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결말이나 결정적인 결과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편집자말]
인도 뭄바이, 2006.
'자말'이 2천만 루피 상금까지 오른 비결은?

A: 부정행위를 했다.
B: 운이 좋았다.
C: 천재이다.
D: 운명이었다.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관객에게 한 문제가 주어진다. 이 문제의 답은 영화를 끝까지 본 후에 맞힐 수 있다. 감독의 의도대로 부지런히 스토리를 따라간 후, 여운에 젖어있는데 까만 화면 위에 정답이 새겨진다.

영화 자체가 한 가지 퀴즈가 되어 우리에게 의문을 제시하는 이 영화의 형식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이 '퀴즈(즉, 영화)' 안에 주어진 또 다른 퀴즈들을 보며 우리는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며 정답을 맞혀나간다. 답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바로 감독이 우리에게 제시한 문제를 맞히는 수단이 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라는 영화 자체가 '퀴즈'를 상징하는 기표가 되는 것이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한 장면. 퀴즈를 풀고 있는 주인공 '자말'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한 장면. 퀴즈를 풀고 있는 주인공 '자말' ⓒ 김미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비카스 스와루프(Vikas Swarup)의 소설 'Q&A'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퀴즈쇼에 참가한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빈민가 출신의 슬럼독, '자말'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최종 라운드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쇼가 끝난 밤, '어떻게 길거리 소년이 이처럼 많이 알고 있을 수 있나'라는 의문을 가진 경찰은 그를 사기 혐의로 체포한다.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말은 빈민가에서 살아온 자기 형제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바꾸어 극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본래 주인공의 이름은 '람 모하마드 토머스'로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이름이 모두 합쳐진 이름이다. 인도 종교의 다양성과 그에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종교간 갈등을 암시하는 이름이 영화에선 '자말 말리끄'로 바뀌었다. 소설 속에선 친구였던 '살림'을 자말의 친형으로 바꾸었고, 주변 인물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주인공에게 집중시켰다.

퀴즈쇼에 등장하는 질문들의 경우,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온 문제는 '회전식 연발 권총 리볼버는 누가 발명했는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중에서 성격과 직업까지, 여성 캐릭터가 완전히 다르다. 창녀인 '니타'는 영화에서 '라띠까'로 바뀌었다. 이러한 각색을 통해 영화는 성장소설인 원작을 멜로로 바꾸어냈다.

자말에게 제시되는 퀴즈 문제는 퍼즐 조각처럼 차례차례 이어지며 자말의 인생조각이 되어 그의 일생을 완성한다. 퀴즈가 자말 자체가 되는 것이다. 퀴즈는 순차적으로 자말의 인생을 설명해 줌과 동시에, 자말과 라띠까를 이어주는 메타포로서의 역할까지 함께한다. 다른 퀴즈 출연자들과 달리 자말은 오직 라띠까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퀴즈를 맞추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제를 맞추기 위해 전화찬스를 쓰고, 살림의 핸드폰을 가진 라띠까와 통화한뒤 자말의 얼굴은 밝기만 하다. 퀴즈의 답을 모른다는 라띠까의 말에도 라띠까가 안전하게 살아있다는 그 말 한마디에 자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자말이 퀴즈쇼에 도전해서 얻은 것은 단순히 돈(물질적 행복의 기표)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 라띠까(정신적 행복의 기표)인 것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

'슬럼독(slumdog)+밀리어네어(millionaire).' 슬럼독이란 단어는 일차적으로 주인공 자말을 뜻한다. 그러나 슬럼독이란 용어는 단순히 주인공 자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형 살림과 자말의 연인인 라띠까와 역시 슬럼가 출신이자 퀴즈쇼의 진행자로 백만 장자가 된 프렘 쿠마르, 더 나아가서는 인도의 빈민층과 인도의 모습을 나타나는 기표로서 나타난다. 사실 인도라는 나라 자체가 바로 부와 빈의 극단적인 상태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한 화면에 '슬럼가와 고층건물'을 대비시킨다. 마찬가지로 '타지마할과 그 옆의 난잡한 빨래터'를 동시에 보여주며 '당신이 보고 있는 인도'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묻는다). '슬럼독과 백만장자' 역시 마찬가지의 조합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공간적 배경은 주인공 자말의 삶의 터전, '슬럼가'이다. 슬럼독들이 살아가는 슬럼가의 의미를 보통, 그곳에 사는 것 자체가 수치이자 당황스러움을 주는 극빈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때문에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제목은 가장 극과 극의 의미를 가진 기표들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슬럼가는 정지된 곳이 아니며 부정적 의미 또한 아니다. 빈곤도 죽음도 뜻하지 않는다. 실은 번영하고 무산한 작은 대도시이며 어느 공동체에서나 벌어지는 일, 즉 서로를 속이고 또 돕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으로 위험한 장소가 아니다. 인도의 일부분으로서 변화를 겪는 공간이다. 감독은 이러한 슬럼가에 대한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기 위해 '슬럼독'과 '밀리어네어'라는 매치가 불가능해 보이는 단어의 조합으로 제목을 정한다.

운명론적 인생관

영화에서는 '운명'이란 단어가 자주 거론되어진다. 자말의 형인 살림은 '신은 위대하다'라고 자주 말한다. 자말의 친구 아르빈도는 자말에게 자신이 장님이 된 이유에 대해 "넌 운이 좋았고, 난 운이 없었어. 그 차이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라띠까를 찾은 후에 자말은 "언젠가 널 찾을 줄 알았어. 우린 운명이니까."라고 말하고, 일자무식인 주제에 모든 퀴즈를 맞출 수 있는 비결을 묻는 퀴즈쇼 진행자 프렘에게 "운명이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 또한 '그것은 운명이었다(It's written)'로 이 역시 감독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구이다.

