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아래 <달의 연인>)이 반환점을 돌았다. 해수(아이유, 이지은 분)를 사이에 둔 왕소(이준기 분)-왕욱(강하늘 분)의 갈등과, 황위 쟁탈전이 본격화되면서 극에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준기-강하늘을 필두로한 황자들의 열연도 돋보이고 있지만, 극 초반 불거진 여러 논란으로 6~7%대에서 주춤하고 있는 시청률은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준기·강하늘·홍종현·김산호·남주혁·백현·지수 등 정상급 한류스타부터 차세대 대표주자로 꼽히는 라이징 스타들까지 대거 캐스팅된 <달의 연인>. 꽃미남 황자들의 향연만으로도 기대작으로 평가받을 만했다. 게다가 한국 드라마로는 최초로 미국 NBC 유니버설이 제작·투자에 나선 150억 원 규모의 블록버스터급 드라마. 안 될 이유라고는 1도 없었던 <달의 연인>의 굴욕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해수의 걸음은 전혀 조심스럽지 않다

 '보보경심(步步?心)'이라는 한자어는 살얼음 위를 걷듯,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 걸음을 뜻한다. 이미 역사를 알고 있는 주인공이 역사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지만, 해수의 고려 살이는 그리 조심스럽지 않다.

'보보경심(步步?心)'이라는 한자어는 살얼음 위를 걷듯,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 걸음을 뜻한다. 이미 역사를 알고 있는 주인공이 역사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지만, 해수의 고려 살이는 그리 조심스럽지 않다. ⓒ SBS


지난 8월 <달의 연인> 시사회 직후 열린 간담회에서, 기자는 김규태 감독에게 "굳이 (중국 원작의) <보보경심> 리메이크일 필요가 있었느냐"고 물은 바 있다. 타임슬립(시간여행)이라는 장르가 <보보경심>만의 것도 아니고, 현대의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역사 속 인물과 만나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작품은 청나라와 고려,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 대대적인 각색이 불가피하다. 이에 김 감독은 <보보경심>의 뜻을 이야기하며 "현대의 가치관을 지닌 여성이 과거에 적응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수의 모습에서 조심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 '보보경심(步步惊心)'이라는 한자어는 살얼음 위를 걷듯,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 걸음을 뜻한다. 이는 황자들의 운명을 알고 있는 주인공 약희(류시시 분, <달의 연인> 속 해수)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숨죽이며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하지만 <달의 연인> 속 해수는 현대의 지식을 이용해 왕소의 얼굴 흉터를 가려주는가 하면, 왕무(김산호 분)의 아토피를 치료해준다. 황후들에게 입욕제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애교다.

왕소가 훗날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황위에 오른다는 것을 알게 된 해수는, 비극적인 결말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역사의 흐름에 개입하는 해수의 모습은 <보보경심>과 어울리지 않는다. <달의 연인>은 초반부터 여주인공 아이유의 연기력 논란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이유가 연기한 해수 캐릭터의 이런 설정 자체다.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타임슬립물 <보보경심>과 <궁쇄심옥>.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타임슬립물 <보보경심>과 <궁쇄심옥>. ⓒ 후난위성TV


중국 드라마 <궁쇄심옥>은 <보보경심>과 같은 시기인 청나라 강희제 시절로 타임슬립해 4황자와 8황자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루는 현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재도, 배경도 같지만, 다른 것은 과거로 간 주인공의 모습이다. 현대적 가치관과 지식을 가지고 과거를 마구 휘젓고 다니는 <달의 연인> 속 해수의 모습은, <보보경심>의 약희가 아니라 <궁쇄심옥>의 주인공 청천(양미 분)에 가깝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 걸음'처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지 않으려 숨 죽이고 사는 <보보경심> 약희와 <달의 연인> 해수는 전혀 닮지 않았다. 원작 파괴 소리까지 들으며 비판받을 바에야,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는 차라리 <달의 연인-궁쇄심옥 려>가 됐어야 하지 않을까? <궁쇄심옥>의 콘셉트를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활용해 재미를 만들었으면 지금과는 달랐을지 모른다.

고려가 아닌 조선이었다면 어땠을까

 꽃미남 여덟 황자들과 아이유의 로맨스를 그린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꽃미남 여덟 황자들과 아이유의 로맨스를 그린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 ⓒ SBS


타임슬립 장르의 묘미는 주인공이 미래를 알고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 미래를 바꾸려, 때로는 바꾸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대개는 타임슬립이라는 콘셉트를 선택한 대중문화 콘텐츠 스토리의 큰 줄기이다. 게다가 <보보경심>은 황자들의 죽고 죽이는 황위 쟁탈전 속에서, 그 결과를 모두 알고 있는 약희의 처세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수는 고려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해수는 자신에 고려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왕건 다음 왕이 누구더라? 광종?'하는 수준의 역사적 지식을 갖고 있다. 해수가 왕소가 훗날 광종이 돼 형제들을 모두 죽인다는 사실을 안 것도 자신의 역사적 지식 때문이 아니라, 뜬금없이 떠오른 환상을 보고 나서다.

문제는 해수가 고려 역사에 대해 줄줄 꿰고 있었다 해도 자연스럽지 않았을 거라는 데 있다. 해수가 현대에서 역사 전공자였다든지 하는 부가 설정을 넣어주지 않는 한, 평범한 대한민국 직장인 중 고려 개국 초기 왕자의 난의 전개 과정을 줄줄 알고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게다가 역사학도라 해도, 왕건의 아들들은 황위에 오른 혜종(정윤 왕무, 김산호 분)-정종(왕요, 홍종현 분)-광종(왕소, 이준기 분) 정도를 제외하고는 추존왕인 대종(왕욱, 강하늘 분), 안종(대종과는 동명이인인 왕욱, 백야, 남주혁 분)의 생몰년도 조차 명확하지 않을 만큼 관련 기록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보보경심>의 약희가 청나라 옹정제 즉위 과정에 대해 꿰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설 <보보경심>의 배경은 약 1100년 전인 고려 왕건 시절보다 무려 800년 뒤인 약 300년 전 중국 청나라 강희제 시절이다. 관련 기록은 물론,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역사 지식의 차이도 클 수 밖에 없다. 만약 약희가 청나라가 아닌, 해수가 타임슬립한 시기와 비슷한 송나라 초기로 갔다면, 약희의 역사적 지식은 다르게 설정되었을 수밖에 없다.

같은 이유로, 해수가 떨어진 곳이 고려 개국 초기가 아니라 조선 초기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특별히 역사에 관심이 큰 사람이 아니더라도,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중심으로 일어난 1·2차 왕자의 난의 기본적인 얼개는 알고 있지 않은가.

보편적 지식을 넘어서는 이야기라면 소설 '보보경심'에서 약희가 현대에서 본 옹정제 즉위 과정을 다룬 연극 내용을 떠올리듯, 해수가 <용의 눈물> <육룡이 나르샤>라도 떠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이성계에게도 강희제의 여덟 황자 못잖은 여덟 대군이 있었으니 꽃미남 황자들과의 로맨스도 무리 없었을 텐데 말이다. <달의 연인>이 택한 두 가지 패착이 아쉽기만 하다.

달의 연인 보보경심 이준기 강하늘 아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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