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의 교훈을 금새 잊은 것일까. 한화 이글스가 다시 재발한 김성근표 '엽기' 마운드 운영 속에 넥센 히어로즈에 이틀 연속 대패를 당했다.

한화는 19일 청주야구장에서 열린 2016 타이어뱅크 KBO리그 넥센과의 9차전에서 6-11로 패배했다. 특이한 점은 이날 한화의 선발 투수가 박정진이었다는 것이다. 불펜 전문요원인 박정진은 지난 2003년 9월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 이후 무려 4665일(12년 9개월) 만에 불혹의 나이로 선발 마운드에 올랐다.

외국인 투수 에스밀 로저스(팔꿈치 부상)와 알렉스 마에스트리(퇴출 유력)의 공백으로 선발 로테이션에 또다시 구멍이 뚫린 한화는 대체선발로 박정진을 낙점했다. 투수가 없다는게 이유였지만 전형적인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방식이었다.

그동안 김성근 감독이 한화 마운드에서 멀쩡히 불펜으로 기용하던 선수를 시즌 중에 갑자기 선발진에 땜빵 투입하는 경우는 여러 번 있었다. 물론 지난해 안영명이나 올해 윤규진처럼 선발 전환으로 오히려 가능성을 보여준 경우도 있지만, 문제는 애초에 선발투수 육성에 대한 충분한 계획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박정진은 선발로 뛴지 무려 십 년이 넘었고, 불펜에서도 주로 짧은 이닝만을 소화하는 노장 투수다. 더구나 최근에는 불펜에서도 구위가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1이닝 던지고 강판 당한 박정진

 19일 오후 청주시 서원구 청주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넥센과 한화의 경기. 한화 선발 박정진이 역투하고 있다.

19일 오후 청주시 서원구 청주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넥센과 한화의 경기. 한화 선발 박정진이 역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우려한대로 박정진은 퀵후크를 피하지 못했다. 1이닝간 23개의 공을 뿌리며 2피안타 1사사구 2실점을 허용하며 2회초 무사 1,2루에서 교체됐다. 패전투수가 된 박정진의 시즌 평균 자책점은 7.16(3승 3패)까지 치솟았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질 때 지더라도 젊은 투수들에게 기회를 줬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김성근 감독 특유의 엽기적인 마운드 운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박정진이 내려가고 마운드에 올라온 한화의 두 번째 투수는 황당하게도 장민재였다. 지난 17일 넥센전에서 4.1이닝 3실점(2자책)으로 구원승을 따낸 경기에서 무려 84구를 던졌던 장민재는 불과 하루를 쉬고 다시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

결과는 박정진의 퀵후크보다 더 심각한 재앙이었다. 장민재는 나오자마자 김민성에게 우중간 안타를 맞으며 무사 만루를 허용했고 이후로 한화에는 '지옥문'이 열렸다. 장민재는 1이닝간 42개의 공을 던지며 4피안타 2사사구로 7실점을 허용했다. 박정진의 승계주자를 모두 홈으로 불러들이고도 자책점만 5점을 더 헌납했다.

설상가상 잇단 수비실책까지 겹쳤다. 이택근의 유격수 땅볼 때 한화 유격수 강경학이 악송구를 저지르며 두 명의 주자가 한꺼번에 홈을 밟았고, 김하성의 내야안타 때 또 송구실책으로 1점을 더 내줬다.

넥센은 2회에만 상대실책 2개와 3개의 볼넷, 5개의 안타를 쏟아내며 타자일순, 총 7득점을 뽑아내며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다. 뒤이어 투입된 심수창 역시 2이닝간 3실점을 내주며 팀 타선의 추격의지를 지탱해 주지 못했다.

한화 마운드는 넥센에 이틀간 22점을 내줬다. 최근 물오른 집중력과 뒷심을 발휘하던 한화 타선도 잇단 대량실점을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감독의 대책없는 무리수와 즉흥적인 마운드 운영이 어떤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장면이다.

한화는 이로써 지난주 KT와 넥센을 상대로 2연속 루징시리즈를 기록하며 주간 성적 1승 4패에 그쳐 최근의 상승세가 한풀 꺾이게 됐다. 5월 말부터 무려 5연속 위닝시리즈를 달성하며 내심 탈꼴찌가 눈앞에 다가온 듯 했던 한화는 단독 최하위로 떨어졌다. 그나마 꼴찌 경쟁팀인 기아(1.5게임 차)와 kt(1게임 차)도 나란히 주춤하고 있어서 여전히 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다.

한화 상승세 이끌었던 '정상 야구'

 31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화와 SK의 경기. 김성근 한화 감독이 SK가 3대 2로 역전한 5회초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 5월 31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화와 SK의 경기. 김성근 한화 감독이 SK가 3대 2로 역전한 5회초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한화가 시즌 초반의 극심한 부진과 달리 최근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었던 비결은 그나마 '정상적인 야구'를 했기 때문이다. 선발들이 안정적으로 로테이션을 지키고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초반에 비하면 퀵후크와 그에 따른 불펜 과부하가 많이 줄었다.

타선에서는 정근우-이용규의 투혼과 김태균과 로사리오의 부활. 하주석-양성우의 성장으로 상하위타선의 짜임새가 갖춰지며 어느 팀을 만나도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화력을 보여줬다. 여기에 상위 2강 두산-NC를 제외한 중하위권의 혼전 양상으로 경쟁팀들이 일제히 동반 하락세를 보이면서 한화의 6월 반등이 더 부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한화는 선수구성상 '지금보다 훨씬 더 잘했어야 정상'인 팀이다.  결과적으로 한화는 기회는 잡았지만 아직까지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5할승률만 넘겨도 리그 3~4위권이 보장되는 '하향평준화'된 올해 프로야구 판도에서 총연봉 1위팀 한화에게는 부끄러운 성적이다.

더구나 최근의 상승세에 가려졌지만 한화의 전력은 아직 안정궤도에 접어든 것이 아니다. 불펜투수들의 피로누적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시기가 더 빨라졌다. 타선도 지금의 기세가 꾸준히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에이스 로저스가 올 시즌 벌써 두 번째로 팔꿈치에 문제를 드러냈고, 시작부터 불안했던 마에스트리 영입은 결국 시간과 비용만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송은범을 제외하면 한화의 토종 선발진 대부분이 시즌 중 보직을 변경한 대체선발들이고 꾸준한 이닝이터는 여전히 전무하다. 자칫하다간 언제든 시즌 초반처럼 로테이션 붕괴와 퀵후크가 남발하는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한화는 지난해도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며 과부하에 시달린 마운드가 지탱하지 못하면서 급격하게 무너진 바 있다. 최근 일시적인 상승세에 도취되어 또다시 계획성 없는 무리한 마운드 운영을 고집하거나 투수관리를 등한시한다면 언제든 부메랑을 맞을 수 있다.  어쩌면 한화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내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상가상 한화는 21일부터 15연승의 파죽지세를 달리고 있는 NC와 3연전을 치른다. 선발진 운용이 마땅치않은 한화로서는 더욱 부담스러운 상대다. 다만 다음주부터 장마철에 접어들며 우천취소가 속출할 수 있다는 게 변수다. 가뜩이나 기세가 한풀 꺾이고 투수들의 휴식이 필요한 한화 입장에서는 차라리 비가 내려주는 게 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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