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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5일이었습니다. 황망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다름 아닌 형의 부고였습니다. 고 백무현 형님. 저명한 시사만평 작가로서 1988년 「평화신문」 창간과 함께 시사 만평을 연재하면서 이후 「언론노보」,「월간 말」,「대학신문」,「노동자신문」등 진보적 매체에서 만평을 그려 오셨지요.

백무현 화백의 부고를 알리는 추모 웹자보
 백무현 화백의 부고를 알리는 추모 웹자보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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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책으로는 8.15 해방부터 전두환, 노태우 구속까지 대한민국 현대사를 다룬 『만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전3권)와 친일 쿠데타 독재자인 박정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그린 2005년 작 『만화 박정희』(전2권), 그리고 전 5권의 『만화 김대중』과 마지막 유작이 된 『만화 노무현』까지 총 22권의 책을 낸 대표적인 우리 시대의 시사만화 작가였습니다.

'만인에게 친근했던' 형님, 백무현

그런 형님과 제가 처음 만난 때는 지난 2012년 11월 이었지요. 기억나세요? 형님. 그때 저는 서울특별시교육청 감사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고 책을 한 권 냈습니다. 2012년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것을 보고 '대한민국의 일정한 조건과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통령을 할 수 있지만 박근혜 만은 안된다.'며,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공무원증을 반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인 독재자 박정희에게 암살당한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으로 일하며 경험한 사실을 담은 책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을 출판했지요. 바로 그 책의 출판 기념회에 찾아온 형님과의 뜻밖 만남이 우리 인연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시사 만화가 백무현 화백께서 부족한 저의 행사에 찾아오셨으니 당시 얼마나 당황스럽고 또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저에게 형님은 대뜸 옆구리에 끼고 오신 한 꾸러미의 책을 내미셨지요. 그간 내가 내온 책들을 선물로 주고 싶다며 친필 사인까지 정성껏 하여 가져 오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형님과 저의 인연은 종종의 술자리와 이러 저러한 모임을 통해 계속 이어졌습니다. 소탈한 성격, 그리고 주변 사람을 많이 배려하는 은근한 미소. 그리고 '유명한 공인답지 않은' 약간의 겸연쩍음과 심하다 싶을 정도의 겸손함을 가진 형님을 볼 때마다 저는 빙그레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특별하게 기억나는 게 또 하나 있습니다. 생전 형님이 저를 부른 호칭입니다. 기억나세요? 흔히 주변 사람들은 저를 '고 반장'이라거나 조사관, 또는 보좌관이라고 부르는데 유족 형님만 저를 '고 박사'라 칭하셨지요.

박사는 고사하고 '석사 학위도 없는 저에게' 왜 형님은 그러했을까 궁금했는데 끝내 여쭤보지도 못한 채 그만 형님을 떠나 보냈습니다. 아마도 형님은 저에게 박사라는 최고의 극존칭을 불러주고 싶어서였겠지요.

그래요. 형님은 저뿐만 아니라 늘 주변 사람을 대함에 있어 최고로 예우했고 그렇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런 형님을 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역시 진심으로 좋아했고 함께하면 기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형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부족함이 많은 동생입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기억만 남았습니다. 형님.

문재인과 함께 정치 개혁을 꿈꿨던 백무현

그런 형님에게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억은 바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행한 형님의 '결단'이었습니다. 바로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맞아 '구태 청산을 위한' 출마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 불가론'을 외치며 탈당한 일단의 사람들이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자 형님은 그렇게 탈당한 현역 의원의 지역구에 출마를 결심했지요. 그리고 그때, 그 시작을 알리는 출판기념회를 준비하면서 제게 행사 사회를 봐달라며 어렵게 부탁 전화를 해오셨지요.

저로서는 영광스럽고 또 당연히 응할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때의 일은 오늘날 참으로 귀하고 값진 형님과의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또한 그것이 형님과 제가 가지게 될 많은 추억의 첫 시작이리라 여겼는데 지나고 보니 마지막 일이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2016년 1월 9일 전남 여수에서 개최된 백무현 화백 북 콘서트. 이날 기자는 사회를 봤다.
 2016년 1월 9일 전남 여수에서 개최된 백무현 화백 북 콘서트. 이날 기자는 사회를 봤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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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날 함께한 이들은 콘서트를 통해 형님의 진심을 알았고 그 진심이 귀한 결실로 맺어지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되리라 확신했습니다. 이를 위해 형님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훗날 개봉된 다큐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서 잘 드러나 있으니 어찌 모를까요.

그래서 형님이 떠나고 난 후 공개된 다큐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제 가슴을 내내 아프게 했습니다. 선거 운동이 시작된 후 종종 형님에게 응원과 지지를 겸한 문자를 보냈지요. 승리를 기원하며, 그리하여 다가올 대선에서 형님이 큰 역할을 하도록 응원하고 싶었으나 고작 그것 밖에 못하여 늘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비극이 형님을 노크하고 있음을 알게된 때 말입니다. 그 당시 너무 많이 살이 빠져 이상하다 싶었으나 별 일이야 있을까 싶었는데 그 비극이 끝내 형님의 전부를 삼킬 줄 누가 알았을까요.

백무현 후보, 위암 말기에도 끝까지 완주하다

때는 선거전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2016년 3월 말, 본격적인 선거 운동을 앞두고 별 생각없이 병원에 들렀다는 형님. 처음 나간 선거에서, 그리고 이를 위해 공천을 받는 과정에서 받게된 스트레스로 몸이 좀 힘들었나 싶었는데 결과는 너무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위암 말기 진단.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에 가장 놀란 이는 다름아닌 형님의 처남이셨지요. 형님을 수행하여 들른 병원에서 당사자가 아닌 처남에게만 그 결과를 알려줬고 처남은 고민 끝에 형님에게도, 그리고 누나에게도 이 사실을 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미 병이 깊어져 치료 시기도 놓친 상황에서, 그래서 할 수 있는 치유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그때, 처남은 울며 모진 마음을 먹었다고 훗날 술회했지요. 돌아갈 길이 없는 그때 매형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도전이라도 원없이 하고 가시는 것이 그나마 한이 없을 것 같다는 뜻이었지요.

