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실책에 아쉬워하는 김연경 20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핑크 스파이더스와 GS칼텍스 KIXX 배구단의 경기. 5세트 흥국생명 김연경이 동료 실책에 아쉬워하고 있다.

▲ 동료 실책에 아쉬워하는 김연경 20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핑크 스파이더스와 GS칼텍스 KIXX 배구단의 경기. 5세트 흥국생명 김연경이 동료 실책에 아쉬워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이 대혼란에 빠졌다. 감독과 단장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하루아침에 경질되고, 기껏 영입하려던 새 감독은 부담을 느껴 감독직을 번복하고 고사하면서 사령탑이 공석이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에 구단의 어설픈 변명은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불러일으키면서 배구계와 팬들이 더욱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 모든 소란이 팀을 스스로 흔든 흥국생명 구단의 '자책골'이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남을 초유의 사태다.

시작은 지난 2일 흥국생명이 권순찬 감독과 경질을 공식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권순찬 감독은 지난 시즌 6위에 머물렀던 흥국생명을 2위로 올려놓았고, 지난해 마지막 경기에서는 '선두' 현대건설까지 격파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또한 김여일 단장 역시 권 감독과 동시에 물러났다.

흥국생명은 권 감독과 구단간에 서로 추구하는 방향성이 맞지 않아서 결별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권 감독의 갑작스러운 경질에 황당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에 권 감독은 경질 이후 선수단 운용을 둘러싸며 "윗선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며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졌다.

선수단도 큰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졌다. 특히 흥국생명과 한국배구를 대표하는 간판스타인 '배구여제' 김연경은 지난 5일 한 인터뷰에서 "회사의 말을 잘 듣는 감독님을 선호하고 있다는 거나 다름 없지 않나? '이런 팀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놀라운 상황"이라며 이례적으로 소속팀을 직격했다. 또한 일부 팬들은 구단의 결정에 반발하며 모기업 앞에서 트럭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흥국생명은 지난 5일 신용준 신임 단장을 내세워 언론 인터뷰를 통하여 최근의 사태에 대한 해명에 나서며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 단장의 앞뒤가 맞지않는 해명은 여론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역풍을 불러왔다.

신 단장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권순찬 전 감독과 김여일 전 단장의 이견차로 규정하며 회사 차원의 문제와는 거리를 뒀다. 또한 신 단장은 전임 감독과 단장 사이에서 이견과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그것이 "선수단 운영에 대한 개입이나 감독 권한에 대한 침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모순된 입장을 드러냈다.

신 단장은 앞으로 신임 감독과 원활한 '소통'을 강조했지만 "우승을 위해서는 감독과 단장간 그런 상의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언제든 이런 사태가 재발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신 단장의 해명과 달리 권순찬 감독의 경질이 김여일 단장과의 갈등이라기보다는, 모기업 수뇌부에서 문자를 보내 특정 선수 기용에 관여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순찬 감독이 말을 듣지 않자 결국 지휘봉을 빼앗은 것이다.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흥국생명은 지난 6일 김기중 신임 감독을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김 감독은 구단의 감독 선임 발표 이후에도 배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10일에는 김 감독이 심사 숙고 끝에 최종적으로 감독직을 고사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는 또다른 놀라운 소식이 밝혀졌다.

김기중 감독은 구단을 통해 "배구계 안팎에서 신뢰를 받아도 어려운 자리가 감독직이다.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현 상황이 부담이다. 지금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이 그동안 노력해 준 선수단과 배구 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고사 사유를 전한 것으로 밝혔다. 김 감독이 명분없는 감독교체를 둘러싼 세간의 비판적 여론과, 선수단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분위기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해석된다.

흥국생명은 권순찬 전 감독이 사퇴한 이후 임시로 지휘봉을 잡았던 이영수 감독대행마저 한 경기 만에 사퇴했다. 불과 열흘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지도자 세 명이 흥국생명의 미숙한 구단운영 때문에 한꺼번에 희생양이 된 셈이다. 흥국생명은 11일 현대건설전에서는 김대경 코치가 감독대행의 대행으로 선수단을 이끌게 됐다.

결국 흥국생명은 10일 재차 사과문을 통해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흥국생명은 "팬들께 심려를 드리게 된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에게도 머리 숙여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이어 "배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경기운영 개입이라는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된 결과로써 결코 용납될 수도 없고, 되풀이 되어서도 안 될 일이 분명하다. 앞으로 경기운영에 대한 구단의 개입을 철저히 봉쇄하고 감독의 고유 권한을 전적으로 존중할 것"이라고 사과했다. 불과 5일 전 신 단장의 입장과 달리, 이 사태의 본질이 '구단의 잘못된 개입'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게 가장 달라진 부분이다.

하지만 이미 스텝이 꼬일대로 꼬여버린 흥국생명이 구단 정상화를 위해서는 갈 길이 멀어보인다. 흥국생명은 선수와 팬들에게는 마지못해 사과했지만, 정작 이 사태가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권순찬 감독에 대한 사과는 언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흥국생명은 이번 사태로 배구계에 감독의 지위와 전문성을 인정하지않는 구단이라는 이미지가 박혔다. 흥국생명은 과거에도 고 황현주 감독을 지금의 권순찬 감독과 비슷한 사유로 두 번이나 경질한 전례가 있는데다, 여자배구단을 통틀어 가장 감독교체가 잦았고 평균 임기가 짧은 구단으로 악명이 높다. 최근에 또다시 감독교체를 둘러싼 잇단 혼란을 지켜보면서 과연 흥국생명 감독직 제안이 온다고 해도 수락할만한 명장급 인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또한 구단의 간판스타인 김연경과 흥국생명의 관계에 이번 사태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되고 있다. 김연경과 흥국생명의 인연은 '애증'으로 요약된다. 김연경은 국내에서 뛰는 동안에는 흥국생명 한 팀의 유니폼만을 입고 뛰었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우승주역이었지만, 해외 진출 당시 FA 자격 취득여부를 놓고 법정 공방까지 벌였고, 지난해 2기때는 이다영-이재영 자매와의 불화설과 학교폭력 논란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던 만큼 마냥 원만했던 사이는 아니었다.

김연경은 올시즌이 끝나면 드디어 FA 자격을 얻는다. 국내 복귀 후 흥국생명에서 보낸 두 시즌 연속 사건사고에 휘말리며 김연경의 우승도전에 방해만 된 구단에 대하여, 선수의 감정의 호의적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구단이 권 감독을 경질한 데는 유망주 기용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단이 올해 우승보다도 세대교체와 리빌딩을 원한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베테랑인 김연경이 커리어를 희생해가면서 굳이 흥국생명 잔류를 선택해야할 명분은 더 줄어든 셈이다. 오히려 팬들이 김연경의 FA 이적을 소원하는 반응도 나올 정도다.

만일 흥국생명이 올해 우승을 놓치고 설상가상 김연경마저 FA로 이적하는 사태라도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많은 팬들이 흥국생명을 응원했던 이유는, 구단에 대한 호감이라기보다는 김연경같은 선수 개개인에 대한 지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김연경을 지키지 못한다면 가뜩이나 등돌린 팬심이 더더욱 흥국생명을 응원해야할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흥국생명으로는 그야말로 이번 사태가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나비효과가 될 수도 있다.

흥국생명은 감독의 존재를 쉽게 여기며 '방향성'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구단이 내세운 그 방향성 때문에 오히려 당장 팀이 지금 방향을 잃고 표류할 위기에 놓였다. 이제는 구단주가 직접 나서서 사과하고 이 사태를 수습할 구체적인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는 이상, 망가진 구단 이미지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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