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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슈세키(1639-1707) I '당란관회권(唐蘭館繪券) 중 난관(蘭館 네덜란드관)' 종이에 채색 35.8×339.2cm 18세기 초. 네덜란드국기와 인도네시아인도 보인다
 와타나베 슈세키(1639-1707) I '당란관회권(唐蘭館繪券) 중 난관(蘭館 네덜란드관)' 종이에 채색 35.8×339.2cm 18세기 초. 네덜란드국기와 인도네시아인도 보인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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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이 본 서양' 전이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협조로 5월 29일까지 서울대학교미술관(관장 정형민 교수)에서 열린다. '요시와라 유관 내부'를 그린 가쓰시카 호쿠사이, 위 '난관'을 그린 아타나베 슈세키 등 일본미술사의 대표작가 37명의 작품이 소개된다.

이뿐 아니라 과학과 관련된 유럽의 서적, 기구, 지구본 등도 포함된다. 이런 서양문물을 일본은 어떻게 흡수하여 자국을 발전시키고 근대화시켰는지 회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다. 미술을 매개로 일본근대사를 조명하는 전시는 흔치 않은데 이번에 서울대미술관에서 어렵사리 이를 성사시켰다.

1부, 에도시대 쇄국정책 속 '나가사키'만 개방

가와하라 게이가(1786-?) I '나가사키 항' 비단에 채색 57.4×79.8cm 19세기 전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가와하라 게이가(1786-?) I '나가사키 항' 비단에 채색 57.4×79.8cm 19세기 전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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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는 에도시대 부분 개방한 '나가사키' 항만과 관련된 내용이 주제다.

에도시대(1603~1868)는 쇄국정책 속에서도 '나가사키(長崎)' 항만은 특구로 설정하여 중국과 네덜란드에게 개방하고 인공 섬까지 만들어 머물게 했다. 여기에서 18세기 네덜란드와 유럽의 서적, 서화, 서양천문기기뿐만 아니라 새, 짐승 등 당시로는 진귀한 물건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고 서구의 기술, 학술, 예술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다.

위 항만그림을 보면 네덜란드선 2대와 중국선 4대가 정박하고 있다. 당시 이런 그림의 수요는 컸으리라. 이 그림을 그린 게이가는 네덜란드 의사의 고용화가로 알려져 있다.

2부, 치밀한 묘사와 선명한 채색의 중국화풍 유행

유우히(1712-1772) I '청천(淸泉)백학도' 비단에 채색 116×50.4cm 1754(왼쪽). 와타나베 가쿠슈(1778-1830) I '쌍학도' 종이에 담색 106×57.8cm 1822.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유우히(1712-1772) I '청천(淸泉)백학도' 비단에 채색 116×50.4cm 1754(왼쪽). 와타나베 가쿠슈(1778-1830) I '쌍학도' 종이에 담색 106×57.8cm 1822.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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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는 일본에서 어떻게 치밀한 묘사와 선명한 채색의 화풍이 나왔는지가 주제이다.

1716년 막부장군으로 취임한 요시무네(1684-1751)는 서양종교 빼고는 외국에 대해 문호개방에 적극적이었고 학문과 문화의 육성에 힘썼다. 일본은 처음엔 중국회화를 그냥 따른다. 그러나 나중엔 아예 중국화가 심남빈(沈南蘋 1682-1760?)을 초빙한다. 이를 계기로 치밀한 묘사와 선명한 채색에 의한 사실화풍이 일본에 전파된다.

심남빈으로부터 직접 그림지도를 받은 일본작가로는 '청천(淸泉)백학도'를 그린 유우히(1712-1772)가 있다. 그는 일본에 거주하는 중국인저택에도 출입했다. 그를 통해 일본에서는 '남빈화풍'이 크게 유행한다. 그리고 '쌍학도'를 그린 와타나베 가쿠슈(1778-1830)는 유우히의 화법을 더 발전시켜 그 일가를 이룬다.

3부, 난학(蘭學)과 해부학 등 서구학문과 서적 소개

고바르드 비드루(1649-1713) I '해부서' 52.5×36.5×5.8cm 유트레이트 간행 1728. 네덜란드어 원서(위)
 고바르드 비드루(1649-1713) I '해부서' 52.5×36.5×5.8cm 유트레이트 간행 1728. 네덜란드어 원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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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는 난학(蘭學)과 해부학 등 많은 정보가 담긴 유럽서적과 학문 등이 그 주제다.

