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47·러시아)가 길고 길었던 격투기 무대를 떠난다. 2000년 링스를 통해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23년을 달려왔는데 나이로 인한 육체적 한계를 실감하고 화려했던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두 차례나 은퇴를 선언했다가 돌아온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40대 후반의 나이를 감안했을 때 더이상의 컴백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표도르는 지난 5일 미국 잉글우드 기아포럼에서 있었던 미국종합격투기 벨라토르290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라이언 베이더(40·미국)에게 1라운드 2분 33초 만에 TKO로 무너졌다. 파이터 인생 마지막 경기였음을 감안했을 때 멋지게 승리를 거둬 챔피언 벨트를 안고 은퇴하는 그림이 최고의 시나리오였겠지만 예전의 신체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표도르는 더 이상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의 황제가 아니었다.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상대 베이더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 승부만이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에 대한 예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무한 패배였지만 표도르도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경기 직후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환한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이었다.
 
 '얼음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

'얼음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 ⓒ 스트라이크포스

 
표도르는 종합격투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히는 전설 중의 전설이다. 23년의 세월 동안 통산 40승 7패 1무효의 전적을 기록했는데 판정승이 불과 9번(23%)에 불과할 정도로 늘 화끈한 승부를 추구해왔다. 한창 신체능력이 왕성하던 2009년까지의 그는 황제라는 별명에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파이터였다.

코사카 츠요시에게 당한 다소 억울한 닥터스톱 경기를 제외하고는 순수한 승부에서는 단 한 차례도 지지 않는 괴력을 발휘하며 전 세계 모든 파이터들의 우상으로 군림해왔다. '축구에 펠레, 농구에 조던이 있다면 격투계에는 표도르가 있다'는 말이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표도르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는 이른바 '트래시 토크'를 하지 않고도 인기나 명성을 얻었다는 부분이다. 언젠가부터 격투 무대에서는 자신을 알리고 흥미를 증폭시키고자 거침없이 상대를 도발하는 독설 전쟁이 당연시되고 있다. 때론 그러한 과정에서 개인의 사생활이나 가족을 언급하는 등 선을 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표도르는 달랐다. 구태여 경기력 외의 부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과묵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어찌 보면 재미없게까지 느껴지는 선수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캐릭터가 약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링 밖에서는 묵묵한 러시아 남자였지만, 링에만 올라가면 파이팅 넘치는 최고의 터프가이였기 때문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내려다보며 파운딩을 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얼음황제'라는 별명이 딱 들어맞는다.
 
무엇을 상상하고 나와도 한 수 더 내다봤던 '격투 도사'
 
표도르는 헤비급 최초 올라운드 파이터로 평가받고 있다. 헤비급치고는 작은 체격에 타격, 그래플링 포지션 싸움, 서브미션 등 하나씩 놓고 보면 최고라 할 수 없지만, 이른바 상대의 취약점을 노린 '맞춤형 공략법'을 들고 나와 기가 막히게 수행해 내면서 지켜보는 이들이 절로 탄성을 내지르게 했다.

방식 또한 혁신적이었다. 타격가를 테이크다운 시킨다던가 그래플러에게 거리를 두고 타격전을 벌이는 일반적인 방법을 뛰어넘어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당황시키기 일쑤였다. 타격가에게는 그래플링의 위협을 주면서 타격으로 맞불을 놓았고, 그래플러에게는 타격전 양상으로 경기를 끌어나가다 리듬을 깨뜨리며 상위포지션을 점하기도 했다.

표도르가 당시 기준으로도 작은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헤비급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다른 운동능력의 영향이 컸다. 근육질도 아닌 배가 살짝 나온 체형으로 어찌보면 둔하게까지 보이지만 경기장에서의 그는 외모와는 사뭇 달랐다. 헤비급 파이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스피드와 엄청난 반사 신경을 자랑했다.

빠르게 상대 품으로 파고들어 핸드 스피드를 앞세워 양훅을 휘두르고, 상체 클린치를 잡으면 유도식 테이크다운으로 중심을 무너뜨렸다. 풀스윙으로 큰 궤적을 그리며 휘두르는 이른바 '얼음 파운딩'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들어가던 '리버스 암바'는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표도르를 높게 평가할 만한 것 중 하나는 굉장히 공격적인 파이터였다는 점이다. 전략적으로 풀어나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링 중앙을 선점하고 상대의 장점과 스타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초반부터 '돌격모드'로 들어갔다. 팬들 사이에서 '닥공(닥치고 공격)', '닥돌(닥치고 돌진)'로 불리는 이유다.

한창때 표도르는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데도 능했지만 허를 찔러 강점을 무너뜨리는 전술도 종종 구사했다. 어느 누구도 엉키는 것을 기피했던 '강력한 주짓떼로'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의 가드로 스스로 들어가 얼음 파운딩을 날리는가하면, 전율의 타격가 미르코 크로캅에게 초반 타격으로 맞불을 놓으며 보는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무엇을 예상하고 나와도 한 수 앞을 더 내다보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격투 도사가 따로 없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얼음황제 마지막황제 러시아 삼보파이터 에밀리아넨코표도르 효도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 디지털김제시대 취재기자 / 전) 데일리안 객원기자 / 전) 홀로스 객원기자 / 전) 올레 객원기자 / 전) 이코노비 객원기자 / 농구카툰 크블매니아, 야구카툰 야매카툰 스토리 / 점프볼 '김종수의 농구人터뷰' 연재중 / 점프볼 객원기자 / 시사저널 스포츠칼럼니스트 / 직업: 인쇄디자인 사무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