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던보이> 포스터

영화 <모던보이> 포스터 ⓒ CJ ENM

 
2008년 정지우 감독의 영화 <모던 보이>가 개봉되었다. 주인공은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박해일 분), 영화의 배경은 경성의 비밀구락부다. 이해명은 그곳의 댄서였던 조난실(김혜수 분)에게 매료되어 그가 살아왔던 안온한 식민지 관리의 삶에서 이탈한다. 

<모던 보이> 이전의 작품에서 일제 식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아마도 1979년부터 1987년, 2004년까지 세 번에 걸쳐 방영된 드라마 <토지>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토속적인 지역의 터전을 배경으로 지주와 식민지 관리, 가난한 백성의 질곡의 역사를 그린 콘텐츠가 우리에게 더 익숙했다.

그런데 <모던보이> 속 일제 강점기 경성은 다른 모습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화신 백화점에, 가로등 불빛이 화려했던 종로, 거기에 커피와 위스키를 파는 다방과 바(BAR)가 묘사된다. 심지어 서양 댄스홀까지. 왕조시대 조선을 탈피한 '모던'과 '식민'의 아이러니한 조합과 그로 인한 비극, 그 속에 시대의 젊은이들이 휩쓸리는 장면들이 등장했다. 식민지 시대가 무색하게 화려했던 경성의 모습은 이후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그중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작품이라면, 역시 전지현이 1인 2역으로 등장했던 영화 <암살>이 아니었을까. "1933년 조국은 사라지고 작전은 시작된다." 부러진 안경다리를 묶은 채 총구를 겨누던 만주의 독립군 안옥윤(전지현 분)은 자신으로 오인받고 죽은 쌍둥이 동생 마츠코가 되어 암살 작전을 펼친다. 친일 부역자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강인국과 일본 총독,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려는 독립군들의 치열한 액션 신 속에서 경성의 풍경은 더욱 극적으로 대비된다. 최동훈 감독의 맛깔난 이야기와 박진감 넘치는 영상으로 인기를 끌었던 일제 강점기 소재는 다음 해 김지운 감독의 <밀정>으로 다시 한번 인기를 재확인한다.
 
 영화 <암살> 스틸 이미지

영화 <암살> 스틸 이미지 ⓒ (주)쇼박스

 
드라마로 돌아온 모던 경성 

이렇게 화려하게 등장한 모던 경성은 이후 드라마로 그 입지를 넓혀간다. 그중에서도 김은숙 작가의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가장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작품이 아닐까.

도망 노비였던 어린 소년이 유진 초이가 되어 경성으로 돌아온다. 미군이 된 그는 일본 유학생 김희성(변요한 분), 호텔 글로리의 사장 쿠도 히나(김민정 분), 조선 독립군 고애신(김태리 분)과 각각 대립한다. 드라마 속 배경은 그야말로 한국과 미국, 일본 각국의 이해에 독립과 친일, 모던과 전통이 엇물리는 혼돈의 장이었다.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역사가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였을까. 이후 모던 경성과 식민의 조합은 '클리셰'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 관한 책을 읽으며 가장 신기했던 부분은 당시 경성에서는 이미 냉면과 설렁탕을 사람들이 즐겨 먹었다는 사실이었다(<라이더, 경성을 누비다> 김기철, 시공사). 심지어 냉면과 설렁탕을 몇 그릇씩 쌓아서 배달하는 능력자가 각광받았다고 한다. 그런 경성의 먹거리는 tvN 드라마 <구미호뎐 1938>에도 등장했다. 본의 아니게 1938년 경성으로 가게 된 구미호 이연(이동욱 분)은 즐기던 냉면을 먹으러 가고, 그의 오른팔이던 구신주(황희 분)는 냉면 배달부가 된다는 설정이었다.

또한 경성 최고급 요릿집 묘연각의 류홍주(김소연 분)도 등장한다. 이들은 식민의 떡고물을 즐기는 인물인 듯 하지만, 자신이 아끼는 이들을 일본이 건드린다면 돌변해서 그들의 목에 거침없이 칼을 들이대는 양가적인 인물들이다.

