"라는 문구가 섬찟하다. ⓒ 20세기 폭스


정부가 추진하는 비혼, 출산율 대책은 영 본질에서 빗겨나 있다. 불안정한 출산 환경(주거와 생활)을 해결하지는 않고 최근 인공 임신중단(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에 포함시키려 했다가 낙태 찬반 논란만 부추긴 경우가 대표적이다. 으레 낙태 논란은 태아의 '생명권'에 주목하는 반대론과,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에 주목하는 찬성론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는 이 교착 상태에서 벗어난, 또 다른 상상력을 가능하게 한다.

이 영화를 색다른 관점으로 보고 나면 태아 대신 바깥세상의 형편을 살피는 산모의 결정이 왜 존중받아야 하는지 이해할지도 모른다. <에일리언> 시리즈는 오리지널과 프리퀄로 나뉘는데 전 시리즈에 걸쳐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깔려있다. 그래서 절망적이고 종말론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세상에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옳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헬조선의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에일리언> 시리즈의 재평가가 시급하다.

<에일리언>의 마더

이 글에서 리뷰할 오리지널 1편은 광물을 싣고 지구로 귀환 중이던 노스토로모호의 마더, 즉 '엄마'라는 별명을 가진 시스템이 갑자기 동면 중인 승무원들을 깨우며 시작한다. 기저귀처럼 하얀 속옷만 입은 뽀송뽀송한 승무원들은 인큐베이터의 신생아들처럼, 동면에서 깨어나 단란하게 식사를 한다. 이 모습은 흡사 한 집안의 형제자매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아직 태양계에 닿지 않은 걸 깨닫고 엄마가 왜 벌써 깨웠는지 의아해한다.

사실 이 '엄마'는 좀 이상한 엄마임에 틀림없다. 선장이 "엄마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묻자 무미건조하게 "인터페이스 2037 탐사준비"라고 답한다. '기계니까 그렇게 프로그래밍 됐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로 그게 문제다. 기계인데 감독은 왜 굳이 '엄마'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어쨌든 '기계화된 엄마'는 LV-426이라는 행성에서 12초 간격으로 반복되는 음향 신호를 탐지했으니 조사하라고 지시하고 자식들은 당황한다. 육체노동자들은 반대까지 한다.

그러나 과학담당관 애쉬가 '지적 문명 기원의 존재 가능성'이 감지됐을 때 조사하지 않으면 보수를 전액 몰수한다는 회사 계약서 규정을 들어 굴복시킨다. 결국 '엄마'는 회사의 지침대로 지시를 내린 것이다. (3편에서 밝혀지지만 지시의 배후인 회사 대표는 '남성'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다분히 과학주의, 가부장 중심질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여성을 종속시킨 남성의 세상, 남성에 의해 주체성을 상실한 여성을 영화는 '마더'라는 기계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그럼 이러한 부모의 결정으로 바깥세상에 나온 자식들의 운명은 어떨까?

 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스틸컷.

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스틸컷. ⓒ 20세기 폭스


운명을 알려면 '인간성'의 기원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바깥세상으로 나오기 전 엄마 뱃속의 태아는 보통 자신과 외부 대상을 잘 구분 못 한다. 아직 감각 기관이 덜 발달했고 엄마의 주기적인 심장 박동 외에 특별한 자극도 없어서 흡사 망망대해에 평온하게 떠 있는 듯 잠든 상태와 같다. 그러다 차츰 다양한 자극이 닥쳐오며 자신과 외부 대상이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이것은 불행의 시작이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각각의 대상이 주는 쾌감은 추구(사랑)하고 불쾌감은 제거(공격)/회피(혐오)하는 '본능'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에일리언', 인류의 악마적 본성을 '우주 괴물'로 타자화한 것

바깥세상에 나온 아기들은 이제 특정 행동을 해야만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음을 깨닫는다. 가령 칭얼거리고 생떼를 부려야만 엄마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잠들 수 있다든가, 불편한 똥 기저귀가 제거된다든가. 영화 내내 에일리언과 접촉한 승무원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마더'를 향한 긴급한 다그침이 인간이 자신과 외부 대상의 경계를 확실히 긋는 법을 터득하고 사회화되는 과정을 짧은 러닝 타임에 압축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한편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 스위치는 사랑과 혐오 이전에 제3의 본능인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어떤 물건과 접촉했을 때 이게 쾌감을 줄지 불쾌감을 줄지 어찌 알겠는가. 요리조리 살펴보거나 만져보거나 조사부터 할 수밖에 없다. '이게 뭐지?' '도대체 뭐지?' 하는 그놈의 주체 못 할 호기심 말이다. 그런데 무엇인지도 모르고 건드렸다 잘못될지 또 어떻게 알겠는가? <에일리언> 1편이 경고하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V-426에 착륙한 승무원들은 조사팀과 잔류팀으로 나누어 선장(남성)은 조사팀을. 다음 서열인 리플리 중위는(여성) 잔류팀을 지휘한다. 선장이 이끄는 조사팀은 곧 음향 신호의 출처인 외계 우주선을 발견하게 되는데, 재밌는 것은 리플리가 음향 신호를 분석해보니 구조 신호가 아니라 경고 신호인 것 같다는 걸 알아차렸음에도 애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점이다.