그리고 이어진 선거 운동. 형님은 정말 후회없이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위암 말기의 몸으로 여수의 곳곳을 누비며 사람을 만나고 그 분들에게 왜 지금 정치 혁신이 필요한지에 대해 사자후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날로 체력은 떨어지고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 것입니다. 더욱 가파르게 몸은 야위어 갔고 병원을 찾는 시간도 더 빨라졌습니다. 정치 신인이 넘어야 할 벽은 한없이 높은데 유세조차 쉽지 않은 몸으로 어찌 가능할 일일까요.

하지만 형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몸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는 어렴풋하게 알았지만 자신과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지요. 특히 2016년 4월 11일, 막바지 선거 유세로 치닫던 그날 문재인 전 대표가 여수를 방문하여 형님과 합동 유세 하던 날 기억나시지요. 그날 형님은 문 전 대표와 함께 두 손을 치켜들며  당당한 승리를 약속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함께 환호하며 진심으로 승리를 기원했지요. 하지만 세상 일은 참으로 얄궂었습니다. 4월 13일, 형님은 한꺼번에 두 가지 슬픈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끝내 구태 정치의 벽을 무너뜨리는데 실패했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말기 암을 앓고 있다는 점. 바로 그 사연과 과정을 담은 다큐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가 훗날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이유였습니다.

형님이 남긴 마지막 카툰, '나는 산다'

방송을 통해 형님의 패배를 알게 된 후 저는 상심에 빠진 형님을 생각하며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지인에게 전화를 돌리던 그때, 저는 그제야 뒤늦게 형님의 병세 소식을 접했습니다. 무엇으로 그 충격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넉달 여가 지나가던 그 해 8월 15일. 한 통의 부고 소식이 제 휴대폰으로 전해졌습니다.

'고 반장. 백 화백이 소천하셨답니다.'

아. 그 슬픔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그래서 달려간 빈소에서 저는 형님의 영정을 보며 다시 또 울었습니다. 예의 그 환한 미소를 보며, 그리고 못 다한 형님의 열정과 꿈이 안타까워서 또 울었습니다. 더불어 원대하게 시작한 『만화 노무현』의 두 번째 책을 내지도 못한 채 떠난 형님을 생각하며 또 울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가까웠던 지인 분들과 앉아 형님의 빈소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침묵이 이어지던 때 저는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기무형문화재 제20호인 임웅수 형님께서 제게 전해 주신 사연 말입니다.

"고 반장. 내가 할 말이 있소. 사실은 얼마 전 백 화백이 내게 꼭 전할 말이 있다며 병원에 와달라고 하여 찾아 간 적이 있었소. 그런데 그때 여러 말 끝에 잠시 화장실을 간다며 병실을 비운 적이 있는데 그때 우연히 책상에 놓은 연습장을 보게 된 거요. 그 그림을 내가 잊을 수가 없소."

그림? 생전 화백으로, 그리고 시사만화가로서 일생을 그림만 그리며 살아온 형님이 남긴 마지막 그림이라니. 저는 도대체 무엇일까 싶어 그림을 볼 수 있냐며 채근했습니다. 그러자 임웅수 형님은 '마침 그때 내가 휴대폰으로 그 그림을 촬영했다'며 휴대폰을 꺼내 찾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해서 보게된 '형님의 마지막 그림'. 그리고 순간 전해진 전율. '살아야겠다는' 형님의 무섭고도 강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그림입니다.

백무현 화백이 남긴 마지막 카툰. 상단에 남긴 절규가 가슴 아팠다.

'나는 산다. 나는 잘 산다. 나는 오래 산다. 나는 폼나게 산다. 나는 건강하게 산다. 나는 영원히 산다.나는 빛나게 산다.'
 백무현 화백이 남긴 마지막 카툰. 상단에 남긴 절규가 가슴 아팠다. '나는 산다. 나는 잘 산다. 나는 오래 산다. 나는 폼나게 산다. 나는 건강하게 산다. 나는 영원히 산다.나는 빛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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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다. 나는 잘 산다. 나는 오래 산다. 나는 폼나게 산다. 나는 건강하게 산다. 나는 영원히 산다.나는 빛나게 산다.'

그랬습니다. 형님. 저는 형님의 1주기인 2017년 8월에 세상 사람들에게 꼭 형님의 이 그림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형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래서 위암 말기라는 병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는 형님의 굳은 의지를 꼭 확인시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형님이 '그림 상단에 남긴 글처럼' 형님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제 가슴에, 우리 가슴에 형님은 여전히 살아있는 '영원한 백무현'입니다. 사람사는 세상을 추구했고, 누구보다 겸손했으며, 누구보다 정직하게 세상을 바꾸려 했던 고 백무현 형님.

약속하겠습니다. 형님이 '굴리다 다 못 굴리고 가신' 그 덩이를 이제 우리가 굴리겠습니다. 그리하여 형님이 생각한 그 덩이보다 더 큰 덩이를 우리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더 건강하고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그 날까지 형님, 결코 잠들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갑시다.

형님. 백무현 형님.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행복하소서.

덧붙이는 글 | 백무현 화백의 첫번째 기일을 맞아 다음과 같은 추모식을 준비했습니다. 함께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8월 12일 (토) 오후 1시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산31-1번지 214호



태그:#백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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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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