지난해 12월 22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경성 크리처>에서는 남자 주인공 강태상(박서준 분)이 바로 그런 역할을 맡는다. 그는 경성 최고의 전당포 금옥당의 대주주이자 능란한 처세술로 경성을 주무르는 북촌 최고의 자산가로 등장한다. 그는 이시카와 경무관의 애첩을 찾으라는 협박을 시작으로 옹성병원 속에 가려진 음모를 파헤치며 정의로운 인물로 거듭나게 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의 주인공 이윤(김남길 분)은 노비 출신으로 일본군이 되지만, 강압적인 토벌 작전 속에 억울하게 숨져간 백성들로 인해 각성하고 정의의 도적으로 거듭난다. 그런가 하면, <미스터 선샤인> 속 유진 초이 역시 미국 군인이었지만 조선의 현실과 그 현실에 뛰어든 고애신을 비롯한 이들의 헌신을 보며 결국 자신을 독립운동에 내던지게 된다. <경성 크리처> <도적> <미스터 선샤인> <구미호뎐 1938> 모두 남자 주인공의 각성이 이야기의 주된 얼개가 된다. 

그런가 하면 <구미호뎐 1938> 속 재력가 집안의 딸이지만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이는 선우은호(김용지 분)는 <암살> 속 안윤옥이나 <미스터 선샤인>의 쌍둥이와 같다. 배경은 다르지만 <도적> 속 남희신(서현 분)도 철도국 과장이라는 직책과 달리 독립군에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철도 부설 자금을 탈취하는 독립운동가이다.

<경성 크리처> 여주인공 윤채옥(한소희 분)은 10년 전 사라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동북아 전체를 헤집고 다니는 인물이다.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채옥과 그의 아버지는 그동안 위안부로 잡혀가거나, 강제 징집된 이들을 구출했던 듯하다. 이들 작품 속 여자 주인공들은 경계선에 선 채 고뇌하는 남자 주인공들과 달리, 실천에 있어 한 발 앞서 나간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들은 무기를 드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적에 맞서 싸움에 거침이 없다. 

가장 악랄한, 하지만 편리한 악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경성 크리처> 포스터 이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경성 크리처> 포스터 이미지 ⓒ 넷플릭스

 
최근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은 사실 어두운 모습보다는 화려한 경성을 보여주면서 접근성의 장벽을 낮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드라마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강고한 반일의 정서에 있다. 드라마들은 그래서 가장 악한 존재로 일본을 그리는 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다양한 방식의 악을 구현하는 데 애쓴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화제가 되었던 인물은 모리 타카시였다. 배우 김남희가 이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것처럼, 드라마에서 모리 타카시는 일본 귀족 집안의 장남으로 노비 출신의 유진과 미국에서부터 대결 아닌 대결을 펼치는 인물이다. 그는 미천한 유진에게 끊임없이 우월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만 이는 역으로 그의 열등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이런 모리 타카시의 인간적 약점은 극 중 비열한 일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장치로 작용한다.

<구미호뎐 1938>에서 거악 가토 류헤이(하도권 분)는 총독부 경무국장이지만 사실 자신의 아내도 거침없이 살해하는 노회한 일본 요괴 텐구이다. 그리고 그의 수하로 갖가지 일본 요괴들이 등장한다. 이에 조선 산신들은 힘을 합쳐 일본 요괴에 대항한다.

이미 <구미호뎐 1938>에서 언급되었던 일본의 생체 실험은 <경성 크리처>에서 주된 소재가 된다. 드라마는 식민지 백성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을 하고 그들을 처리하는 일제의 모습을 오프닝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경성 옹성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731 부대는 나진으로부터 '크리처'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경성 크리처> 방영 이후, 새삼스럽게 731 부대의 잔혹한 생체실험이 일본에서도 재조명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드라마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상상력을 덧대어 악의 연대기를 다시 써나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소련과 히틀러가 없었다면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지금처럼 흥할 수 있었을까'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 드라마에서 일제 강점기는 가장 극적인 '클리셰'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경성 크리처>에 대한 반응이 호불호로 극명하게 나뉘고 있다. 이제는 '클리셰'의 발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이다.
경성크리처 미스터선샤인 구미호뎐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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