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4>의 신입생들은 시행착오 없는 사랑을 한다. 하지만 그 무렵 현실의 사랑은 적어도 그보다는 구차하고 잔인하다.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 tvN


현실을 도피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아름다웠던 과거에 갇혀 지내거나 혹은 공상에 빠져들거나. 무엇이 됐든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큼은 동일하다. 삶이 팍팍할수록, 현실이 답답할수록, '복고'와 '판타지' 장르가 인기를 끄는 것도 결국은 이런 '현실 도피' 심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20,30대 젊은이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은 tvN <응답하라 1994>가 '복고' 콘텐츠의 대표작이라 한다면, 올해 들어 가장 '핫'한 드라마로 자리 잡은 SBS <별에서 온 그대>는 바로 '판타지' 장르의 교과서라 할만하다. 언뜻 보면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두 드라마가 연이어 젊은 세대의 '응답'을 받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 답답한 현실로부터 말이다. 

추억은 왜 아름답게만 그려지는가?

<응답하라 1994> 이전에도 1990년대를 소환한 드라마와 영화는 많았다. 가깝게는 이 드라마의 전작인 <응답하라 1997>이 있었고, 본격적으로 복고 열풍을 주도한 영화 <건축학개론>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방영중인 MBC <미스코리아> 역시 1998년 IMF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대부분의 문화콘텐츠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고, '팬'이었으며, 또 세상은 '따뜻했다'는 점이다.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의 저자 문강형준 씨의 표현에 따르면, 대중문화가 소환하는 1990년대는 대개 '부드러운 복고'로 요약된다. 예컨대, 매웠던 거리 대신 시끌벅적했던 하숙집이 주요 배경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첫사랑'의 서사가 주로 차용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추억은 아름다워야 하니까. 이는 '무드셀라 증후군'에 가깝다. 무드셀라 증후군이란,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추억만 간직하려는 심리로, 일종의 현실도피라고 볼 수 있다.

일부 시청자는 '응답하라' 시리즈가 지나치게 '남편 찾기'를 부각시켰다고 비판했지만, 사실은 '추억을 아름답게 그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응답하라'를 통해 시청자는 1990년대의 낭만을 회상했고, 자유로움을 만끽했으며, 서툰 첫사랑의 설렘을 기억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딱 그만큼 현실에서 벌어지는 몰상식과 억압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었고 말이다. '추억은 또 다른 판타지'란 말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복고'와 '공상' 사이에 '지금'은 없다

 '별에서온그대' 전지현 김수현

'별에서온그대' 전지현 김수현 ⓒ sbs


20,30대 젊은이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5%가 '내 인생의 장르는?'이란 질문에 "판타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22%를 차지한 '로맨틱'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세대라 하여 '삼포세대'라 불리는 이들에게 있어 어쩌면 가장 적합한 인생의 장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판타지'라는 영역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되며, 불확실한 미래도 확실한 장밋빛으로 치환 할 수 있다. 인생의 장르가 판타지였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젊은 세대가 <별에서 온 그대>에 열광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이미 20%대 중반을 넘어섰고, "어제 별그대 봤냐"란 물음이 안부 인사를 대신할 정도로 체감 인기 또한 뜨겁다.

흥행 요인이야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만약 이 드라마가 시청자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면 그것은 아마도 도민준(김수현 분)이라는 캐릭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400년이란 긴 시간동안 한 여자만을 가슴에 품고, 때때로 초능력을 발휘하여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며, 재벌 부럽지 않은 재력을 갖춘 남자. 여자라면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상대, 그리고 남자라면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삶이다. 판타지는 이렇게 오늘도 벅찬 현실을 잠시 잊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추억'과 '판타지'의 약효는 TV가 켜져 있는 딱 순간 까지다. '복고'와 '공상' 사이에 우리가 발 디딜 곳은 없다. 현실 속 우리는 '누군가의 첫 사랑'이 아닌 '누군가의 피고용인'일 가능성이 더 높고, 400년은 커녕 (다음 대선까지)남은 4년을 살아내기에도 버거운게 사실이다.

삶이 힘들수록 드라마는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말이 요즘 들어 더욱 와 닿는다. 아마도 향후 몇 년간 드라마와 영화는 '추억'과 '공상'이라는 판타지를 자양분삼아 계속해서 '아름다워' 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별에서 온 그대>.

<별에서 온 그대>. ⓒ SB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저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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