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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끝자리가 2일과 7일, 이날은 기분 좋은 기다림과 설렘이 가득 담긴 날들이다.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은 어릴 적 장날. 어려서부터 익숙해져 있는 데다가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들도 떠올라 왠지 모르게 설레는 날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내가 나고 자랐던 고향의 시골 오일장도 2일장과 7일장이고, 현재 사는 이 지역의 오일장도 2일장과 7일장이다.

나는 대도시에 살지만, 집에서 승용차로 10여 분의 거리에 오일장이 있어서 장날이 되면 찾아가 예전 고향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거나, 기분이 울적할 때는 이따금 오일장을 찾는다.
 
국화빵 기다리며 떠오른 추억의 풀빵
  
국화빵을 사기 위해 손님들이 둥글게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 곽규현
   
한 해 말미, 쓸쓸한 마음이 들어 며칠 전에도 아내와 함께 오일장을 보러 갔다. 장마당 입구부터 북적북적 사람 냄새가 풍기고 생기가 돌아 덩달아 기분이 들뜬다. 입구로 들어서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빙 둘러 서 있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구매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주머니 두 분이 국화빵을 열심히 구워내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에 따라 쉴 새 없이 나오는 국화빵, 어쩐지 나도 먹고 싶어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동그라미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예전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사 오셨던 풀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가끔 밭에서 나오는 푸성귀나 곡물 보따리를 이고 장에 가셨다. 나는 어머니가 장 보러 가는 날에는 신이 나서 우리 집 마당을 뛰어다니고 신작로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신작로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때 신작로에는 자동차보다는 사람이 더 많이 다녔다. 모두가 어렵던 시기, 버스 배차 간격도 길고 손님도 넘쳐나서 '버스 타기가 천당 가기보다 힘들다'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20리(7.8km)도 넘는 길을, 짐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손에 든 채 걸어 다니셨다.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신작로 마을 어귀에 모습을 드러내면 나는 잽싸게 뛰어 내려가서 어머니를 맞았다. 어머니가 반가웠다기보다 짐보따리를 더 기다렸다. 보따리에는 가져간 농산물 대신에 과일이나 생선, 내가 좋아하는 과자나 풀빵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때의 풀빵은 지금처럼 국화나 붕어 모양도 아니었고, 그냥 아무 모양도 없는 밋밋한 풀빵이었는데도 그 달달했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내기 위해, 철없는 자식들에게 맛있는 걸 먹이기 위해 먼 오일장을 걸어오갔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짠해진다.
 
국화빵 한 입 물고 시장 구경, 상인들 보며 얻는 에너지 
 
필자의 아내가 팥을 사기 위해 상인과 이야기하고 있다. ⓒ 곽규현
   
따뜻하게 온기가 전해지는 국화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장터 안으로 들어가니 예전에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다니셨던 곡물들이 보였다. 젊은 부부가 펼쳐놓은 곡물전에는 갖가지 곡물이 담긴 마대와 빨간 대야가 줄지어 있었다. 남자 사장님은 활기차게 마대에 곡물을 채우고, 여자 사장님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두 분의 손발이 척척 맞는 걸 보면서 넘치는 삶의 에너지를 느낀다. 텃밭에서 따온 호박으로 죽을 끓이는 데 필요한 팥을 사기 위해 아내가 여사장님에게 팥 한 되를 주문하니 한 움큼을 덤으로 얹어주었다. 게다가 사용하고 남은 팥을 보관하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 사는 맛이 난다.
 
생선전에 고등어를 비롯한 여러 생선이 펼쳐져 있다. ⓒ 곽규현
   
할머니 한 분이 감자와 배추, 무 등을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곽규현
   
곡물 가게를 돌아 나오면 단골이 된 생선 가게가 나온다. 여기 고등어가 신선하고 맛이 좋다기에 올 때마다 가는 곳이다. 젊은 청년 사장님이 다양한 생선을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사장님은 이곳저곳 오일장을 돌아다니면서 생선 장사를 한다며 활발하게 입담을 늘어놓는데, 삶의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입맛을 돋우는 고등어 몇 마리를 사서 모퉁이를 꺾어 올라가니 할머니 한 분이 배추와 무, 감자를 팔고 계신다. 예전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아마 어머니도 저렇게 밭에서 키운 채소를 펼치고 파셨을 것이다. 내가 감자조림을 좋아해 감자를 사니까, 할머니가 맛있게 먹으라며 감자 몇 개를 더 얹어주셨다. 이런 게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인정 아닌가 싶다.
 
만나면 주눅부터 드는 키오스크 

요즘 마트나 웬만한 상점, 음식점에는 사람 대신 이름도 생소한 '키오스크'라는 무인 단말기를 이용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물건값을 계산하는 것도 절차대로 스크린을 정확하게 터치해야 하고,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스크린을 눌러야 한다. 전자 기기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편리할지 모르나 미처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눅부터 든다.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사히 계산을 잘 치를 수 있을까, 뒷사람들의 재촉하는 듯한 시선을 의식하며 버벅거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상생활의 스트레스가 된다. 사람 냄새가 사라지고 삭막한 전자 기계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살이가 버거워진다.
 
오일장은 적응할 틈도 없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나마 쉬어가는 안식처다. 메말라가는 삶에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옛날 추억이 깃들어 있고, 그윽한 사람 냄새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 숨 쉬는 날것 그대로의 삶의 현장이다. 오일장은 나처럼 나이 들어가는 세대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 주지만, 젊은 세대에게도 전통의 풍미와 색다른 에너지, 몸으로 전해지는 인간미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줄 것이다.

편리함과 효율성만 좇아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 오일장을 보면서 한 박자 쉬어가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연말 연초에는 집 근처 오일장 한 번 찾아보시기를.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실릴 수 있습니다.

태그:#오일장, #전통시장, #곡물전, #생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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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가끔 글로 표현합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살맛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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