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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화가.
ⓒ 조찬현

▲ 최병수 화가를 통해 다시 부활하는 고 이한열 열사.
ⓒ 조찬현
열불 나는 세상이 물속에 잠겼다
우리 아이가 익사했다
뜨거운 정열과 불타는 의지가 물속에 잠겼다
우리 아이는 대학 3학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다 그만
짐승의 발톱에 물려 죽었다
우리는 분노 한다
이 시대의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다

- 1987년 2월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의 '박종철' 습작시 일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데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군의 아버지는 울부짖었다. 23살 영원한 청년 박종철, 그의 죽음은 민주화 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고 이한열군은 박종철의 죽음 은폐에 온몸으로 저항하고자 길거리로 나왔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 직격탄이 그의 뒷머리에 꽂혀 길거리에서 쓰려졌다.

"뒷머리가 몹시 아프다,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이다"라는 말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사망한 그가 분노하던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의 대화였다.

그 해 6월 이한열

이한열 열사, 그는 1966년 8월 29일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1987년 7월 5일 새벽 2시 5분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87년 6월, 종철이와 한열이 두 청년의 죽음에 수많은 사람들은 피눈물로 항의하였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왔다.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군사독재 타도!"
"민주주의 쟁취!"

훗날 '6월 항쟁'이라 불리는 민주화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돌과 화염병을 들고 저지선을 넘었고, 전국의 거리는 민주화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또 1987년 6월 항쟁은 끝내 군사독재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민주주의를 위한 제단에 자신의 한 몸을 바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오롯이 복원하고 있는 화가가 있다. 민주화운동을 한 이한열 열사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여는 힘으로 되살려내기 위함이다.

걸개그림 만들어낸 '자기 멋대로 화가'

▲ 검은 스프레이가 뿌려진 이한열 영정에 대한 내용이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에 실렸다.
ⓒ 최병수
최병수(47), 화가이며 인권·평화·환경운동가인 그는 국내보다는 국제적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상징인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그려내, 걸개그림이라는 새로운 미술 장르를 만들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막노동판과 건설현장을 전전하던 그의 삶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1986년 여름 목수로 일할 때 홍대 미대에 다니는 초등학교 동창생의 부탁으로 벽화 그리는데 필요한 받침대를 만들었다.

최병수는 서울 정릉2동 집 담벼락에 '상생도'를 그리던 한 화가의 "너도 그려보라"는 말에 담벼락에 꽃 몇 개를 그려 넣었다. 그 일로 성북경찰서로 끌려가 취조를 받고, 형사가 직업난에 자기 멋대로 화가로 표기해 화가가 됐다.

통일과 민중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던 그는 1987년 6월 항쟁 때 걸개그림 화가로 나섰다. 당시 연세대 학생이던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던 모습을 신문에서 본 것이 계기였다.

그는 밤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목판에 조각해 천에다 찍어 리본을 만들었다. 그것을 본 한 여학생이 크게 그려 모든 사람이 함께 보게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그는 곧바로 높이 10m, 폭 7.5m의 걸개그림을 그려 학생회관 한쪽 벽면에 내걸었다.

이 때부터 걸개그림이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각종 대중 집회 현장에는 걸개그림이 등장했다.



그가 그린 이한열 영정에 1988년 9월 누군가 스프레이를 뿌려 훼손하고 사과탄을 터트렸다. 또 2004년 6월 10일에는 칼에 갈기갈기 찢긴 채 연세대 중앙도서관 뒤에서 발견됐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최씨는 자기 몸이 찢기는 듯 고통과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지난 17일 만난 최병수는 "올 추모제까지는 영정을 완성해야 한다"며 자기의 몸도 추스르지 않은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없는 그 어떤 힘이 압도한다. 이한열 영정을 대하는 순간 저절로 숙연해진다.

▲ 고 이한열 영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한열이를 살려내라'의 걸개그림 화가 최병수씨.
ⓒ 조찬현
지난 10일부터 그리기 시작한 영정은 이달 말께나 완성될 예정이다. 또 연세대에 보관 중이던 영정을 학생회 측에서 보내왔다며 그가 들어 보인 갈기갈기 찢긴 영정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 영정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전면 사진은 찍지 마세요. 이리 뒷모습만 봐도 끔찍한데…."

6월 행사에 사용할 다른 걸개그림 2점까지 함께 작업하는 그의 요즘은 예전 한창때보다 더 바쁘다. 현장을 뛰어다녔던 그의 버릇 때문에 앉아서 그리기보다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서서 그림을 그리는 그가 힘겹게 보인다. 수중에 돈 한 푼 없고 아직 미혼이라 챙겨줄 이 없는 그의 건강이 염려스럽다.

2004년 10월 1일 위암 수술을 받은 최병수는 수술 후 회복기에 밥 한 숟갈을 30여 분이나 꼭꼭 씹어 먹었다. 그렇게 음식을 먹으면 침샘에 항암성분이 분비돼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화가의 밥상... "항암 치료 받으면 일 못하지"

"항암 치료를 받았으면 일을 못하지. 항암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나보고 항암치료를 받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피골이 상접하더라고…. 그걸 보고는 도저히 못 받겠더라고. 친구를 통해 미국 측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항암치료를 해도 생존율이 5:5래, 항암치료가 권장사항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항암치료를 안 했지."

그의 밥상은 다시마·양배추·유기농 밥으로 단출하다.

"혀에 기준을 맞추지 않고 위에 기준을 맞춘 거지. 위암은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거여."

밥은 약콩이라 불리는 쥐눈이콩을 넣어지었다.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루 삼시세끼를 먹는 그는 작업을 할 때는 하루에 4번 조금씩 나눠 식사를 한다. 수술 후 쑥뜸과 식이요법을 병행하는 그의 건강은 회복이 빠른 편이다.

그는 이번 영정 작업이 끝나는 대로 환경운동을 위해 또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 다시마·양배추·유기농 밥으로 차린 단출한 밥상.
ⓒ 조찬현
▲ 툇마루에 놓인 나무를 깎아 만든 작품 '아늑한 풀잎 의자'.
ⓒ 조찬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뉴스에도 보냅니다.


태그:#고 박종철, #고 이한열, #영정, #최병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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