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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족이 있다.

한 가족의 엄마는 창녀이자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다. 아들(이상우)은 포주이면서 에이즈 보균자다. 아들은 엄마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싼 값(9900원)으로 화대를 챙긴다. 겉보기엔 후레자식이지만 아들을 욕하기 힘들다. 아들은 장애인 엄마의 대소변을 받아가며, 돈이 생기면 엄마가 좋아하는 선물을 고르고 뿌듯해 하는 마음 따뜻한 '효자'다.

다른 가족은 재혼 가정이다.

성실히 음식점을 운영하는 아빠는 의붓자식들과의 거리감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가정에 충실하다. 표면상 이 가정은 평범하다. 하지만 사실 아빠는 성도착증 환자다. 가족이 자리를 비우면, '은둔형 인간'인 의붓아들을 성폭행하기 위해 아빠는 기회를 엿본다. 이 두 가족의 연결고리는 창녀 엄마와 성도착증 아빠가 과거 부부였다는 데 있다.

지난 2009년 3월 31일 선보인 이상우 감독의 <엄마는 창녀다>는 이렇게 두 가족을 다루면서 전개된다.

아빠의 친아들 상우, 의붓딸 희수에게는 희망이 있다. 아들 상우에게는 창녀인 엄마가 그것이고, 의붓딸 희수에게는 '은둔형 인간'인 친동생이 바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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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상우는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가지만 그 시선은 '엄마'에게 쏠려있다. 예를들어 장애가 있어 똥을 참지 못하는 엄마는 자주 팬티에 똥을 눈다. 그런 엄마에게 상우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엄마땜에 돌아버리겠어. 제발 똥 좀 싸지마."

엄마가 답한다.

"어릴 땐 니 똥기저귀 내가 다 갈았어!"

그런 엄마에게 상우는 픽 웃으며 이렇게 대꾸한다.

"그래서? 지금 복수하는 거야?"

둘이 앉아서 소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도 모자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늘 삼겹살을 먹던 둘은 오랜만에 먹는 소고기가 너무 맛있다. 서로 고기를 먹여주는 모양이 다정한 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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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 역시 의붓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고, 친모와 사이가 좋지 않아도 동생에게만큼은 지극정성이다. 은둔형 인간인 동생의 끼니를 걱정하고, 맛있는 것을 사주기 위해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에게 찾아가 손을 벌린다. 외출을 할때도 방 안에 남겨진 동생을 늘 걱정하는 희수다.

하지만 이 희망은 철저히 무너진다. 상우는 아빠에게 버림받아 희망(엄마)을 팔며 돈을 버는 처지가 돼 버렸다. 영화 마지막에 상우는 그 희망마저도 잃어버린다. 상우의 엄마가 장애를 이유로 종교단체에 의해 강제로 납치당하기 때문이다. 이후 상우는 자신의 희망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 노력한다. 그러다 결국 상우는 아빠를 찾는다. 울면서 그는 "우리 엄마 좀 찾아줘"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빠에게 돌아온 한 마디는 "내게 너 같은 자식이 있었던가"였다. 희수는 은둔형 인간 동생(밖으로 내보일 수 없는 희망)이 가족 몰래 아빠에게 성폭행 당하고 끝내 자살함으로써 그것을 잃어버린다.

이제 희망을 팔았던 상우와, 가둬둔 희망을 간진했던 희수가 이것을 잃어버렸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합리적 대응방식? 아니다.

영화에서 엄마찾기를 거부당한 상우는 아빠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자신의 피를 주사기에 담아 자신의 아빠를 찔러버린다. 희망을 잃은 상우의 복수, 이것이 이들이 취한 방식이다.

희수는 자신의 동생이 '왜' 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영화도 동생 죽음에 대한 희수의 반응을 담아내지 않는다. 다만, 이유도 모른채 희망이 사라진 희수가 큰 절망(심지어 자살까지도)을 했을 거란 추측만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뚤어진 욕망을 가진 사회, 희망을 잃었다

파격적인 소재로 거부감마저 일으키는 이 영화는 사실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을 잘 담아냈다. 영화를 통해 상상의 외연을 좀 더 넓혀보면 상우와 희수가 가진 희망과 그들의 아버지가 가져다 준 절망은 우리의 젊은층과 사회의 단면을 나타내 준다. 88만원세대, 삼포세대 등의 우울한 신조어가 나도는 이 사회에서 상우와 희수로 빗댈수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갖는 희망은 무엇일까.

또한 학벌, 취업, 돈 등이 화학적 결합을 통해 만들어낸 '무한경쟁'이라는 삐뚤어진 욕망을 통해 우리는 상우 아빠의 무책임함과 폭력성과 같은 것을 이 사회에서 엿볼 수 있다. 삐뚤어진 욕망을 품은 사회는 구성원들을 '내게 너 같은 자식이 있었던가'라고 무시하고, 의붓아들에게 성폭행을 가한 것과 같이 희생양을 양산한다. 희망은 상우엄마, 희수동생과 같이 사라지거나 죽고, 상우와 희수 같은 사회구성원들은 절망에 몸부림친다.

결국 사회구성원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합리적 방식? 아니다. 우리는 영화의 장면에 비춰지지 않았지만, 희수가 자살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현실세계에서 명확하게 체득하고 있다. OECD 자살률 1위라는 랭킹으로.

또 상우처럼 주사기에 자신의 피를 넣어 사회에 찔러버리는 행동 역시 잘 알고 있다. 사회불만이 원인이 돼 나타나는 폭력현장에 관한 소식으로.

자살소식을 접하며, 불만 가득한 사회를 폭력으로 풀어버린 현장의 소식을 들으며 뭇 사람들은 '개인'을 지나치게 탓한다. "자살할 용기가 있었으면 더 살지" 혹은 "저런 놈은 사형시켜야해"라고 말이다.

감독은 이 영화와 관련해 "약해빠진 생명체인 인간이 동정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꾸밈없이 그려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희망'을 잃은 이들 혹은 우리들에게 사회가 또는 서로가 조그마한 '동정'(compassion)을 가져보는 것에 대한 바람, 이것이 <엄마는 창녀다>를 통해 감독이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 아닐까?

엄마는창녀다 자살 성폭행 이상우 에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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