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세대의 그림자
 
우스갯소리로 예전 30살과 지금 30살의 차이를 비교하는 캐리커처가 온라인 곳곳에 떠도는 중이다. 부모세대가 30살 전후일 때는 거의 대부분 결혼해 '정상가정'을 이루고 평생직장에서 몇 년째 열심히 일하면 작은 집과 차를 소유할 수 있었다. 비록 주공아파트에 경차라도 말이다. 즉 그 나이 쯤 되어 '낙오자' 취급 받지 않는다면 인생궤도에 안착된 시기로 묘사되던 셈이다. 당시엔 '공돌이'라 불렸다지만 지금은 선망의 대상이 된 대공장 제조업 정규직 일자리가 열려 있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긴 하다.
 
반면에 작금의 청년세대는 30살이 되었더라도 미래가 불투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정적 직장에 취업하기만 해도 인생 대성공으로 취급될 정도다. 그만큼 취업절벽은 가팔라졌고 노동시장에서 평생고용은 전설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대도시 아파트 가격은 평생 벌어들일 근로소득 몽땅 투입해도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 되고 말았다. 그럼 대체 누가 저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을 품을 틈도 없다. 현 세대에게 내 집 마련 꿈은 언감생심 불가능한 영역처럼 치부되며 희미해졌다. '하우스 푸어', '카 푸어' 등 온갖 'OO 푸어'가 그 실체도 모호한 가운데 SNS세계를 떠돈다. 상대적 박탈감과 자조만이 횡행할 따름이다.
 
사실 전체적인 사회적 부는 늘어나고 물질적 생활은 과거에 비해 풍요로워진 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통 우리 주변을 뒤덮은 형국인 이런 좌절감과 정체현상은 비단 한국사회에만 해당되는 상황도 아니다. 흔히 '1세계' 혹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지구촌의 밝은 영역들, 유럽과 일본, 북미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벌어지는 풍경이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과거에 비해 열정도 패기도 포부도 보여주지 않는다며 자녀세대를 질타하거나 무시하기 십상이다. 자신들이 처했던 시대적 배경과 현재 청년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부담이 확연히 다른 지점을 배제한 고정관념의 산물이기에 대화를 통한 소통이 불가능에 가깝다.
 
반대로 청년세대는 이미 기성세대가 사회 분야별 결정권과 알짜 자리란 자리는 다 틀어쥐고 자신들은 별다른 재량도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볼멘소리를 한다. 3세계 후진국 난민 같은 열악한 처지를 돌아보라는 공허한 기성세대의 일갈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장 주변에서 목격되는 상대적 빈곤이 더 눈에 잘 들어오게 마련이다. 먹고 사는데 어찌어찌 기본적인 수요는 충족할 수 있지만 추가로 더 노력한다고 딱히 기회가 부여될 것 같지 않은 막막함이 회색빛 그림처럼 따라붙는다. '영국병'이라는 표현은 한국사회에서도 요즘 세태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때 자주 대충 끼워 맞춰 쓰이곤 한다. 하지만 제대로 검증된 분석과 고찰보다는 진영논리에 따라 영국의 현재 풍경을 양극단에서 다루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가운데 찾아온 <스크래퍼>는 사회고발영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해당 영화 속 풍경에 숨겨진 요소들은 그 공허한 개념에 실마리를 제공할 만한 잠재력을 감추고 있다.
 
엄마를 여읜 12살 소녀의 세계에 어느 날 '친부'가 들이닥치다
 
"스크래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크래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12살 소녀 '조지'는 함께 살던 엄마를 얼마 전에 여의었다. 미성년자이기에 보호자/후견인이 필요하지만 교묘하게 그 사실을 학교나 공공기관에 은폐한 덕분에 조지는 엄마와 함께 살던 집에서 혼자만의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물론 주변 이웃들은 대충 조지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지만 침묵한다). 딱히 학교생활에 애착이 있거나 따로 돌봐주는 이도 없는 조지는 이웃의 또래 소년 '알리'를 호구처럼 부리며 말동무 겸 동업자로 삼는다. 혼자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한데 따로 수입원이 있거나 유산 물려받은 것 없는 조지는 알리와 함께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전거를 훔친다. 그렇게 마련한 장물을 동네 자전거 가게에 처분해 월세 등 생활비를 마련하는 중이다.
 
그런 어느 날, 공동주택 담벼락을 타넘고 젊은 남자 한명이 조지의 집에 침입한다. '제이슨'이라는 그 남자는 자신이 조지의 친아빠라고 말하지만 조지는 태어나 한 번도 그를 본 기억이 없다. 이 남자는 조지에게 그저 낯설고 수상쩍은 침입자일 뿐이다. 조지는 알리와 함께 제이슨을 몰아내고자 여러 차례 시도하지만, 조지가 혼자 살면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음을 간파한 제이슨의 겁박에 당분간 그를 집에 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조지는 어떻게든 그를 내쫓고 자신만의 평화로운 생활을 이어가려 결심한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조지는 이제 자신이 그의 아빠라 주장하는 제이슨과 원하지 않는 동거생활을 해나가야 한다.
 
