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6년>의 한 장면.

영화 <26년>의 한 장면. ⓒ 청어람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끈질기게 추적했는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에 관한 연구'를 통해 그 결과를 내놓는다. 아렌트는 당혹과 어이없음 그리고 분노가 교차했다. 그러면서 2차 세계대전 중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한 장본인인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을 털어놓았다. 그는 명령에 복종하고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아렌트는 그가 말하기의 무능함, 사유의 무능함,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함이 있었으며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가는 기차에 태워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랐을까.

영화 '본 레거시'(The Bourne Legacy)에서 마르타 셰어링 박사(레이첼 와이즈)는 살인병기를 만들어내는 아웃컴 프로그램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말한다. 단지 자신은 과학자로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을 뿐이고 그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어떤 영향을 낳는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이러한 면은 과학자의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행동이 왜 발생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과학은 객관주의에 빠지기 쉽고 과학자도 자신의 연구가 어떻게 활용이 되는지 무관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구가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르타 셰어링 박사에게는 일이 필요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무감각해지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문에 가담한 한 형사는 이 짓도 못해먹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김종태는 다른 일을 찾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형사는 너 같은 고학력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은 어디 갈 데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폭행을 가한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든 그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조직에 순응하여야 생존을 모색할 수 있다고 여겼다.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과 조교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이 한 권위에 대한 복종은 사람들이 왜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다. 1971년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으로 확장된 이 실험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명분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잔혹한 행동을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통제감을 발휘하는 한 에서 유지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위치와 주어진 힘이었다.
 영화 <남영동 1985> 포스터의 일부

영화 <남영동 1985> 포스터의 일부 ⓒ 아우라 픽쳐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Max Weber)는 관료제 비판을 통해 사람 자체보다는 제도의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사람의 악성보다는 제도 예컨대 관료제와 같은 제도 때문에 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일의 나치즘이 저지른 악은 관료제의 폐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갈파했다. 관료제가 인간적인 면모보다 효율성을 추구하는데 적합하다. 유태인이 죽건 아니건 실적을 올리거나 달성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계라고 본 이유이다.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이 되는 현상은 관료제에서 충분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내적 동인이 하나 빠져있다. 관료제 안의 사람들은 안정적인 월급에서 나아가 승진과 지위를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서는 업적 달성이 필요하다. 영화 '남영동 1985'의 고문 형사들과 서장이 조작을 일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 '26년'은 '그 사람'에 대한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들의 사적인 복수를 담고 있다. 사적은 사적(私的)과 사적(史的)이라는 중의를 가지고 있다. 다만, 영화의 문제의식은 한 개인의 발포명령으로 이루어졌다는 전제내지 적어도 책임을 한 사람이 져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 사람'(장광 분)이 유지되는 것은 관료제와 같은 제도 혹은 시스템에 그 안에 들어찬 개인들의 동기들이다. '그 사람'은 경호실장 같은 인물 때문에 계속 존속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사람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복수가 전적인 대안이거나 해결될 수 없는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급진적으로 모든 변수를 거세하는 영화도 논란을 일으켰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에는 성폭행을 당한 여고생의 어머니가 미성년 가해자들을 칼로 한 명씩 복수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미성년 가해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나 사회적 상황 등은 배제된다. 오로지 개인의 개인들에게 대한 복수만이 존재한다. 미성년가해자들에 대한 제도적 방책을 모색하는 것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절대 악의 존재에 더 초점을 맞추고 모성성의 극한을 개인의 차원에서 적용시키고 있다.

 <돈 크라이 마미> 유선과 남보라.

<돈 크라이 마미> 유선과 남보라. ⓒ 데이지 엔터


이러한 측면은 정치나 정책의 영역에서 빈번하게 노출되는 '대중적 정서'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만 몰아붙이거나 그 반대인 특정 사람을 부각시키면서 공격이나 복수를 하려 한다. 그 목적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다. 정치적 세력들은 어느 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고 자신들은 숨거나 아니면 반사적인 이익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은 대선과 같은 선거 전에서는 매번 애용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내세우고 뒤에서 자신의 이득을 챙긴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면서 실익을 누린다. 선택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개인 차원이 아니라 그 개인이 딛고 있는 기반이자 세력 그리고 제도적인 토대이다. 개인의 인품이나 능력, 생각도 중요하지만 그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혹은 처한 환경, 그리고 그에 따른 동기의 융합이 중요할 것이다. 그것을 보지 않으면 한 개인에 대한 극렬한 지지와 혐오가 교차하면서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국민과 시민의 삶에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진정 책임을 져야할 사람을 다 놓치고 말이다.

사적 복수 아렌트 남영동 미성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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