 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스틸컷.

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스틸컷. ⓒ 20세기 폭스


조사팀 여성 대원 램버트가 계속 그만 돌아가자 하는데도 남성 대원들은 호기심에 홀린 듯 기어이 외계 우주선에 진입해 화석화된 채 죽어있는 외계인을(프리퀄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엔지니어'라 불린다) 발견한다. 이 외계인은 가슴이 뚫려 있었기에 이 자체로 위험 징후일 수 있음에도 남성 대원 케인은 정체불명의 알들이 깔린 방까지 진입한다. 결국, 호기심은 그를 파멸로 이끈다. 알에서 '페이스 허거'라는 괴물이 튀어나와 얼굴에 들러붙은 것이다.

조사팀은 케인을 부축해 서둘러 탐사선으로 복귀하고, 리플리는 케인이 감염돼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니 규정에 따라 검역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들여보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선장과 애쉬는 상황이 긴급하다며 무시한 채 들여보낸다. 케인을 동면시킨 뒤 해결책을 논할 수도 있을 텐데, 선장과 애시는 굳이 의무실에서 케인에 얼굴에 들러붙은 페이스 허거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도구로 건드려도 본다. 그러다 페이스 허거에게 상처를 내자 선체를 녹여버릴 정도로 강력한 산성 피가 흘러내려 잠시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선장은 애쉬에게 케인의 상태를 살펴보도록 지시하는데 곧 페이스 허거는 케인의 얼굴에서 떨어져 죽고 기절했던 케인이 깨어난다. 그러나 리플리의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애쉬는 페이스 허거의 사체가 과학적 연구 가치가 있다며 지구로 가져가겠다고 하고 선장은 애쉬의 뜻을 수용한다. 깨어난 케인과 승무원들은 다시 형제자매처럼 함께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케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의 가슴을 뚫고 새끼 에일리언이 튀어나와 주변을 혼비백산으로 만든다.

새끼 에일리언은 우주선 어딘가로 도망가 버리고 페이스 허거가 결국 인간의 몸을 숙주로 하는 기생충이었다는 게 판명 난다. 승무원들은 이제 "케인의 자식"을 죽이겠다며 나서는데 이쯤 되면 영화의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인간의 섣부른 호기심으로 인해 깨어나는 괴물이 '사람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다는 설정.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호기심으로 인해 위험에 빠지고 또 공격성이 깨어나는 존재라는 의미이며 그 악마적 본성의 순수한 형태를 에일리언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슴을 뚫고 나오는 <에일리언>의 설정

 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스틸컷.

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스틸컷. ⓒ 20세기 폭스


다만 <에일리언> 1편은 1편인 만큼, 인간의 호전성보다는 '호기심'에 초점을 맞춘다. 우주선 어딘가에 숨어 무서운 속도로 커가며 승무원들을 한 명씩 사냥하는 에일리언의 존재에 공포를 느낀 리플리는 '마더'에 접속해 에일리언을 제압할 과학적 지식과 추가정보를 요청하지만 '마더'는 정보가 없다고 딱 잘라 답한다. 인간은 과학적 호기심에 의해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지만 잘못됐을 시 책임질 능력은 딱히 없다는 점을 영화는 꼬집는 것이다.

리플리는 또한 '마더'가 과학담당관 애쉬에게 "외계 생명체를 조사하고 견본을 채집해 귀환할 것. 다른 모든 사항은 부차적임. 승무원의 희생도 무방함"이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해 애쉬에게 "회사의 무기부서가 외계 생명체를 원했느냐"고 따진다. 애쉬는 내막을 알아차린 리플리를 죽이려 들고 간신히 제압당한 애쉬가 안드로이드였다는 게 드러난다.

애쉬는 작동을 멈추기 전 에일리언의 호전성은 "생체구조적으로 완벽한 유기체"고 "놀라운 방어체계"를 갖췄기 때문이라며 "그 순수함에 감동했다"고 말한다. 리플리가 이유를 묻자 애쉬는 "(인간처럼) 양심의 가책, 헛된 망상, 도덕에 구애받지 않으니까"라며 자신을 창조한 인간을 조롱한 뒤 작동을 멈추는데, 이로써 인간 스스로 완벽한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리라 믿었던 인공 지능조차 인간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가 추출된다.

