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6 07:09최종 업데이트 23.12.06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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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다리가 풀리고 눈물이 났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분노의 욕설을 가까스로 참았다고 했지만, 나는 영화 내내 얻어맞은 듯 아팠다. 역사가 뒤틀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군사독재 시절. 그 한가운데를 건너온 나의 삶도 상처가 없지 않다. 영화 <서울의 봄>은 광주학살, 6월 항쟁, 1991년 5월 분신 정국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잘못된 역사의 첫 단추가 끼워지는 이야기다.

말로만 들어왔던 군사 반란이 스크린 속에서 전개되는 모습은, 깊숙이 숨겨져 있던 암 덩어리의 실체를 보는 것만 같다. 이런 음모와 정권 찬탈이 30여 년의 역사를 암흑으로 몰아넣었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전두광은 군사반란을 주저하는 하나회 군인들에게, 이미 한 배를 탄 운명과 반란 성공 이후의 대가를 수시로 주지시킨다. 성공하지 못하면 모두가 모가지가 댕강 달아날 일이라는 것 알았다. 그래서 나라의 운명이나 역사의 정의보다, 반란 성공에 더 악착같이 힘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대통령이나 국방부 장관 등 국가 수뇌부는 무능했다. 몇 번이나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건 반란군의 '악착'에 맞설 만한 의지와 능력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군인의 분투'가 영화의 교훈은 아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컷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군사 반란은 성공했다. 영화에서는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이 홀로 바리케이드를 넘어 연행되는 장면으로 진압 실패를 암시한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을 오롯이 담았겠느냐는 의문도 있다.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서울의 봄> 이태신 역의 모티브)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병력철수 지시를 그대로 이행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화에서 봐야 할 건 군사반란 세력에 맞서는 참군인의 분투가 아니라, 군사반란 세력의 음모와 대통령 이하 집권자들의 무능함이다.

'성공하면 혁명'이라는 영화 속 전두광의 궤변은, 1995년 서울지검 공안부 장윤석 검사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두둔되기도 했다. 전두환은 2021년 자연사했다. 백담사 3년의 은둔과 짧은 수형생활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군사반란, 광주학살 등의 죗값을 치렀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군사 반란에 직접 가담했던 군인들은 국회의원, 장관 등으로 승승장구했고 지금도 누구 하나 고개 숙이지 않는다. 분노가 영화 <서울의 봄>을 감상하고 난 감정으로만 남아선 안되는 이유는, 살아있는 그들에게 12.12 군사반란은 '성공한 혁명'이 아닌 '실패한 반역'임을 각인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역사에서 배울 점이 생긴다.

"느그집 개도 내가 간첩으로 만들 수 있다고!"

집에 키우는 개도 간첩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전두광의 엄포는 역사적 사실로 남아있다. 전두환이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이후 숱한 사람들에게 간첩의 올가미가 씌워졌다. 1980년 광주 항쟁에서 무장 시민들은 북에서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로 덧칠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영화 <남영동 1985>은 김근태 민주당 의원의 고문을 다룬 영화다. 빨갱이를 축출해낸다는 명목으로 22일간 상상하기 힘든 고문이 가해졌다. 영화를 본 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극장이 찢어질 듯한 신음과 절규는 아직도 생생하다. 전두환의 뒤를 이은 노태우 정권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1991년 5월, 나의 친구는 분신 배후의 고문을 받다가, 결국 이적단체 구성원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정말로 기르던 개도 간첩으로 만들 수 있던 시대였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반란군이 군사 반란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무기나 병력의 규모가 아니라 '정보력', 나아가 누가 자기의 편인 줄 모르는 사조직 하나회의 운용 덕분이었다. 영화 속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은 "대한민국 육군은 다 같은 편입니다"라고 일갈했지만 전두광에게는 비웃음만 살 충고였던 셈이다.

계급이나 소속에 무관하게 그들은 형님과 아우가 되었고 하나회에 속하지 않았던 군인들은 그들에게 반란을 가로막는 적이었다. 전두광이 사령관으로 있었던 보안사령부는 도청으로 훤히 진압군의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조차 뒷배경이 되어주지 못한 진압군에게 패배는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회 사조직과 윤석열 사단은 닮았다
 

2019년 7월 25일,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많은 사람들이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검찰독재라고 일컬어지는 2023년의 윤석열 정부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편에선 그런 도식적 대비야말로 경계를 해야 될 지점이라고도 반론하기도 한다. 맞다. 총칼로 정권을 찬탈한 군사 반란과 국민의 투표로 뽑힌 정권의 정당성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조직과 무소불위의 정보력을 가졌던 전두광과, 검찰조직의 막강한 정보력과 사법 수단을 이용해 권력을 사유화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 닮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윤석열 사단 : 윤석열의 검찰 시절 측근(검사/수사관)으로 구성된 인재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검찰은 물론 대통령비서실, 정부부처, 경찰, 금융감독원, 국가정보원 등의 주요 권력기관의 요직을 차지하며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부상했다.'

온라인 백과사전 '나무위키'에 나오는 윤석열 사단의 정의다.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검찰국가·검찰 천하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지난 대선에서부터 나왔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권력기관 곳곳에 검찰 출신들이 득세하고, 검찰이 윤석열 대통령 일가의 변호 집단이 되었다는 탄식도 넘쳐난다. 삼권 분립이나 권력 집단의 상호 견제 기능도 무용지물이 됐다.

전두환을 도와 군사반란을 성공시킨 하나회, 그리고 21대 총선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을 돕기 위해 당시 야당에 고발을 사주했다는 의혹으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손준성 검사. 군인과 검찰이 국가보다는 개인을 우선했다는 것이 닮았다. 그 대가로 장관·국회의원이 되었던 하나회 군인들이나, 승진과 요직을 차지하는 윤석열 사단도 닮았다.

"마침내 신군부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삼켰다."

영화의 엔딩 자막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마침내 검찰이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삼켰다'로 읽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2023년은 윤석열 정부 2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나 역사는 쉽사리 반복되지 않는다. "내 눈앞에서… 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 대한민국은 이태신 수도경비 사령관이 절규하던 그때가 아니다.

영화를 본 막내딸이 울었다고 했다. 전두광, 아니 전두환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줬다. 이 아빠는 그런 군사독재에 맞서 돌도 던지며 싸워 왔다고 자랑도 했다. 민주주의는 향유하기 전에 지켜야 한다는 걸 고등학생 딸아이에게 오래오래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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