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충격이었다. 지난 3일 끝난 KOVO(한국배구연맹)컵에서 배구팬들을 가장 놀라게 한 팀은 단연 KGC인삼공사였다.

인삼공사는 여자 프로배구에서 최근 2시즌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번 KOVO컵에서는 지난 시즌 V리그 챔피언인 현대건설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도 1세트 초반부터 IBK기업은행을 몰아붙이며 우승까지 거머쥘 기세였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6-2로 앞선 상황에서 수비의 핵인 김해란이 뜻밖의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후 수비 조직력이 급격히 무너지며 완패를 당했다.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지만, 인삼공사의 신선한 변신과 깜짝 활약은 배구 관계자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려했던 김해란의 팔꿈치 부상도 인대가 약간 늘어난 정도로 판명됐다. V리그 초반 3경기 정도 결장이 예상된다.

'몰방(沒放)'에서 '토털 배구·질식 수비'로 

 서남원 KGC인삼공사 감독. 그는 꼴찌의 반란을 주도했다.

서남원 KGC인삼공사 감독. 그는 꼴찌의 반란을 주도했다. ⓒ 박진철


인삼공사가 놀라운 건 단지 좋은 성적 때문만이 아니다. 경기 스타일이 이전과 너무도 달랐다.

그동안 인삼공사는 외국인 선수 중심의 '몰빵(몰방의 된소리 발음) 배구'였다. 공격을 외국인 선수 한 명이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 국내 선수들은 수비로 거들뿐이었다. 팀 성적도 외국인 선수의 능력에 따라 상위권 아니면 꼴찌를 기록하는 극과 극을 오갔다.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리 만무했다. 저조한 성적도 문제지만, 미래가 안 보이는 패배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시즌 전망은 더 어두웠다. 팀의 레프트 주전이었던 백목화와 이연주가 한꺼번에 팀을 떠났다. 전체 1순위 지명권을 받아 선발했던 외국인 선수마저 개인 사정으로 불가피하게 교체를 했다. 최고의 외국인 선수를 선발했다가 졸지에 7순위 이하의 외국인 선수를 보유하게 된 셈이다. 꼴찌는 물론이고 과연 몇 승이나 거둘 수 있을지가 더 궁금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남원표 인삼공사는 KOVO컵에서 대변신에 성공했다. 몰방 배구에서 벗어나 주전 선수 전원이 공격에 가담하는 토털 배구로 확 바뀌었다.

지난해까지 세터였던 한수지(182cm)는 센터와 라이트 공격수로 포지션 변경을 하면서 다른 팀의 웬만한 공격수보다 좋은 활약을 펼쳤다. 센터였던 장영은(182cm)도 레프트 공격수로서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존재감이 미미했던 최수빈(175cm)마저 공격과 수비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전반적으로 공격수들의 공격 결정력과 강도가 지난해보다 한층 좋아졌다. 수비 조직력은 '질식 수비'에 가까울 정도로 끈끈해졌다.

"레프트 공격수, 수비 면제 없다"

지난 4월 새로 부임한 서남원 감독은 '변화'를 핵심 모토로 삼고, 비시즌 기간 팀의 색깔을 바꾸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가장 먼저 몰빵 배구 청산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국내 공격수들의 마인드 변화를 끌어내는 데 주력했다.

서 감독은 5일 기자와 통화에서 "선수들에게 앞으로 '몰빵 배구는 안 한다', '외국인 선수에게 의존하려는 자세를 버리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내 공격수들에게 '내가 결정을 내겠다'는 각오로 강하게 때리도록 집중 훈련을 시켰다"고 밝혔다.

그는 "세터 이재은에게도 공격수 전원에게 고루 분배하라고 지시했다"면서 "세터가 발을 더 빨리 움직여서 공을 찾아 들어가 토스를 하도록 교정했다. 지난해보다 많이 발전했다"고 말했다.

