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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마태 신부가 한글 자모로 만든 중국어 자판 "안음 3.0"
ⓒ 안마태
지난 7월 초 중국 연길에서 '07 다종언어 정보처리 국제학술대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는 38년 미국 국적의 안마태 신부가 개발한 한글을 활용한 중국어 자판 '안음 3.0' 시연이 있었다. 그동안 알파벳을 통한 자판을 사용하던 중국인들은 큰 관심으로 지켜보았고, 중국 표준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알파벳을 쓸 때보다 무려 3배 정도 빠르다는 게 그 까닭이다.

그렇게 한글은 밖에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점점 더 푸대접을 받고 있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지방정부가 앞장서서 한글을 무시하고, 영어 퍼뜨리기에 혈안이 되고 있어서이다.

지난 7월 16일 부산시와 부산시 교육청은 "2020년까지 2700억원을 들여서 국제 도시 부산에 걸맞게 학생들이 해외 연수를 가지 않고도 영어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영어 도시 환경을 만들겠다"라고 발표한 데 이어서, 7월 23일엔 인천시와 인천시 교육청이 "영어가 자유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오는 2014년까지 2336억원을 들이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한글학회,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등 한글문화단체는 7월 27일 교육인적자원부와 함께 지방자치단체까지 지나친 영어 섬기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엄청난 교육 낭비며, 우리말과 얼을 짓밟는 결과를 낳게 할 어리석은 정책이라는 반대 성명서를 냈다.

한글단체는 성명서에서 밝힌다. "경기도는 영어마을의 재정자립도가 2006년 25%에서 올해 1~5월 동안 77%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처럼 영어에 엄청난 예산을 들인 것에 견주어 효과가 적고, 거기에 적자 운영까지 면하지 못하고 있어서 이미 실패한 사업이라는 주장이 일고 있다. 그래서 영어 마을 사업을 그만둬야 할 판에 거기다가 더해 수천억 원을 들여서 영어 도시까지 만든다는 것은 또 하나의 예산낭비고 우스꽝스런 헛꿈일 뿐이다."

▲ 지방자치단체가 만든 영어마을 누리집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울, 경기, 인천, 제주 영어마을)
ⓒ 김영조
그들은 또 말한다. "'영어의 두려움을 없애려면 재미있게 영어를 쓸 곳이 많아야 한다'라는 주장은 일반 국민에게는 영어가 현실에서 거의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꼭 영어가 필요하지도 않은 시민 모두에게 영어를 강요하기보다 영어 번역과 통역 전문가를 양성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집중 교육 지원을 하는 게 더 효과가 크고 얻는 게 많다."

그뿐만 아니라 단체들은 "현재 교육부가 초·중등학교 여섯 곳에서 실험 중인 영어 몰입 교육은 사실상 모국어 잊어버리기 운동이고,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영어 도시 만들기는 우리말을 짓밟고 우리 문화 정체성을 위협할 위험한 정책으로서 영어 식민지, 문화 식민지로 만들 것이다. 지나친 영어 사업 투자는 국민 경제와 국어 교육을 어렵게 만들고 영어 습득에도 피해를 줄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 성명서를 발표하는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이대로 공동대표
ⓒ 김영조
이어서 단체들은 "그렇지 않아도 지나친 영어 교육열에 우리 말글살이가 병들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영어에 투자하는 절반이라도 우리말을 바르게 쓰고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들여라. 모든 외국어와 학문을 잘 배우고 가르치는 데 모국어는 상위 언어이며, 우리 문화와 하나를 이루며 우리 얼을 담는 그릇이다"라며 "영어 도시 만들기 계획을 당장 철회하기를 강력하게 요구한다!"라고 외치고 있다.

대학생 때부터 40년을 한글운동에 몸 바쳐 온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이대로 공동대표는 "엄연히 우리말이 있고 우리 글자가 있는데도 대한민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영어 마을'을 만들고, '영어 거리'를 만들더니 이제 수천억 원을 들여서 '영어 도시'를 만든다고 한다. 멀지 않아서 '영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할 것 같다. 나는 이 꼴을 보면서 '영어에 미친 나라'가 아닌지 의심이 간다"며 격정을 토했다.

얼마 전 중국 연변대학교 김병민 총장은 특강에서 "만주족은 말에서 내리면서 이미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말'은 만주족이 타고 다니던 '말(馬)'을 뜻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말'인 언어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조선족이 조선말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중국 안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 특강을 하는 연변대 김병민 총장
ⓒ 김영조
연변조선족자치구는 간판에도 한글을 먼저 쓰고, 그 아래에 한자를 달고 있다. 그들은 또 호텔의 종업원과 시청의 민원실 직원들이 한복을 입고 근무하도록 한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조선족들은 이렇게 한국어와 민족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도 정작 제 나라에서는 한국어를 버리는데 혈안이 되어있음을 '07 다종언어 정보처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개탄했다.

북경의 북경공업대학 김준봉 교수는 중국 관련 책을 여러 권 낸 사람인데 중국에 유학을 꼭 오려거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제대로 공부하고 오라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한국인 유학생이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 것을 우습게 본다는 것이다.

한글운동가들은 말한다. "우리는 영어 배우기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모국어를 홀대하면서 영어에 몰입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잊어가면서 영어를 잘한다고 과연 외국인들이 우리를 인정할 것인가? 영어도 한국어의 확실한 토대 위에서 배우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또 그들은 "영어 교육의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나라를 걱정해서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들이 영어학원이 잘 되고, 책이 잘 팔리기를 노려서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라는 말도 한다.

▲ 중국 연길엔 모든 간판에 한글을 먼저 쓴 다음 한자를 쓴다.(한글로만 쓴 연길의 연변일보 간판, 그 위엔 "한국으로 전화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란 글도 보인다.)
ⓒ 김영조
한글단체들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앞으로 부산시와 인천시의 영어 관련 무모한 계획이 철회될 때까지 강력하게 투쟁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은 두 지방자치단체가 한글단체의 투쟁에 밀려서 후퇴하기 보다는 스스로 판단하여 옳은 결정을 내려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대자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영어마을, #영어도시, #부산시, #인천시, #한글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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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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