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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건어물녀, 초식남, 토이남, 그루밍족, 홈대디, 골드미스.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남녀의 모습은 다양하다. 남녀의 역할이 변했을 뿐 아니라 기성세대의 문화나 윤리적인 틀을 거부하면서 개성을 추구하는 신(新)인류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일부의 색안경을 낀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사는 모습을 들여다 봤다.  <편집자말>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은 현관 앞에 바로 내려놓고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 안에는 0.5L 생수가 두 상자 포장째 들어있다. 비닐포장을 찢어서 한 병을 꺼내 마신다. 밥솥에 남은 밥을 몽땅 넣어 김치볶음밥을 만든다. TV앞 맨바닥에 냄비 받침을 가져다 놓고 프라이팬째 올려놓고 먹는다. 좀 많다 싶지만 괜찮다. 미드 한 편을 보면서.

 

오늘 퇴근하고 나서의 내 모습이다. 일본 드라마 <호타루의 빛>에 나오는 '건어물녀'와 똑같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해도 뭔가 분위기가 흡사하다. 요즘 건어물녀 테스트라는 게 유행이라니 나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건어물녀 테스트, 혹시나 하고 해봤더니...

 

1. 집으로 돌아오면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 나는 바지도 귀찮아서 면원피스를 주로 입지만 '트레이닝복'이 편한 차림을 말하는 거라면 yes.

 

2. 휴일은 노메이크업 &노브라

- 당연 yes. 휴일엔 몸도 피부도 쉬어야지. 사실, 휴일이 아니어도 이건 가끔 yes.

 

3. '귀찮아', '대충','뭐, 어때'가 입버릇이다.

- no

 

4. 술 취한 다음날, 정체모를 물건이 방에 있다.

- 이건 참 부적절하지만 yes. 가장 슬픈 것은 영수증이 발견되는 것이다.

 

5. 제모는 여름에만 해도 된다.

- 나는 여름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제모의 시작은 여성박해였다는 걸 상기한다면 제모 따위는 당당히 거부해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여름에는 하니까 yes.

 

6. 까먹은 물건이 있으면 구두를 신은 채로 까치발로 방에 가지러 간다.

- 이건 거의 매일 아침마다 하는 행동이다. yes.

 

7. 메일(문자)의 답변은 짧고&늦게

- no.

 

8. 텔레비전을 향해 혼자 열을 낸 적이 있다.

- 난 모든 사물과 개체와 대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yes.

 

9. 냉장고에 변변한 먹을거리가 없다.

- 냉장고 안에는 육포, 맥주, 생수, 김치, 아이스크림이 있다. yes

 

10. 냄비에다 직접 대고 라면을 먹는다.

- yes.

 

11. 방에 널어놓은 세탁물은 개기 전에 입어버린다.

- 이것도 yes.

 

12. 최근 두근두근 했던 일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던 것 정도.

- no. 내 심장은 자주 두근거린다.

 

13. 1개월 이상, 일이나 가족 관계 이외의 이성과 10분 이상 말하지 않았다.

- 드라마의 건어물녀와는 달리 나는 연인이 있다. no.

 

14. 솔직히 이걸 전부 체크하는 게 귀찮았다.

- 살짝 그랬다. yes.

 

15. 솔직히 질문에 체크하면서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 그랬으면 좋으련만, 나는 사실 더블에스급으로 소심한 사람이라서 많이 신경 썼다.

 

이래서 15개 문항 중 10개 문항에 나는 yes라고 답했다. 판정은 이렇다. 0개 멋진여성, 1~3개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4~7개 당신은 건어물 예비인, 8~11개 건어물녀 인정, 12개 이상 초 건어물녀. 고로 나는 요즘 최고 화제인 바로 그 '건어물녀'인 것이다.

 

연애보다는 자기 취미생활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 자신만의 공간에서 일상을 즐기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일컫어 여성다움과 연애센스가 말라버렸다고 '건어물녀'라고 부른다. 또 남성다움을 강조하지 않으면서 주로 자신의 관심분야나 취미 활동에만 적극적이고 연애에는 소극적인 남성들을 '초식남'이라고 부른다.

 

넌 집에서 트레이닝복 안 입어? 냄비째 라면도 안 먹고?

 

요즘 TV에서 하는 드라마 탓이기도 하겠지만 건어물녀와 초식남이 우리의 시선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새삼스러움이다. 90년대에 '자기PR시대'란 말이 유행하며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각광받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는 프로페셔널, 신인스럽지 않은 신인, 준비된 직업인 등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연애에 있어서도 늘 지나침을 걱정하는 이시대에 건어물녀와 초식남은 그들의 새삼스러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헐렁한 트레이닝복에 엉덩이를 긁적이는 그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느낀다. 심지어 일본드라마 <호타루의 빛>에서는 건어물녀에게 '여자로서 끝'이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건어물녀와 초식남은 우리 자신이다. 집에서 편하게 입고 편하게 먹고 다른 사람들보다 내 스스로를 더 아끼고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은 사람 앞에서 소극적으로 변신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말이다.

 

우리는 좀 더 솔직하게 우리의 모습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트렌디 드라마에서 나오듯 집에서 설거지할 때도 실크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잠잘 때 아이라인을 말끔히 그리고 있는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스럽고 건강한 모습을 우리의 진짜 모습으로 인정하고 사랑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말이다.

 

나는 소망한다, 그들처럼 나 자신을 사랑하길

 

아까의 테스트로 돌아가보자. yes가 0개면 멋진 여성이란다. 일본드라마 <호타루의 빛> 1편에서는 '멋진 여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은 잘하지만 비아냥거리지 않고 위압감 없이, 남모르게 남자를 배려하고 귀여움을 겸비한 여성,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좋은 향이 나고 여성으로서의 몸가짐을 언제나 잊지 않고서 집에서도 깔끔하게 생활하는 여성, 요리, 꽃꽂이, 다도 같은 것을 배우며 자신을 갈고 닦고 좋아하는 허브티로 휴식하는 매력 넘치는 멋진 여성'

 

이쯤되니 가물가물하게 기억이 나기도 한다. 내가 갓스물이 되었을 때 내 어머니는 숙녀로서의 몸가짐을 가르치기 위해 날 다도수업에 보내셨었다. 아! 나는 그때 멋진 여성이 될 기회를 놓친 거였단 말인가! 웃음이 난다. 사실 언제나 몸가짐을 잊지 않는 뭔가 '로봇'스러운 여성보다는 문자 메시지 하나에 며칠을 고민하는 호타루가 훨신 사랑스럽지 않은가?

 

드라마에서 건어물녀로 나오는 호타루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늘 신경쓰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 한다. 연애 센스가 시들어버린 '건어물녀'라고 한다지만 그녀의 감수성은 누구보다도 풍부하다. 나는 혼자의 시간을 즐길 줄 알고 지나침을 경계할 줄 아는 건어물녀와 초식남처럼 내가 날 따뜻하게 사랑하길 소망한다.


태그:#건어물녀, #초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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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겪는 일상에서 분노하는 일도 감동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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