조지는 신경질적으로 텃세를 톡톡히 부려가며 제이슨과의 관계 개선을 거부하지만 12살 아이는 센 척 해봐야 결국 의지할 곳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의구심은 가시지 않는다. 정작 엄마와 자신에게 본인이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아빠가 엄마가 죽고 나서야 뒤늦게 출몰한 데는 분명히 뭔가 속셈이 있다! 라고 확신하던 조지는 탐정이 빙의된 것 마냥 제이슨이 숨겨놓은 비밀을 파악하려 애쓴다. 그런데 아무리 뒤지고 추리해 봐도 딱히 특별한 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더 답답해진다.
 
제이슨은 조지의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방치해뒀던 딸에게 신경이 쓰여 스페인 이비자 섬에서 잠시 돌아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고 있거나 부모로서 조지를 돌볼 계획은 딱히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아빠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준비가 안 된 상태인 것이다. 그럼에도 같이 살다 보면 정이 드는 법이다. 둘은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밀어내고 당기고 하길 거듭하면서 불신과 경계의 간격을 좁혀간다. 물론 10대 시절에 조지를 낳은 뒤 제대로 아빠 노릇해본 적 없이 외국으로 도망가다시피 떠났던 제이슨과 되바라진 척 하지만 학교생활에 흥미도, 친구도 거의 없는데다 자전거 도둑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는 조지. 이들 부녀의 일상이 우리가 기대하는 가족의 그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결국 한 아이의 성장에는 온 마을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법
 
"스크래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크래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한 줄의 문구가 화면 가운데 새겨진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그리고 금방 스윽 칠판을 지우개로 지워내듯 그 글자가 사라진 자리에 "미안하지만 난 혼자 자랄 수 있어"라는 문장이 대신 들어찬다. 후자는 당연히 조지의 당시 심경일 테다. 그렇게 시작부터 나름대로 '자립생활'을 도모하는 조지의 일상이 초반부에 펼쳐진다. 하지만 조지의 초반 풍경은 '자립'보다는 '방치'에 가까워 보이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되바라진 10대의 전형처럼 조지는 겉으로는 당차게 어른들과 흥정도 벌이고 (진상이 밝혀지면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고 사사건건 간섭할 게 분명한) 지역 사회복지사도 용케 속일 정도로 또래 중에는 치밀한 존재다. 하지만 그래봐야 어른들의 닳고 닳은 면모와 상대하기엔 허점투성이라는 걸 관객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영화는 흥미롭게도 조지의 일상생활과 주인공의 시각으로 보는 풍경 vs 객관적으로 주변에서 조지를 보는 시각을 교차시키는 연출기법을 선보인다. 마치 영화 중간에 삽입된 광고처럼 주변 지인들의 코멘트가 추임새처럼 냉소적인 내용과는 달리 흥겹게 따라붙는다. 여기에 추가해 조지의 집에 식객처럼 붙어사는 거미들의 의인화된 대화가 보다 직설적으로 조지의 현 상황을 내레이션처럼 풀어낸다. 감독이 원래 지역 힙합 음악인들의 (수백 편 단위의) 뮤직비디오 작업으로 영상을 시작한 이력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우울하게 치닫기 좋은 소재를 경쾌한 호흡과 형식적인 테크닉으로 극복하며 다양한 단면을 파생시키는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스크래퍼>가 선보이는 이야기는 크게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근래 들어 영화제 등을 통해 소개되는 작업들과 공통점이 많다. 취약가정에서 가족관계의 회복(보다는 형성)과정을 세밀화로 그려내는 스타일 전형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할 테다. 그런 배경 탓에 자칫 그저 암울하게 펼쳐지기 쉬운 설정과 전개를 경쾌한 코미디 감성과 컬러풀한 색감으로 그려내는 접근방식이 타 작업들과 차별화를 이루는 핵심이다. 영화는 빤하지 않은 통속성 + 신파를 배격하는 인디 감성이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깔끔한 소품 성격으로 다가온다. 그런 영화적 개성은 본 작품의 제목 어원만 따져도 쉽게 이해된다.
 
