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 참석한 벤투 감독과 정우영 2022 카타르 월드컵 대표팀 파울루 벤투 감독과 정우영이 23일(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카타르 내셔널 컨벤션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기자회견 참석한 벤투 감독과 정우영 2022 카타르 월드컵 대표팀 파울루 벤투 감독과 정우영이 23일(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카타르 내셔널 컨벤션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더 뜨겁게, the Reds(더 레즈)' 2022 FIFA(국제축구연맹) 카타르 월드컵에 도전하는 한국 축구의 응원 슬로건이다. 한국축구가 11번째로 나서는 이번 월드컵 무대에서 새로운 기적을 꿈꾼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은 11월 24일 오후 10시(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우루과이를 상대로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H조 1차전을 치른다.
 
'아시아의 호랑이'를 자부하는 한국축구는 1954년 스위스 대회에서 처음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32년 뒤인 1986년 멕시코 대회부터 다시 월드컵에 복귀했고 이번 카타르 대회까지 어느덧 10회 연속 본선행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하지만 조별리그의 관문을 넘은 것은 단 2차례뿐이었다. 한국은 개최국 자격으로 출전했던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며 역대 아시아 국가의 월드컵 최고 성적인 4강진출의 신화를 작성했다. 2010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에서 허정무호가 사상 첫 원정 대회 16강 진출에 성공하며 또다른 역사를 썼다.

최근 지난 두 번의 대회는 한국축구에 아쉬움을 남겼다. 2014년 브라질과 2018 러시아 대회에서 한국은 모두 조별리그의 벽을 넘지 못 했다. 이미 지역예선부터 부진한 경기력으로 감독이 연이어 교체되는 시행착오를 겪었고, 각종 논란까지 겹치며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난 대회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디펜딩챔피언이자 영원한 우승후보 독일을 제압하는 '카잔의 기적'을 연출하며 한국축구의 저력도 보여줬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에서 맞이하는 대회다. 포르투갈 출신의 벤투 감독은 2018년 8월 23일, 한국 축구대표팀의 사령탑으로 정식 선임됐다. 그리고 우루과이와의 월드컵 1차전이 열리는 2022년 11월 24일은 그가 지휘봉을 잡은 지 1556일째가 되는 날이다. 벤투 감독은 4년 3개월간 대표팀을 이끌며 종전 울리 슈틸리케(독일) 감독이 보유한 995일(2014년 9월 24일∼2017년 6월 15일)을 뛰어넘어 '한국축구 역사상 최장수 감독' 기록을 세웠다.
 
4년 주기로 열리는 월드컵에서 한국축구가 직전 월드컵 이후 새롭게 선임한 감독이 단 한 번도 교체 없이 예선과 본선을 완주하는 것은 벤투가 사상 최초다. 벤투 이전에 월드컵 예선과 본선을 모두 소화한 감독은 2010년의 허정무(2년 7개월) 감독이었고, 당시 한국은 원정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대표팀에 잦은 감독교체 없는 안정감과 연속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기간 벤투호는 53경기를 치러 34승(12무 7패)을 거두며 승률 64%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을 졸여야 했던 지난 두 번의 대회와는 달리, 오랜만에 지역예선을 압도적인 성적으로 조기 통과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월드클래스'로 성장한 주장이자 에이스 손흥민(토트넘)을 필두로 김민재(나폴리), 황인범(올림피아코스), 이재성(마인츠), 황의조(노팅엄 포레스트) 등이 포진한 선수구성은 역대 최고수준으로 꼽힌다.
 
또한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면서 한국축구가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점유율축구(빌드업축구)'라는 새로운 무기다. 강한 압박과 체력, 수비, 측면을 활용한 스피디한 킥앤 러시 등을 트레이드마크로 하던 기존의 한국축구는, 벤투 감독이 부임하면서 후방부터 짧은 패스를 통하여 능동적으로 경기를 지배하는 것을 추구하는 유럽식 점유율 축구를 통하여 새로운 색깔을 추구해왔다.
 
벤투 감독은 4년간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일관되게 자신의 점유율축구 철학을 유지했다. 벤투호의 높은 승률과 아시아 최종예선에서의 압도적인 모습을 통하여 한국축구도 빌드업을 통하여 지배하는 축구가 가능하다는 색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하지만 한일전 2연속 3골차 충격패와 6월 브라질전 참패 등 정작 강팀을 상대로는 번번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도 공존한다. '한국축구의 개성을 무시하고 빌드업 한가지만 강요한다', '자신이 선호하는 선수만 기용한다'는 보수적이고 융통성없는 대표팀 운영을 둘러싼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벤투 감독이 한국 대표팀에서 거둔 34승 중 24승은 아시아팀에 거둔 승리였다. 홈(19승 6무 1패)에서는 강했지만, 원정에서는 14승 6무 6패로 승률이 크게 낮아진다. 또한 해외 강팀과 원정에서 대결해본 경험이 부족하고, 비아시아권팀을 상대로 원정에서 거둔 성적은 2승 1무 2패에 불과하다. 벤투 감독은 남미(우루과이)·아프리카(가나)·유럽(포르투갈)이라는 각 대륙의 강호들을 고루 상대해야하는 이번 월드컵에서 '4년간의 여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한다.
 
