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왕기춘이 한판 패 당한 뒤 울먹이며 경기장을 나서고 있다.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왕기춘이 한판 패 당한 뒤 울먹이며 경기장을 나서고 있다. ⓒ 남소연

패배는 누구에게나 아픈 경험이다. 4년마다 돌아오는 올림픽에서 우승을 코앞에 두고 패한 '넘버2'의 아쉬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동안 들인 노력과 흘린 땀을 생각하면 패자의 눈물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자에게는 축하를, 패자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왕기춘 선수는 11일 베이징과학기술대 체육관에서 열린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13초 만에 엘누르 맘마들리(아제르바이잔) 선수에게 패했다. 왕 선수의 패배가 확정된 순간, 아제르바이잔 응원단에서는 큰 함성이 터졌다.

은메달 따고도 우는 20살 왕기춘

수백 명의 응원단은 "아제르바이잔!", "맘마들리!"를 연호했다. 일부는 국기를 몸에 두르고 춤을 췄다. 맘마들리 선수가 따낸 금메달은 아제르바이잔 올림픽 참가 사상 첫 금메달이다.

반면 왕 선수는 한동안 매트 위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패배의 상황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안병근 감독의 위로를 받으며 경기장을 퇴장할 때는 눈물도 흘렸다. 눈물은 은메달 시상대에 올라서도 멈추지 않았다.

경기장을 찾은 한국 응원단도 왕 선수와 함께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뚝 끊겼다. 일부 응원단은 시상식을 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박정윤(54)씨는 "가슴 아파서 지켜볼 수가 없다"며 경기장을 나갔다. 물론 훨씬 많은 응원단은 끝까지 현장에 남아 시상식을 지켜봤다.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패한 왕기춘이 아제르바이젠 엘누르 맘마들리와 은메달, 금메달을 각각 목에 걸고 시상대를 내려오고 있다.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패한 왕기춘이 아제르바이젠 엘누르 맘마들리와 은메달, 금메달을 각각 목에 걸고 시상대를 내려오고 있다. ⓒ 남소연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왕기춘이 한판 패 당한 뒤 울먹이며 경기장을 나서자 개그우먼 이영자가 "왕기춘 잘했어!" "왕기춘 괜찮아!"를 연신 외치며 격려하고 있다.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유도 73kg급 결승전에서 왕기춘이 한판 패 당한 뒤 울먹이며 경기장을 나서자 개그우먼 이영자가 "왕기춘 잘했어!" "왕기춘 괜찮아!"를 연신 외치며 격려하고 있다. ⓒ 남소연


이날 경기장에는 한국 응원단이 많지  않았다. 경기가 열리는 동안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함성이 터졌지만, 수천 명이 베이징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친황다오까지 가는 축구 응원단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였다.

이런 왕 선수와 응원단의 모습은, 이날 여자 유도 57kg급 결승전에서 패한 네덜란드 데보라 그라벤스타인 선수와 대조적이었다. 데보라 선수는 왕기춘 선수의 결승전에 앞서 열린 경기에서 이탈리아 선수에게 패해 은메달에 머물렀다. 하지만 데보라 선수는 패한 뒤 오렌지색 옷을 맞춰 입은 네덜란드 응원단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들었다.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 응원단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은메달에 환한 웃음 보인 34살 데보라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여자유도 57kg급 결승전에서 은메달을 딴 네덜란드 선수 데보라 그라벤스타인이 자국 응원단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11일 베이징 과학기술대체육관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여자유도 57kg급 결승전에서 은메달을 딴 네덜란드 선수 데보라 그라벤스타인이 자국 응원단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 남소연

'넘버1'이 되지 못한 데보라 선수는 시상식에서도 계속 응원단을 향해 세리모니를 펼쳤다. 은메달을 입에 맞추는가 하면, 메달리스트 행진대열에서 벗어나 함성을 지르며 관중석 쪽으로 달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자신이 따낸 메달을 가리켰다. 마치 금메달을 딴 듯했다. 

데보라 선수의 경력을 보면 이날 결승전 패배는 여러모로 아쉬울 법하다. 그녀는 올해 34살이다.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52kg급에서 5위를 차지했다.

세 번의 올림픽 출전에서 단 한 번도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이다. 물론 데보라 선수가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해 다시 금메달에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나이는 운동선수로서는 환갑에 해당하는 38살이다.

이에 반해 왕기춘 선수는 88년생으로 이제 만으로 19살이다. 4년 뒤 런던올림픽에 출전해도 그의 나이는 20대 초반이다. 그만큼 기회는 많고, 대선수로 성장할 시간도 충분하다. 그래서 경기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잘했다, 왕기춘! 고개를 들어라!"라고 위로했다. 안병근 감독 역시 "이번 은메달은 런던 올림픽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9일 남자 유도 60kg급에서 금메달을 딴 최민호 선수는 눈물을 흘렸다. 물론 기쁨의 눈물이다. 정작 당시 경기에서 환하게 웃은 주인공은 최 선수에게 패한 오스트리아 선수 루드비히 파이셔였다. 파이셔 선수는 자신이 패한 매트 위에서 웃는 얼굴로 최 선수의 손을 높이 들어줬다. 이후 파이셔 선수는 국내에서 '훈남'으로 유명해졌다.

 9일 2008 베이징 올림픽 유도 남자 60kg급 결승에서 승리한 최민호 선수가 오스트리아의 루드비히 파이셔 선수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9일 2008 베이징 올림픽 유도 남자 60kg급 결승에서 승리한 최민호 선수가 오스트리아의 루드비히 파이셔 선수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MBC 화면 갈무리


11일 경기장을 나서며 이런 상상을 해봤다. 만약 '넘버2' 왕기춘 선수가 눈물을 흘리는 대신, 속은 쓰리더라도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메친 '넘버1' 맘마들리의 손을 번쩍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데보라 선수처럼 그도 함성을 지르며 은메달 세리머니를 펼쳤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왕 선수는 국내는 물론이고 아제르바이젠에게 더 많은 격려의 박수를 받으며 '훈남 선수'로 기억되었을 지도 모른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파이셔', 자신을 꺾은 상대방의 손을 웃으며 번쩍 들어줄 '훈남 훈녀 선수'의 등장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SK텔레콤 T로밍이 공동 후원하는 '2008 베이징올림픽 특별취재팀' 기사입니다.
베이징 올림픽 왕기춘 데보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