이제 리플리는 남성 선장도 기계화된 '마더'도 과학담당관 애쉬의 뜻도 아닌 자신의 뜻에 따라 노스트로모호 모선에서 벗어나 구명선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이제 리플리 자신이 '진정한 마더'가 된 것이다. 다른 승무원들은 에일리언에게 다 사냥당하고 영화 내내 일관성 있게 에일리언이 위험성을 먼저 알아차리고 경고한 리플리만이 구명선에 탑승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스틸컷. 에일리언을 '낙태시킨다'라는 표현은 인간 태아를 괴물과 동격으로 본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이 장면이 인간의 어두운 본성(공격성)과의 단절을 시도하는 것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영화 <에일리언> 오리지널 1편 스틸컷. 에일리언을 '낙태시킨다'라는 표현은 인간 태아를 괴물과 동격으로 본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이 장면이 인간의 어두운 본성(공격성)과의 단절을 시도하는 것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 20세기 폭스


하지만 에일리언이 구명선까지 쫓아오는 반전이 일어나고 리플리는 '줄 작살'을 에일리언의 배에 발사해 꼽아버려 제압한 뒤 해치를 열어 우주로 날려버리는데, 이 장면이 흡사 산모가 태아와 '탯줄'로 이어진 관계를 끊고 낙태를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에일리언이 리플리의 뱃속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니 무리한 해석 아니냐는 반론도 있겠지만, 후속편 2~4편이 인간과 에일리언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리플리의 '모성'을 부각하는 장면들을 자주 등장시키는 동시에 위와 비슷한 클리셰를 반복하므로 이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는 점만 언급해두자.

결론적으로 <에일리언> 1편에 짙게 깔린 인간 본성에 대한 암울한 시선이 옳다면 인류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 논란이 되는 인구 절벽과 저출산도 결국 인간끼리 아등바등 물어뜯으며 각자도생했고 삶이 팍팍해진 결과다. 이런 세상에 '태아는 생명이다'라는 추상적 명제 하나에 근거해 '섹스를 즐겼으면 낳아서 길러야지'라고 말하는 건 관념상으로는 얼핏 옳게 들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실제로 부모들은 종종 "왜 저를 낳으셨나요?"라는 자식의 절규에 가슴이 찢어지는 한편 자책감도 느낀다. 단순히 '생명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면 우리가 하루에도 어마어마하게 죽여 대는 무척추동물들(세균, 미생물 등)에게도 죄를 짓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단지 생명인 게 아니라 '어떤 생명이냐'고 우리가 낙태에 신중한 건 태아가 우리와 모종의 '관계'를 맺을 가능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부터 사유해야 옳다.

몇 개월까지 유효할지 논란은 남지만, 뱃속의 태아는 외부 대상과 '분리되지 않은' 존재다. 이때 바깥세상을 바깥세상으로 인식하는 건 '애초에'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어떤 세상에 던져질지 모른 채 뱃속에 잠든 태아가 아닌 부모다(특히 산모). 따라서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가 태아를 죽여도 되나요?'라는 식의 낙태반대론은 태아의 특성을 무시한 채 살인과 낙태를 혼동하는 개념 상이의 오류다. 태아의 각성 전 되도록 빨리 결정하는 게 좋다는 전제하에 태아 대신 바깥세상의 형편을 살펴줘야 할 산모의 인공 임신중단 결정권은 존중받아야 한다.

남성/여성의 이분법은 과연 옳은가?
어떤 독자들께서는 이 영화의 남성성/여성성의 이분법 구조가 탐탁지 않을 수도 있다. 남성을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은 영화가 메시지를 선명하게 추출하고자 다소 극적인 장치일 뿐 실제 사람들의 내면은 복합적이고 복잡하다는 데서 위안을 찾자.

물론 이런 묘사가 아예 근거가 없진 않은 것 같다. 과거 인류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 구조상의 차이로 남성은 사냥하러 다니고 여성은 주거지에 머물며 가사와 육아를 담당했다. 이 때문에 진화심리학 상 남성은 호기심과 호전성이 더 발달하고 여성은 주변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느끼는 능력이 더 발달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엄마는 신체적으로 약한 자식을 돌보고 걱정하며 이물질, 벌레 등 접촉을 경계해야 할 외부 대상들에 대해 알려주는 역할도 수행했을 것이다. 반면에 외부 대상의 성질을 분석하고 추상적 법칙을 발견하는 건 과학인데 그 원동력이 바로 '호기심'이다.

서양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드러나듯 인류는 오래전부터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길 원했다. 그러나 호기심에는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여성의 경고는 인간 혹은 인류가 최소한 '존엄한' 죽음 혹은 종말을 맞이하게끔 이끄는 마지막 안전장치일지도 모른다. 엄마 말을 잘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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