'난학(蘭學, 네덜란드의 과학Dutch science)'은 넓게 보면 서양학문전반을 뜻한다. 네덜란드는 당시 세계해상권을 쥐고 있었고 유럽에서도 인쇄술이 최고였다. 이렇게 일본은 네덜란드과학과 문물이 직수입하게 되면서 원서번역과 그에 대한 연구 붐이 일어난다.

전시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서적은 역시 '해체신서(解体新書)'다. 손바닥 해부도의 원본으로 네덜란드의 정물기법이 여기서 나왔고 서양의학 해부도감의 모범이 되기도 한다.

일본인의 세계관을 바꾼 지구도와 서양과학

시바 고칸(1747-1818) I '지구도' 동판에 채색 55×44.9cm 1793. 모토키 료에이(1735-1794) I '상한도면기록집' 1792(아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시바 고칸(1747-1818) I '지구도' 동판에 채색 55×44.9cm 1793. 모토키 료에이(1735-1794) I '상한도면기록집' 1792(아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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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시로는 조선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지구도가 일본에 소개되었다.

여기 지구도는 1730년 경 출판된 지도를 네덜란드 의사가 일본에 반입한 것이다. 이 세계지도를 소유한 오쓰키 겐타쿠(1757-1827)의 협조로 시바 고칸이 일본 최초로 동판으로 만들었다. 이런 것은 일본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시야에서 큰 변화를 주었을 것이다. 아래는 천문기기로 서양혼천의의 정면도와 이면도이다. 

일본은 이렇게 네덜란드회화를 받아들이면서 서양의 역학, 의학, 식물학, 동물학, 박물학, 천문학, 해부학을 접하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날로 커져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래서 일본은 자연스럽게 우리보다 앞서 기초과학이 융성했다. 일본이 노벨과학상을 14명이나 타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서양동판화가 일본판화가 되는 과정

우타가와 구니요시(1797-1861) I '오미지방의 용감한 여인 오카네' 목판에 채색 26.2×36.2cm 1831. 프랜시스 발로우 편 이솝우화(프랑스어 판) 1810(아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우타가와 구니요시(1797-1861) I '오미지방의 용감한 여인 오카네' 목판에 채색 26.2×36.2cm 1831. 프랜시스 발로우 편 이솝우화(프랑스어 판) 1810(아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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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작품을 보면 서양의 동판화 어떻게 일본화풍이 변하는지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아래 이솝우화는 1810년대 삽화를 넣은 재편집한 것으로 텍스트는 프랑스어로 적혀있다. 제목은 '말과 사자'다.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이런 우화집은 당시 유럽에서 대유행이었다.

이를 일본화가 우타가와 구니요시(1797-1861)가 '오미지방의 용감한 여성 오카네'라는 제목으로 일본풍으로 재치 있게 변용시켰다. 음영표현을 강조한 배경에 전형적 미인도를 그려온 오가네가 사자를 여성으로 대치시키는 방식은 참으로 독특하다.

4부, 에도시대의 양풍화가들

시바 고칸(1747-1818) I '이국풍경인물도 중 남성도' 비단에 유채 114.9×55.6cm 18세기 말-19세기 초(왼쪽). 히라가 겐나이(1728-1780)  I '서양부인도' 캔버스에 유채 41.4×30.5cm 18세기 후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시바 고칸(1747-1818) I '이국풍경인물도 중 남성도' 비단에 유채 114.9×55.6cm 18세기 말-19세기 초(왼쪽). 히라가 겐나이(1728-1780) I '서양부인도' 캔버스에 유채 41.4×30.5cm 18세기 후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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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서는 에도시대의 대표적 양풍(서양화풍) 화가가 소개된다.

일본 화가들은 이런 영향 속에 요즘 서양화가처럼 양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대표적 작가로는 위 왼쪽그림을 그린 시바 고칸(1747-1818)이 있다. 그의 화풍이 서구보다 더 서구적이다. 그는 또한 서양의 유화뿐만 아니라 세계지도(5번째사진)도 그렸다.

그리고 오른쪽 '서양부인도'는 히라가 겐나이(1728-1780)의 작품이다. 고칸보다는 대선배다. 코, 입, 눈의 윤곽을 뚜렷하게 강조하여 정말 서양부인 같이 보인다. 하여간 당대 이런 화풍이 대중화된 것을 보면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5부, '메가네에(眼鏡絵)'와 '우키요에(浮世畵)'

기타가와 우타마로(1753-1806) I '메가네에 장치를 보고 있는 귀여운 인상의 여인' 종이에 목판인쇄 58×45cm 1792-1793. '우키요에판에 장착된 메가네에 장치' 목재, 칠기, 종이, 납유리 1772-1789(아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기타가와 우타마로(1753-1806) I '메가네에 장치를 보고 있는 귀여운 인상의 여인' 종이에 목판인쇄 58×45cm 1792-1793. '우키요에판에 장착된 메가네에 장치' 목재, 칠기, 종이, 납유리 1772-1789(아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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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에서는 이번 전시에서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메가네에(안경회眼鏡絵)'와 '우키요에(채색목판화 혹은 부세화浮世畵)'가 소개된다.

