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충남 천안시 천안북일고 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복싱 PABA 잠정타이틀 및 한국타이틀 매치에서는 색다른 경기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캐나다 출신의 에이미 미첼 비리조스키(28·천안업체육관)가 한국 여자복싱사상 처음으로 공식 경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에이미 선수와 마찬가지로 데뷔전 상대로 맞붙은 박미란(34·에이스체육관) 선수이다.

 캐나다 국적의 에이미 바리조스키 선수 (28.천안업체육관)

캐나다 국적의 에이미 바리조스키 선수 (28.천안업체육관) ⓒ 이충섭


캐나다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2004년부터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고 현재는 단국대 천안캠퍼스에서 영어강사로 재직중인 에이미 선수는 지난 8월부터 집 근처 체육관을 찾아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고, 두 달만인 10월 프로테스트에 당당히 합격했다.

 홍코너의 박미란 선수(34.에이스복싱)과 박광열 관장

홍코너의 박미란 선수(34.에이스복싱)과 박광열 관장 ⓒ 이충섭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박미란 선수는 2006년 1월부터 다이어트를 위해 체육관을 찾았다가 복싱의 매력에 빠져 2006년 11월에 프로테스트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재수를 하여 12월에 합격했으니 복싱 경력에선 에이미보다 선배다. 운동을 위해 13년간 근무하던 여행사를 지난 작년 4월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런 두 선수의 경력을 시합 전에 미리 관중들에게 홍보 유인물로 알리거나, 링 아나운서가 간략히 소개를 했다면 관중들은 더더욱 흥미롭게 관전을 했겠지만, 그저 두 선수의 이름과 소속을 소개하는데 그친 점은 좀 아쉽다.

 물러서지 않고 난타전을 벌이는 두 선수

물러서지 않고 난타전을 벌이는 두 선수 ⓒ 이충섭


 코피를 흘리는 박미란 선수

코피를 흘리는 박미란 선수 ⓒ 이충섭


경기는 시작과 함께 대접전의 양상으로 펼쳐졌다. 데뷔전이 대부분 그렇듯이 물러서지 않고 힘겨루기 양상을 보이다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마련인데, 라운드가 거듭 지나도 승자를 섣불리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이럴 경우 공격적으로 밀고 들어가는 선수가 승리할 확률이 높은데, 시작부터 경기 종료까지 밀고 들어가는 쪽은 에이미 선수였다. 2회전부터는 박미란 선수의 코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는 건 아예 배운 적도 없다는 듯 시종일관 돌진하는 에이미 선수의 투혼은 정말 대단했다.

 왼손 잽으로 클린히트 시키는 박미란 선수

왼손 잽으로 클린히트 시키는 박미란 선수 ⓒ 이충섭


 거친 표정의 에이미

거친 표정의 에이미 ⓒ 이충섭


하지만, 박미란 선수는 코피를 흘리며 밀리는 가운데서도 161cm 키의 긴 팔에서 나오는 원투 스트레이트로 157cm 에이미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다. 이번 시합을 위해 남자 선수와도 시합을 했고, 여자 선수와의 시합을 위해 원정 스파링도 5차례나 했다는 박미란 선수의 기량과 근성 또한 일품이었다. 데뷔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경기 내내 안정된 자세와 밸런스로, 일명 막싸움을 벌이지 않고 깔끔한 원투 스트레이트로 상대방의 안면을 클린 히트시켰다.

4라운드가 눈깜짝할새 지나갔다. 서로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승부가 갈려야만 하는 진실의 순간. 경기 결과는 0-3(36-40 36-40 37-40) 심판전원일치로 박미란 선수의 판정승이었지만, 승자와 패자 모두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대견한 서로에게 축하를 보냈다.

 최선을 다한 대견한 상대방에게 축하의 인사를 나누는 장면

최선을 다한 대견한 상대방에게 축하의 인사를 나누는 장면 ⓒ 이충섭


링에서 당당히 내려온 박미란씨에게는 응원 온 체육관 식구들의 맥주 세례가 이어졌고, 인터뷰를 하려는 눈에는 어느덧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박미란 선수와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남들처럼 다이어트를 위해 시작했다가 1개월, 6개월 횟수를 거듭할수록 복싱의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타인에게 나서는 것 조차 두려워했던 내가 어느덧 점점 더 당당해지는 모습을 발견했고, '그래! 얼마나 자신감이 생겼나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프로 테스트를 재수 끝에 합격했지요.

2번이나 연기됐던 데뷔전이 확정되면서부터는 아침에는 등산을 했고 점심에는 기술 훈련 저녁에는 웨이트로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운동하고 집에 가면 저녁 11시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식구들에게 비밀로 하다가 계속 늦게 들어가게 되어 사실대로 애기 했습니다. 식구들은 안 했으면 하면서도 이왕 시작한 거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보냈고, 시어머니는 인삼에 토종닭까지 삶아주셨지요.

박광열 관장님이 경기 전날은 운동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라고 했지만 평소 운동한 거에 반만 운동하고 ‘나는 꼭 해낼 수 있다’라는 체면을 걸면서 잠들었습니다. 훈련하면서 맥주가 먹고 싶다고 체육관 회원들에게 한 마디 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선 시합 후에 회원들이 아예 맥주로 샤워를 시켜주더군요. 너무 고마웠습니다.

에이미 선수도 정말 잘했습니다. 타국에 와서 지내는 것도 힘들었겠는데 운동까지 한다는 게 정말 쉽지 않았을 듯 해요. 비록 졌지만 대단한 상대라고 위로해주고 싶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혹은 여자라고 도전을 주저하지 마세요. 복싱 배우면서 나도 남자 못지않게 강해질 수 있다는 것과 34살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도전정신과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아, 다이어트요? 알아서 됩니다. 복싱 시작하기 전보다 18kg가 줄었거든요."

 오늘은 내 세상입니다

오늘은 내 세상입니다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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