서 감독은 또 "레프트 공격수는 공격과 수비를 모두 잘해야 한다. 그러려면 평소 경기를 통해서 꾸준히 수비에 가담해야 한다"며 "실책을 연발하거나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경우를 제외하고, 후위로 갈 때 수비형 선수와 교체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비를 면제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민경(184cm), 박세윤(178cm) 등 신인의 활약에도 큰 기대를 걸었다. 서 감독은 "지민경은 장신 레프트로 팀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많이 투입할 것이다. 적응이 잘 되면 주전으로 갈 수도 있다"며 "V리그 6개월 동안 레프트를 장영은, 최수빈 둘로 버틸 수는 없다. 지민경도 팀의 주전급으로 빨리 올라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민경도 마찬가지다, 레프트 공격수이기 때문에 리시브가 약하다고 수비를 면제시키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수비에서 버티지 못하면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없다.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가장 큰 걱정을 했던 외국인 선수 알레나(27세·190cm)도 KOVO컵을 통해 라이트에서 제 몫을 해줄 수 있는 선수로 판명됐다. 서 감독은 "알레나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다. 볼을 다루는 센스가 있고 어려운 볼 처리 능력도 있다"며 "시간이 갈수록 발전 가능성이 높은 선수"라고 평가했다.

센터는 한수지와 유희옥(185cm)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문명화(189cm)가 성장 중이고 신인 이선정(182cm)이 가세하면서 지난해보다 여유가 생겼다.

지난해는 현대캐피탈 돌풍, 올해는 인삼공사?

 KGC인삼공사 연습경기 장면. 과연 작년 현대캐피탈 이상의 돌풍을 만들 수 있을까.

KGC인삼공사 연습경기 장면. 과연 작년 현대캐피탈 이상의 돌풍을 만들 수 있을까. ⓒ 박진철


서남원 감독은 인삼공사 배구의 색깔에 대해 "아직 스피드 배구는 아니다"며 "그 전 단계인 토털 배구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피드 배구는 모든 공격수가 자기 위치에서 제 몫을 해내는 토털 배구를 바탕으로 빠른 시스템 플레이를 통해 리시브가 나쁜 볼도 공격 성공률을 높이고자 하는 전술이다.

서 감독의 토털 배구와 스피드 배구에 대한 소신은 장신 유망주인 정호영(16세·189cm·광주체육중)에 대한 조언에서도 이어졌다. 서 감독은 지난해 여름 대한민국배구협회가 실시한 꿈나무 훈련 캠프에서 정호영 등 어린 유망주들을 지도한 적이 있다. 서 감독은 당시 정호영의 장래가 밝다는 걸 직감하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예의주시해 왔다.

그는 "정호영은 고등학교에서 어떤 포지션의 선수로 성장하느냐에 따라 본인은 물론 한국 배구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가 만약 정호영의 소속 팀 감독이라면, 레프트로 키우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지금부터 리시브를 많이 받아 봐야 수비 실력이 늘고 대형 선수가 될 수 있다"면서 "지금 당장 (리시브가) 잘 안 된다고 자꾸 다른 포지션으로 돌릴 게 아니라, 레프트로 고정해서 리시브를 계속시키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선수"라고 평가했다.

서남원표 토털 배구가 V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단기전인 KOVO컵과 장기 레이스인 V리그는 차원이 또 다르다. 국내 선수들의 기량과 활용 폭에서 다른 팀에 비해 약세인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인삼공사의 변신을 확인한 다른 팀들도 V리그에서는 철저히 대비해서 나올 게 자명하다.

그런데도 서 감독은 토털 배구 혁신을 멈추지 않을 기세다. KOVO컵을 통해 가장 재미없는 인삼공사가 가장 기다려지는 팀이 됐다. 구단 프런트 관계자들도 흡족해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지난 시즌 남자배구 현대캐피탈은 스피드 배구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인기와 성적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올 시즌은 인삼공사가 새로운 돌풍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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