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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뒤 17일 오후 인천공항으로 도착한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이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에 대해 질문을 하는 기자들을 향해 '인터뷰를 할 수 없다'며 거절하고 있다.
 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뒤 17일 오후 인천공항으로 도착한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이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에 대해 질문을 하는 기자들을 향해 '인터뷰를 할 수 없다'며 거절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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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에게 책과 자료는 농부로 치면 논밭과 같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키우고 결실을 수확하려면 논밭이 있어야 한다. 학자가 학문을 연구하는 일도 농부와 그 이치는 다르지 않다. 강만길은 책이나 논문, 투고 원고 등 지적인 생산품이 많았던 만큼 이를 쓰기 위해 준비한 자료들도 많았다. 때로는 손쉽게 사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렵게 구하기도 한 자료들 중 애정이 깃들지 않은 게 없었다. 글을 쓸 때마다 수도 없이 뒤적거리면서 손때가 묻은 소중한 분신들이었다. 학자나 문필가들은 대부분 이런 느낌을 느낄 것이다.

나이가 일흔을 넘기면서 강만길은 그동안 쓰고 싶었던 글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동안 모은 책과 자료는 어떻게 처리할지가 고민이 되었다. 이런 문제도 학자나 문필가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예전에는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에서 기증을 원하기도 했으나 언제부터인지 기증도 쉽지 않았다.

그때 강만길의 머릿속에 문득 북녘이 생각났다. 그동안 북녘을 다니면서 지켜보고 들은 바로는 북녘에는 자료가 부족하다고 했다.

"북녘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평양에는 6·25 전쟁 전의 건물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인한 전쟁 피해가 혹심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관한 연구자료가 너무도 부족하다면서, 심지어 <조선총독부관보>조차 완질이 없다는 것이었다." (주석 1)

강만길은 북녘 역사학자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대한제국관보>와 <조선총독부관보> 전질을 북측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남녘에는 있을 만한 곳에서는 모두 소장하고 있어서 이것들이 '희귀자료'는 아니었다. 북녘 학자들이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역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앞으로도 순조로운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은 북의 모든 사정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북은 또 남의 사정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북녘 역사학계가 남녘 역사학계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는 남녘에서 생산된 논문들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역사학보>나 <한국사연구> 등에 실린 남쪽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뿐 아니라 그 학문 경향의 흐름을 북녘 연구자들이 읽어야 하겠는데, 내 장서에는 그런 학술지가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그 밖에도 거의 완질이 갖추어진 <창작과 비평> 같은 잡지나 기타의 책들도 북녘 사회 일반이 남녘의 학문 세계나 생각의 흐름을 아는 데 크게 도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석 2)

그는 자신의 장서 전부를 북녘에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 군사독재 시절이나, 윤석열 정권에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다. 좌경, 용공, 빨갱이 등 온갖 비난이 쏟아지고, 권력에 충용스러운 검찰은 이를 죄악시 해 칼을 뽑을 것이 뻔하다.

통일부와 국가기록원 등 정부의 관련 부서에 알아보았다. 목록을 작성하고 관련 기관의 허가 절차를 밟으면 되는 일이었다. 여러 날에 걸쳐 목록을 기록하고 일일이 장서인(藏書印)을 찍었다. 노령이어서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된 책들을 일단 상자에 넣어 창고에 보관했다. 그러다가 2004년 7월에 배에 실어 북녘으로 보냈다. 8,000여 권에 이르는 많은 분량이었다.

분단 이래 민간인이 공식적으로 북한에 개인 장서 8,000여 권을 기증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8,000여 권의 장서는 본래 북녘 리종혁 조국통일연구원장의 의견에 따라 연구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사회과학원에 기증했다. 그러나 그 후 김일성종합대학과 인민학습단 등에서도 나누어 갖고 싶어 한다면서 의견을 묻기에 두말없이 동의했다. 이 장서의 기증으로 북녘 역사학계가 남녘 역사학계의 연구 업적과 동향을 이해하고 소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지며, 그것은 곧 학문 분야에서도 평화적 남북통일을 촉진하는 일이 된다고 생각한다.

학문하는 사람이 평화적 민족통일에 기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평화통일 방법론을 개발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남녘의 학술정보를 북녘에 제공함으로써 학문적으로 남북이 접근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한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3)

장서를 기증하고 몇 년 뒤인 2005년,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 참가하려고 평양에 갔을 때였다. 강만길은 안내를 맡던 젊은이한테서 "선생님이 기증하신 책을 대출받아 읽고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가슴속에서 벅찬 감동이 밀려오고 그 어느 때보다 큰 보람을 느꼈다. 또 자신을 안내하던 홍명희의 증손자로부터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번 평양 방문길에는 안내원들이 안면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새로운 사람들인 점이 달랐다. 남쪽 주석단 사람들이 탄 1호 버스의 안내원 중에도 벽초 홍명희의 증손자가 있었다. 벽초의 아들 홍기문의 손자인데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를 나온 사람이었다.

물론 사전 준비가 있었겠지만 나를 잘 알고 있었고 또 내가 쓴 글도 꽤 읽었음이 확실했다. 북녘에 기증한 나의 저서 중 어느 책인가가 지금 그의 책상 위에 있다고도 했다.

남쪽에서 '홍명희 연구'가 이루어져 연구서가 출판되었고 벽초가 살았던 괴산의 옛집을 보존하려는 시민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전했더니 그런 사실까지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올 때는 벽초에 대한 연구서적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다음 해 광주에서 열린 기념대회에 그가 참석했기에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인편으로 <벽초 홍명희 연구>를 보내주었다. (주석 4)

그의 장서를 북녘에 기증한 일을 두고 일부 극우세력은 극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시민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한 뒤부터 극우냉전세력에게서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들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도 무심코 넘기고자 했다. 이런 글을 남기고.

'민족지'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나의 대북관 및 평화통일관을 비판하면서 평생 모은 장서를 어디 기증할 데가 없어서 북녘에 기증했느냐고 트집 잡은 일이 있었다. 전쟁통일이나 흡수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 남쪽에는 흔한 제 장서를 그것들이 귀한 동족사회 북녘에 기증한 일을 두고 트집 잡는다면, 그것에 대한 판단은 뒷날의 역사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주석 5)


주석
1> <역사가의 시간>, 478쪽.
2> 위의 책, 479쪽.
3> 위의 책, 480~481쪽.
4> 위의 책, 405쪽.
5> 위의 책, 48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강만길평전, #강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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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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