벤투 감독 개인으로서도 이번 월드컵은 명예회복의 무대다. 벤투 감독은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포르투갈 국가대표를 경험했고, 2012 유럽선수권대회(유로 2012)에서는 4강이라는 성적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월드컵에 대한 기억은 좋지 못하다. 선수로서 출전한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바로 한국대표팀에 패하여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감독으로서 나선 2014 브라질 대회에서는 1승 1무 1패로 조별리그 통과조차 실패했다. 이후 크루제이루(브라질), 올림피아코스(그리스), 충칭 당다이(중국) 등에서 경질을 거듭하며 유럽 축구계 주류에서 밀려났던 벤투 감독은 한국을 이끌고 월드컵에서 화려한 재기를 꿈꾸고 있다.
 
태극전사들에게도 월드컵은 특별하다. 손흥민, 김영권, 김승규 등은 벌써 3번째로 찾아온 월드컵 본선무대다. 김민재와 김진수 등은 지난 대회 부상 낙마의 아픔을 딛고 생애 첫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됐다. 막내 이강인은 드라마틱한 생존경쟁을 뚫고 2000년대생의 첫 월드컵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한국축구의 아이콘으로 올라선 손흥민은 월드컵 직전 안면부상과 수술이라는 초대형 악재를 딛고 기적적으로 합류하며 이번 대회에서 한국 선수 월드컵 최다골(3골) 기록 경신과 함께, 자신의 첫 월드컵 16강 진출을 노리고 있다.

한국축구는 월드컵을 통하여 성장했다. 과정상 시련도 있었고 아픔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기에, 오늘날 아시아의 강호이자 어엿한 월드컵 단골손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아시아 축구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시장으로 자리잡는 데도 한국축구의 기여도가 적지 않다. 이러한 위상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누적되어온 경험과 도전의 결실이었다.
 
당장의 1승이나 16강이라는 목표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넓게는 우리가 월드컵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거치면서 '어떤 스토리를 추구하고 만들어냈는지'가 더 소중하게 남는다. 역대 대표팀은 모두 월드컵의 성패를 떠나 귀중한 교훈 혹은 반면교사를 남긴바 있다. 특히 2002년의 히딩크호는 한국축구가 세계와 어떻게 맞서싸울 수 있는지 방향성과 시스템을 제시했고, 이후의 대표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벤투호가 4년간 다져온 안정된 연속성과 능동적인 점유율축구라는 철학은, 앞으로 한국축구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의 문제와 관련되어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벤투호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지난 4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명과 함께, 앞으로 10년간 한국축구의 미래 노선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월드컵은 국민들도 '열두 번째 선수'로서 함께하는 무대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대표팀이 뛰어난 성적을 올린 것도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온 국민이 진정한 '원 팀'으로 하나가 되었던 순간의 감동적인 추억 때문일 것이다.

'2002 서사'는 한국 사회에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시절 붉은 물결에 뒤덮인 대한민국은 남녀노소, 세대와 진영을 막론하고 모두가 축구팬이었고 모두가 태극전사였다. 축구가 대한민국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모두 함께 공유했다는 감동이야말로, 지금도 많은 국민들의 기억속에 진한 여운으로 남아있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지난 20년간 우리는 다시 2002년의 대한민국과 같이 모두가 함께 하나되는 감동을 다시 느껴보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는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한 거리두기와 비대면 시대, 이념과 진영의 극단적인 편가르기로 분열된 사회, 이태원 참사 등 많은 비극을 겪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상처받은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간절하게 필요한 시기다. 다행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많은 팬들이 현장에서 함께하는 거리응원도 재개된다. 2002년에 그랬듯이, 축구가 국민들을 감동시키고 하나로 모으는 데 작은 불씨가 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첫 경기를 앞두고 같은 아시아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르헨티나를, 일본이 독일에 각각 2-1로 역전승을 거두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사우디와 일본은 기적적인 승리에 축제 분위기와 휩싸였고, 해당 국민들은 축구가 선사할 수 있는 거대한 감동에 전율을 느꼈다. 한국축구와 팬들에게도 좋은 자극과 동기부여가 되어야 할 순간이다.
 
우리라고 못할 것은 없다. 역시 어렵고 힘든 과정이 되겠지만 그래서 더 가치있는 도전이다. 이제 다시, 월드컵을 통하여 또다른 '우리만의 드라마'를 새롭게 써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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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월드컵 우루과이전 손흥민 벤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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