위 작품은 고혹한 일본미인이 '메가네에'를 보는 모습인데 우리에겐 낯설지만 당시 일본에선 흔한 풍경이었다. 중국을 통해 일본에 전해진 메가네에는 그림을 상자 끝에 수직으로 세워 볼록렌즈로 확대하여 슬라이드처럼 찬찬히 볼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다.

18세기부터 일본은 갑자기 무사, 귀족, 상류층과 함께 에도(지금의 도쿄)의 40%에 해당하는 평민들이 부를 축적하면서 문화욕구가 높아진다. 이런 요인이 메가네에와 우키요에에 대한 수요층을 촉발시켰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우키요에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이유다.

서양미술에서 원근법과 음영 효과 도입

우타가와 구니요시(1798-1861) I '아후미야 몬히토' 종이에 목판채색인쇄 33.4×48cm 1818-1844년경.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 I '에도 100경 :사루와카 거리의 밤 풍경' 33.3×48cm 1857. 반 고흐의 '밤의 카페'가 연상됨(아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우타가와 구니요시(1798-1861) I '아후미야 몬히토' 종이에 목판채색인쇄 33.4×48cm 1818-1844년경.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 I '에도 100경 :사루와카 거리의 밤 풍경' 33.3×48cm 1857. 반 고흐의 '밤의 카페'가 연상됨(아래).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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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서울대미술관 정형민 관장의 우키요에에 대한 해설이 귀에 쏙 들어온다. "우리가 어려서 많이들은 '우키'를 생각해 보세요. 그건 물에 떠있는 고무튜브를 말하는데 그야말로 붕 떠다닌다는 뜻이죠"라며 우키요에는 그렇게 부유하는 세상을 묘사한 그림이란다.

그리고 화려한 채색은 어떻게 냈냐고 물었더니 "그건 너무 과학적 노력의 결과"라며 "10가지 색을 내려면 10번 판을 찍어야 하는데 바늘두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그 작업 과정이 정말 세밀하고 정확해야 겹치는 부분이 생기지 않는다"고 일려준다.

서양미술이 일본회화에 결정적으로 준 영향과 그 예를 보여 달라고 했더니 구니요시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든다. "첫째는 동양에는 없는 입체감을 높이는 음영효과이고 둘째로는 르네상스에 미술과 과학이 발명한 원급법을 활용했다"는 것이 골자다. 위 두 작품은 정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원근법과 그림자가 과장되어 그려져 있다.

1850년 런던엑스포 때, 1870년 인상파들에게 인기

우타가와 구니사마(1786-1865) I '서리가 내릴 것 같은 한밤의 풍속:등불을 켜는 여인' 종이에 목판 채색인쇄 35.4×24cm 1819.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우타가와 구니사마(1786-1865) I '서리가 내릴 것 같은 한밤의 풍속:등불을 켜는 여인' 종이에 목판 채색인쇄 35.4×24cm 1819. Photography ⓒ 2011 Kobe City Museu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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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는 "내년에 여수에서 엑스포가 열리는데 이것이 처음 열린 건 1850년 런던 엑스폰데 거기에 벌써 미술품 코너가 있었고 일본은 공예품과 함께 우키요에를 출품했는데 그것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일본이 크게 외화를 벌었다"는 것과 그리고 "1870년엔 우키요에가 인상파에까지 알려져 프랑스 화가들을 열광시켰다"고 부연 설명한다.

위 작품은 에로틱한 분위기 속에 등불을 켜는 미인을 섬세한 터치로 수준 있게 그려 반할 만하다. 우키요에는 '삶이 덧없다'는 뜻도 있어 때로는 그지없이 농염하고 관능적이기도 하다. 막후는 이를 막으려 검열 장치를 둔다. 위 작품 왼쪽을 보면 검열 인이 찍혀있다.

이런 전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는데 정치경제적 방법보다는 문화사적 접근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과 그것이 회화를 통해서라면 더 흥미롭고 교육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전은 일본의 근대화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주변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서울대미술관 홈페이지 http://www.snumoa.org
전시는 5월 29일까지 02) 880-9504 약도 홈페이지 참조



태그:#근대일본미술, #에도시대, #우키요에, #메가네에, #원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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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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