스크래퍼(Scrapper)
1. 싸움[논쟁, 경쟁]을 좋아하는 사람
2. 건설 노동자
 
한 단어에 영화 속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속성이 몽땅 포함되어 있다. 주인공 조지는 고작 12살이지만 온전히 세상을 소화하진 못할지언정, 어른들에게 종속되지 않으려 기를 쓰고 덤비며 주변 또래들에게도 화가 치밀면 폭력적인 존재다. 아직 주변과 온건하게 소통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미숙함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두드러진다. 거기에 조지가 속한 동네의 어른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안정된 일자리 대신에 장기실업으로 복지수당에 의존하거나 철새처럼 일용직에 종사하는 티가 역력하다. 이렇게 제목이 함축한 작품 속 배경은 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원료처럼 기능한다.
 
계급 분리와 복지제도 의존의 세태가 묻어나는 영화 속 풍경
 
"스크래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크래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그런 치밀한 안배의 결과로 <스크래퍼>를 만든 이들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대사나 배경 설정을 통해 영화 속에 그려진 영국 하층계급의 현실적 삶을 실감나게 재현하는데 일정하게 성공한다. 감독과 제작진이 잔뜩 숨겨놓은 장치들을 관객이 머릿속에 온전하게 그려낼 수 있다면, 이 소소하게 적당히 코믹하던 가족 드라마는 사회적 맥락을 갑옷처럼 둘러쓴 채 순식간에 변이될 잠재력을 잔뜩 품은 채로 관객이 다음 단계로 진입하길 기다리는 셈이다.
 
작품의 배경은 대도시 중심부와는 거리가 멀다. 전형적인 교외지역, 그것도 저소득층을 위한 비슷비슷한 규격의 공동주택단지가 늘어선 공간이다. 겉으로는 제법 화사한 디자인에 있을 것 다 갖춰진 나쁘지 않은 주거환경이다. 흔히 도시빈민들의 주 무대인 쓰레기 나뒹구는 슬럼가와는 거리가 먼 소박한 동네이지만 영화 시작부터 등장하는 주민들을 살펴보면 이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현실은 금방 간파된다.
 
이민자와 한 부모 가정이 동네 전체를 채운다. 우리가 떠올리는 앵글로색슨족의 백인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소수자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인도계나 흑인, 아시아계 비중이 만만찮다. 이 주택단지 주민들은 명확히 대도시 인근 고급맨션이나 단독주택 거주하는 시민들과 계급적으로 구분된 존재들이다. 조지는 전형적인 금발 백인소녀이지만 그의 거의 유일한 친구 알리는 이름만 들어봐도 인도계 혼혈임을 알 수 있다. 조지의 또래 아이들 역시 다문화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과거 식민제국 시절의 흔적과 유럽 전역의 일상이 된 이민자의 물결이 어우러진 결과다. 제이슨 역시 한적한 동네에서 태어나 교육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적당히 살아온 하층 백인 캐릭터의 전형이다.
 
거기에 추가로 이 영화 속에는 흔한 직장인의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대신 일용직과 공공서비스 종사자들이 대부분의 어른들을 표상한다. 조지와 알리가 학교를 땡땡이치고 영국 특유의 파이가게에서 죽치고 있을 때 주변 테이블에는 건설현장이나 공공근로분야 일용직노동자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어른들로 가득하다. 학교에 가 봐도 다문화 사회가 확립된 지 오래다. 심지어 조지의 담당 사회복지사도 서남아시아 계열이다. 이미 현대 영국사회에서 3d 업종이나 필수인력이지만 박봉에 노동환경 좋지 않은 공공부문은 이들 이민자들 없이 유지가 불가능한 현황이 그려지는 대목이다. 제이슨이 고향을 떠나 입에 풀칠하는 동네도 스페인의 관광지 이비자 섬이다. 그가 딸에게 만들어주는 음식은 영국 전통요리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조지가 생계형으로 '일하러 나간다'며 매일 벌이는 자전거 절도는 경찰과 원래 주인을 빼면 동네 이웃들 중 누구도 범죄로 비난하지 않는다. 실업이 만연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가 사라진 현대 영국의 사회적 노동환경과 그에 길들여진 과거 노동계급 - 이제는 사회복지 서비스에 의존하게 된 하층민 - 의 전형적인 초상이다. 제이슨과 조지 부녀도 당연히 그 일원이다. 우리가 흔히 당연한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타인의 재산에 대한 절도나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이 마을에는 일상화된 상황이다. 오히려 그런 동네 속성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펼쳐지는 게 은근히 오싹해질 정도다. 우리가 익숙해져 있던 공동체적 규범과는 전혀 상이한, 일종의 '야만'적 퇴행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과 이웃들을 탄생시킨 마거릿 대처와 신자유주의 유산
 
