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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청소년 특별면 '너아니'에 실렸습니다. '너아니'는 청소년의 글을 가감없이 싣습니다... <편집자 말> [편집자말]
입구의 이정표.
 입구의 이정표.
ⓒ 권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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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이면 한국 전쟁을 기념하는 많은 행사와 기념식이 각종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남북의 이념 갈등과 이산가족의 고통이 여느 때보다 크게 부각되는 달이다.

한국 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과 상처를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하고, 한국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역사의 산 교육장인 '중앙동 40계단'은 우리 지역의 명소 탐방 목적에 가장 부합되는 곳이다.

한국사의 가장 아픈 기억이 가장 깊이 새겨진 부산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중앙동 40계단은 한국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 세대가 한번쯤은 꼭 찾아 봐야 할 장소이다.

모자상, '어머니의 마음' 조각상.
 모자상, '어머니의 마음' 조각상.
ⓒ 권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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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동이 진 아이.
 물동이 진 아이.
ⓒ 권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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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중구 중앙동 40계단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 중 헤어진 가족들의 상봉 장소였고, 피난살이의 애환을 상징하던 곳으로 10만이 넘는 피난민들에게는 가장 친근한 장소였다.

중앙동의 40계단은 오늘날의 영주동에서 옛 부산역과 국제여객부두를 왕래하는 편의를 위해 설치된 계단이다. 이 계단의 층수가 40개가 되어서 그렇게 불렸다. 이 계단은 8·15 광복 이후의 귀환 동포와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민들이 이 주위에 모여 살며 생계의 방편을 강구했고, 동광동과 영주동 판자촌으로 가려면 이 계단을 거쳐야만 했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이 계단 일대에서 흘러나온 구호물자를 팔아 구호품 장터를 방불케 했다. 그 뒤로는 암달라상들이 이곳에서 진을 치고 생계의 방법을 찾기도 했다.

소라계단.
 소라계단.
ⓒ 권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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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40계단 층층대에 기대 앉은 나그네……"라는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면서부터다. 그러했던 40계단은 주위의 주거지가 잠식하여 지난날에는 4m 가량의 폭이었는데 지금은 폭이 많이 줄어 옛 모습을 잃었다. 그래서 본래의 40계단에서 남쪽으로 25m쯤 떨어진 계단도 현재는 40계단이라 말하고 있다.

원래의 자리에서 떨어져 있는 계단에 1993년 8월 6일 가로 60㎝, 세로 180㎝, 폭 60㎝의'사십계단기념비'를 세우고 그 뒤쪽에 대중가요 <경상도 아가씨>의 노래 가사와 계단의 유래를 새겨 넣었다. 부산 중구청에서는 2003년 2월 12일 '40계단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아버지의 휴식.
 아버지의 휴식.
ⓒ 권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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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가치관과 의식주 등 생활 전반을 뒤흔든 가장 큰 상처였다. 전쟁의 화마에 떠밀려 피난처를 찾아 남으로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에게 40계단은 생존을 위해 오르내려야 했던 처절한 생존의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40계단 문화관광 테마거리가 조성되어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 세대에게는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오프닝 장면이나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것처럼 이야기 속의 흥미로운 장소로만 여겨질 수도 있다.

당시의 생활상을 재현한 테마거리 곳곳의 조형물들은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남은 음식을 재활용한 꿀꿀이죽과 강냉이 죽 사진, 전란 속 학구열을 보여주는 천막 학교 사진, 지게꾼 아버지가 힘든 노동에 지쳐 잠시 쉬고 있는 모습의 조형물, 물자가 귀한 전란 중에 어린 나이에 40계단을 올라 매일같이 물을 길어 나르던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 거리의 악사가 피난살이 설음을 달래주던 아코디언 조형물 등은 우리 세대에겐 다소 생소한 장면이다. 어쩌면 지금으로선 상상하기조차 힘든 당시의 생활상이 재현된 조각상은 단순히 기념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 정도로만 인식될지도 모른다.

40계단의 전경.
 40계단의 전경.
ⓒ 권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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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계단 기념관 건립 취지문에 이런 글귀가 있다.

'이제 여기 피난민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피난 시절의 상징 '40계단'을 통해 처절하고 암울했던 시절, 그러나 결코 꿈과 희망을 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훨씬 더 좋은 옷을 입고, 훨씬 더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들보다 덜 행복해하고 더 작은 꿈을 키우며 사는 우리들의 어깨를 힘주어 잡아주고 싶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치열한 생존 경쟁을 통해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은 우리나라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과연 물질적 풍요가 우리사회가 추구하는 전부인지 의문이 생긴다.

물질의 풍요 속에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할 역사와 인간성을 떠올리고 싶을 때 가벼운 걸음으로 한번쯤 발걸음을 옮겨 중앙동 '40계단'을 올라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계단을 치열하게 걸었던 사람들의 발자취는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라고.

피난의 아픔을 낭만으로 승화하는 거리의 악사.
 피난의 아픔을 낭만으로 승화하는 거리의 악사.
ⓒ 권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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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아가씨 -박재홍 (1951년)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시원히 말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서러 동정하는 판자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우는 이북고향 언제 가려나
고향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장사 하더 래도 살아 보세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 구나
그래도 뼈에 매친 내 고장이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영도다리 난간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얘기 들려 주세요
복사꽃이 피든 날 밤 옷소매를 끌어 잡는
경상도 아가씨가 서러워서 우는 구나
그래도 잊지 못할 가고 싶은 이북고향 언제 가려나

덧붙이는 글 | 권은송 기자는 부일외국어고등학교 2학년 1반 학생입니다.



태그:#40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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