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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직장생활을 그만 둔 건 지난 6월이었다. 2년의 출판사 생활 때도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 일이 재미있는 건 아니었다. 이어진 3년간의 광고대행사 생활도 어느 정도 일의 재미를 느끼긴 했지만 허구한 날 야근의 연속이었다. 도서관에 앉아 적성에 안 맞는 공부하느니 그냥 할 줄 아는 일을 찾아 취직한 게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회사에 필요없는 사람이 되다

이 장면을 보고 얼마나 울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서글픈 한 장면이다
▲ 권고사직 얘기를 듣고 펑펑 우는 드라마 속 한 장면 이 장면을 보고 얼마나 울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서글픈 한 장면이다
ⓒ 이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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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두 번의 직장생활 사이에 잠깐 쉬어 봤자 일 주일이었을까. 거의 쉼 없이 달려온 탓이기도 했을 거고 사회생활 하기에 적합한 성격이 아니었던 탓도 있었겠다. 점점 지쳐가다가 대행사 생활 2년이 좀 넘자 회사 일에 대한 마음은 권태기 애인 사이의 그것(?)처럼 식어갔다.

그 와중에 감당 못할 일을 꾸역꾸역 맞아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일해야 했다. 더욱이 오랫동안 맡아 익숙하다 싶은 일들까지 자꾸 꼬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친절하게도 일에 주눅들어 말을 버벅거리는 내 모습을 뒷담화한 채팅 캡쳐 화면을 (실수였을까, 아니면 지능적인 고의였을까) 전송 받기도 했다.

일과 동료, 이 모든 게 어그러지니 당연한 수순처럼 회사로부터 사직 압력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부장이 따로 불러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이 왔다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팀장이 권고사직 처리는 안 되니 스스로 사직서를 쓰라고 말을 바꿨다.

사직서를 쓰지 않는다고 버티자 일 주일 동안 회의실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너랑 일하기 싫어한다"는 말을 내내 들어야 했다. 거기에다 연속으로 시말서를 두 개 쓰고 나니(하나는 결과물 자체의 퀄리티 문제라 인정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단순한 첨부파일 실수였는데 말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종일 우느라 하루에 밥 한 끼를 겨우 먹었을까. 솔직히 이렇게 다 어그러진 마당에 그만 싸우고 도망치고 싶었다. 며칠 만에 사직서를 쓰겠다며 백기를 들었다. 이제 그만, 너는 잘 싸웠어. 더 버티면 망가질거야. 아마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던가 싶다.

스스로의 필요를 증명하기

그날 밤 상심한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2시. 배터리를 충전하려고 꺼져 있는 핸드폰을 콘센트에 끼웠는데 꺼진 핸드폰에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카카오톡 메시지가 하나 떴다.

"절대 스스로 사직서 쓰지 말라."

먼저 퇴사한 옛 상사의 메시지였다. 정신이 번쩍 뜨였다. 다음 날 아침에 몸이 아프단 핑계로 회사를 나가는 대신 노무사를 찾아가 너무 울어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상담을 받았다. 그때를 계기로 두 달간 병가를 내고는 정신과에서 약물 및 상담치료를 받았다. 한편으로 노무사를 통해서는 처음 말한 대로 권고사직임을 인정해 달라고, 그게 아니라면 위로금을 달라고 계속 얘기했지만 회사는 결국 해주지 않았다. 지금 와서는 이런 식으로 요구한 게 잘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식으로 버림 받았다가 더 큰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될까 두려웠다.

협상 과정에서 별 진전이 없자 두 달 후에는 노무사도 내 일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는 경영 관련 지식이 있는 지인에게 물어가면서 혼자 직접 지방노동위원회나 근로감독관 등에 민원을 넣어 진정신청 절차를 밟았다.

사실 승산이 별로 없어 보이긴 했지만 내 안의 목소리가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하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를 따라 지칠 때까지 공덕역 주변을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며 진정을 했던 기간은 세 달이 더 걸렸다. 그리고 승패에 관계없이 내게 상처를 준 상대에게 화 내는 법을 몸으로 직접 해나가는 경험이 절실했다.

결국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다는 노동위원회 판결문을 받고 나서야 나는 그 싸움을 그만 했다. 나는 졌고 백조가 됐는데 많이 불안할 줄 알았건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나를 감싸준 사람들, 새로 인연 맺게 된 사람들

그들의 사는 방식, 다른 삶의 방법들이 많은 용기를 주었다
▲ 청년허브에서 만난 여러 인연들 그들의 사는 방식, 다른 삶의 방법들이 많은 용기를 주었다
ⓒ 이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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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회사에서 권고사직이 왔다는 말을 부장에게 들은 날, 엄마와 아빠는 두 분 다 어쩌다 그렇게 됐냐는 식으로 내게 물었다. 그러나 사직강요 상황이 하루 하루 지날 때마다 엄마와 아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때, 두 분은 내 상처에 소금 뿌리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되레 병가를 내고 회사와 싸우기 시작했을 때, 회사에서 온 징계장을 보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온몸이 욱신거려 끙끙 앓았을 때 말 없이 손을 잡아 주시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회사 다닐 때는 업무나 인간관계로 비롯한 스트레스 때문에 매일 싸우기만 해서 그렇게 무조건 받아주실 줄은 미처 생각 못했는데 말이다. 엄마는 집에 우두커니 앉아 넋이 나가 있던 나를 데리고 집 뒷산에 핀 꽃을 보여주시면서 내게 봄의 꽃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아빠는 때 잘 만났다 하시며 나를 데리고 인도여행을 갔다 오셨다. 남자친구 또한 회사에서 쫓겨난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고 다독이며 격려해 줬다.

부모님의 격려에 힘입어 나는 다시 바깥으로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내가 뭘 잘 할 수 있는지를 찾기 시작했다. 대학 후배를 통해 알게 되어 진로탐색을 위해 찾아간 '청년허브'에서는 프로젝트형 학교에 다니며 100일 동안 여러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나 자신을 채워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퇴사 후 6개월 동안 종횡무진 누빈 회사 밖 세계(?)는 생생하고 재미있었다.

스물여덟 나이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회사에서 알던 관계 감각이나 지식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내 발로 찾아간 여러 곳에서는 자기만의 길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지금은 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법을 고민하기 위해 푼푼히 꼭 필요한 생활비 정도만 버는 반백수로 6개월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더 길어질지도, 혹은 이런 저런 시도 끝에 다 실패하여 다시 직장이라는 무덤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기간 동안 나를 믿어주고 보듬어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 좋다.

어떻게든 내 식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그게 지금의 내 꿈이다. 모두가 안녕하지 못한 세상에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걸음 더, 한 걸음 더"라고 말했던 내 자신의 목소리에 충실하고 싶다. 


태그:#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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