"스크래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스크래퍼"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그런 속사정이 재미있게도 조지의 집 또 다른 식구 격인 거미들의 내레이션 대화로 설명된다. 거미들에게서 '마거릿'이란 이름이 언급될 때 쉽게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곧이어 '전등갓과 노조를 박살내자!'할 때는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치료한다며 임기 내내 대대적으로 벌였던 반(反)노조 정책이 겹쳐진다. 실제로 현재 영국 대도시 근교에서 복지수당에 의지하는 집단주거단지 거주민들 상당수는 대처의 노동개혁(?)정책으로 제조업 기반이 붕괴되면서 세대를 거듭해 실업자로 누적된 과거의 산업역군 노동자계급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패션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차브'의 하위문화를 형성하거나, 권태로운 일상을 떨치기 위해 폭음을 일삼고 '훌리건'으로 활약(?!)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어낸다. 그런 기행을 벌이는 이들의 명성에는 생성과정이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그 깨달음의 순간, 평범하고 훈훈하게만 보이던 부녀의 코미디 가미된 드라마는 <빌리 엘리어트>와 <풀 몬티>, 그리고 켄 로치의 영화들을 줄줄이 소환하며 사회적 리얼리티를 상기하게 만들어버린다. 특히 켄 로치의 작품 중 부양의무와 주거환경 부실 탓에 양육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엄마의 고군분투를 다룬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와 <스크래퍼>는 거울의 대칭처럼 보일 정도다.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1970-1980년대 들어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끈 일등공신이던 탄광지대가 폐광을 맞이하게 된다. 정부의 강경한 산업구조조정 정책은 타협을 고려하지 않고 공권력을 투입해 강행된다. 패배가 예정된 파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빌리의 가족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던 상상이 <스크래퍼>에서 배경으로 각인되는 셈이다. 그렇게 거의 반세기를 경유한 영국사회의 파괴적 변천이 <스크래퍼>를 통해 일상풍경으로 드러나는 식으로 묘사된다. 여기에서 또 다른 켄 로치의 영화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와도 <스크래퍼>는 만나는 지점을 가진다.
 
'키친싱크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영국 특유의 사실주의 장르 문법의 영향은 전혀 상관없게 보이던 본 작품에도 의외 없이 중력을 뻗고 있었다. 물론 한없이 세밀화처럼 치닫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빌리 엘리어트>나 <풀 몬티>처럼 디킨스 이후 영국 대중문학과 영화의 뿌리 깊은 전통, 적절한 유머감각이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그런 코미디 장치는 결국 리얼리티의 강조가 자칫 과도한 회의주의로 빠져들지 않도록 배치한 기능적 경향성에 가깝다. 조지의 집 안 소품과 도구들, 생업(?)을 위해 그가 가방에 챙겨 넣는 온갖 연장들의 세심한 배치, 웃음을 유발하지만 지역사회를 상징하는 주변 캐릭터들의 인종구성, 부녀간의 갈등 축이 된 정체되고 비전 없는 동네의 사정들이 골고루 이어져 하나의 풍경화를 형상화한다.
 
그렇게 자신이 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숙지와 치밀한 구성의 조합이 어우러진 결과물로서 <스크래퍼>를 소화한다면, 그저 행간으로 스쳐 지나치기 쉬운 수많은 코드의 조합을 통해 극중 주인공들의 변화가 더 값지고 보람되게 여겨질 테다. 물론 무엇보다 이 영화는 20세기의 유산인 '정상가족'이 해체된 자리에 소멸이 아니라 대안적인 가족형태와 문화를 상상하는 단초의 특징이 가장 짙게 묻어나는 작업이다. 조지와 제이슨,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굴지만 '티키타카' 수준이 대단한 부녀의 수평적이고 친구 같은 혈연 공동체가 마침내 탄생하는 과정을 관객은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억지 해피엔딩이라는 판타지로 도피하지는 않는다. 제이슨은 여전히 변변한 일자리도 없고, 조지는 학업에 별다른 소질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한심한 면을 서로 꼭 닮은 그들의 미래가 딱히 확 좋아질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 오히려 지극히 드물게 마련인) 장밋빛 기대와는 이 영화의 결말이 한참 거리가 멀지언정 부녀가 함께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힘과 의지를 포기하지 않도록 (원래 가족의 근본 역할인) '방파제'이자 '울타리' 몫을 서로 전하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은 결말이다. 그렇게 사실주의에 굳게 두 발을 딛고 꿈을 잃지 않을 만큼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스크래퍼>의 84분은 고달픈 일상을 살아가는 2020년대 한국의 관객에게 위로와 희망을 동시에 선사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작품정보>
 
스크래퍼 Scrapper
2023|영국|코미디/드라마
2023.09.27. 개봉|84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샬롯 리건
주연 롤라 캠벨(조지 역), 해리스 디킨슨(제이슨 역)
출연 알린 우준(알리 역), 로라 에이크먼, 앰브린 라지아, 올리비아 브래디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공동제공/공동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공동제공 ㈜키노라이츠
 
2023 39회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월드시네마 드라마틱)
스크래퍼 샬롯 리건 감독 롤라 캠벨 해리스 디킨슨 알린 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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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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