이처럼 인도 사회에서는 운명이란 단어 하나로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불행, 행운 등의 모든 일들을 설명할 수 있다. 윤회론적 사고방식이 깊숙이 박혀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실 '운명'이란 관점으로 사건을 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자칫하면 '사람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정해져 있는 길이 있으니 노력해도 소용없다'라는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설과 영화에서는 이러한 운명론적 관점에서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 자말은 고난과 역경 그 자체의 삶을 살며 지속적인 시련들을 버텼다. 중간에 지쳐 포기하지 않고 온몸을 부딪치며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 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행운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자말의 사상, 그리고 소설과 영화의 주장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부적처럼 들고 다니던 1루피짜리 행운의 동전을 버리며 "행복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라고 말한다. 포기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그의 성공의 열쇠이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기적 아닌 기적을 손안에 움켜쥔 그의 원동력은 바로 '행운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신념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이 라띠까를 구원하며 또 자신도 구원받는다. 살림과 프렘 같은 부정적 현자에 의한 구원과 달리, 긍정적 현자인 라띠까와 자기 자신의 신념이 그 두 사람, 더 나아가서는 인도의 모든 슬럼독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퀴즈쇼의 진정한 의미

퀴즈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Who want to be a millionaire)?'는 보통의 인도인들에게 현실을 벗어날 돌파구로 여겨지는 기표이다. 라띠까와 자말의 대화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말이 "왜 다들 이 퀴즈쇼에 목을 매지?"라고 묻자 라띠까는 "현실을 벗어날 돌파구니까, 안 그래? 인생을 바꿀 기회"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자말에게 퀴즈쇼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줄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 자말에게 퀴즈쇼란 단지 라띠까를 찾을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돈이 아닌, 자신의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퀴즈쇼에 나가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1천9백만 명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단 한 사람을 찾으려는 자말의 방법이다. 한 문제라도 틀리면 상금을 거액의 상금을 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말은 심지어 퀴즈의 답을 알지 못할 때도 문제에 도전한다. 퀴즈쇼에 오래 남을수록 그녀를 찾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말의 심리는 마지막 문제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답을 알지 못해 살림의 핸드폰에 전화를 건 자말은 라띠까가 그 전화를 받자 그녀가 무사히 살아있음에 안도하고 미소를 짓는다. 라띠까가 퀴즈의 답을 모른다고 대답해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이는 자말이 퀴즈를 맞혀 획득할 수 있는 거액의 상금보다는 자신의 일생을 바쳐 사랑한 라띠까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에 가치를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제3자가 보는 인도('타지마할'과 '도비가트'의 차이)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인도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감독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특히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인도의 '타지마할'이 소개되면서 더욱 분명해 진다.

자말과 살림은 기차에서 생활하다가 운행 중이던 기차에서 사고로 떨어진다. 그들이 그렇게 우연히 도착한 장소는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명소, 타지마할이다. 그러나 타지마할과 마주한 자말은 형에게 '여기가 천국이야?'라고 묻는다. 인도의 가장 유명한 장소이지만 정작 인도인은 모르는 곳이 바로 타지마할인 것이다. 외국인들 죽, 인도를 바라보는 제3자들은 인도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타지마할을 떠올리고 이국적인 모습을 상상한다. 그안에 숨겨진 오리엔탈적인 판타지와 동양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이 보는 타지마할(인도)는 진짜 인도가 아니다. 보여 지기 위해 꾸며지고 치장된 타지마할에서 인도인의 가난한 삶과 열악한 환경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타지마할과 대비되는 장소로 앞서 언급한 '슬럼가'과 빨래터 '도비가트'를 들 수 있다. 타지마할 바로 옆에 위치한 인도에서 가장 큰 빨래터 도비가트는 타지마할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넓은 평지 위에 끝없이 널려있는 옷들 사이로 수많은 인도의 사람들이 비춰진다. '진짜'인도의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다. 인도의 수많은 서민들이 모여앉아 빨래하며 웃고 떠드는 그곳은 슬럼가처럼 인도인의 진짜 삶의 터전이다.

모든 퀴즈의 정답 뒤에는...

인도 외무부의 외교관인 원작 소설의 작가는 이 글을 두 달 만에 집필했다고 한다. 제법 두꺼운 감이 있는 소설임에도 술술 읽힌다. 박진감 넘치는 인도 슬럼가의 분위기속에서 퀴즈 하나에 한 챕터씩 열두 문제가 제시 된다. 그 퀴즈에 얽힌 주인공 소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은 숨 가쁘지만 심장을 뛰게 한다. 정해진 운명을 사는 듯 보이는 소년이 보란 듯이 모든 퀴즈를 맞히는 순간에 소설은 마무리된다. 주어진 순간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지지 않고 이 악물고 견뎌보라고, 그 고통의 순간이 달콤한 열매의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소설과 영화는 말한다.

이 모든 일이 운명일지 모른다. 인생에서 언젠가 다가올 것으로, 그렇게 되어있는 것은 언제든지 오기 마련이다. 지금 오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운명이다. 퀴즈의 정답처럼 말이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마지막 장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마지막 장면. ⓒ 김미지


정답.
D: 운명이었다(It's written)

슬럼독 밀리어네어 Q&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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