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vs 장르영화, 그 왜곡된 구도
 
과거에 비해 많은 시도가 이뤄지고 있음에도 SF라는 장르는 한국독립영화의 넘어야 할 장벽과도 같은 대상이다. 한국독립영화가 과도하게 리얼리즘과 사회비판 위주 경향성에 경도되어 있다며 식상하다는 목소리는 항상 들려온다. 그런 입장을 피력하는 이들은 왜 다양한 장르와 소재를 시도하지 않느냐며 푸념을 일삼곤 한다. 하지만 정작 기존에 해오지 않던 시도로 만들어진 결과물에 대한 잣대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안 해본 걸 도전할 때는 늘 시행착오와 습작은 어쩔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맥락에서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SF는 통상적으로 '장르영화'로 이해되곤 하는데 한국에서 이 장르영화라는 게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회피로 통용되는 인식이 적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소재와 형식을 거침없이 시도하는 게 독립영화의 본령일진대 이런 인식이 퍼져 있다 보니 장르영화 시도를 가로막는 질곡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일부 창작자들이 드러내는 입장 또한 혼란을 부추기곤 한다. 세상만사 돌아가는 건 잘 모르겠고 그저 유희적인 작업을 선보이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다. 내가 만들 작업을 '장르영화'로 구분하면 사회문제 반영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면죄부를 얻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그렇게 사회문제를 도외시하거나 탈역사화에 도전한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 난이도를 간과하는 순간 작품이 드러내는 허점은 비판에 무방비상태로 활짝 개방되곤 한다. 이런 엇박자는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중이다.
 
무엇보다 장르영화에서 상징적이나 은유적인 방식으로 현실 문제를 '풍자'해온 유서 깊은 전통을 간과해버리는 오류는 장르영화의 매력을 스스로 반감시키고 '화장실 유머' 같은 딱히 재미도 없는 개그 코드의 남발로 종종 튀어나와 논란을 만들곤 한다. 관객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부주의한 표현을 문제 삼는데 창작자는 장르영화니까 괜찮다는 투로 반박하는 광경이 반복되는 걸 수년간 접하곤 해왔다. '풍자'란 일정 부담을 감수하고 현실권력이나 기득권을 조소할 때 그 생명력이 발휘된다는 걸 오히려 망실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저예산 독립 SF영화
 
"트랜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랜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그렇게 오욕을 거듭해온 시도의 명맥을 잇는 새로운 도전이 등장했다. <트랜스>는 본격 하드 SF 장르를 내세우고 홍보중이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는 스스로 표방하는 정체성에 너무나 충실하게 집중한다. 제목이나 배우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대신 포스터에는 영화 내내 관객의 시선에 아로새겨질 전기 신호가 가득하게 강조된다. 이 포스터 이미지만 봐도 작품의 정체성과 타깃이 명확하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내용 소개에 대해 친절이 지나친 타 영화 포스터에 비하면 볼 사람 알아서 찾아와 보라는 태도가 은근히 더 매력적인 시도다.
 
영화는 SF 장르 중에서도 보다 전문적이고 진입하기에 난이도 높은 '하드 SF'를 표방하고 있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트랜스휴머니즘, 특이점, 테슬라 코일, 필라델피아 실험 같은 생소한 개념과 용어가 넘쳐난다. 흔히 한국 드라마는 기업물이건 첩보물이건 의학물이건 모두 연애장르로 귀결된다고 할 만큼 통속성과 신파가 중요하게 취급되는데 <트랜스>는 정반대 노선을 취한다. 철저하게 이 낯선 소재들을 중심에 놓고 스토리를 전개한다. 외국의 하드 SF에 비견될 만큼 깊숙하게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수위까지 가지는 않지만, 여타의 잡다한 곁가지를 늘어놓는 대신 작품 속에서 계속 강조되는 트랜스휴머니즘 실험을 중심으로 철저히 집중한다. 이 지점은 분명히 돋보이는 시도다.
 
사실 하드 SF 장르영화라 불리기엔 <트랜스>가 내세우는 내용들은 과학기술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고난이도 수준은 아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이란 개념은 쉽게 설명하자면 인간의 두뇌/신체기능을 강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도를 긍정하는데, 이런 부류의 설정은 이미 숱한 과학소설/만화/영화/드라마에서 소개된 바 있다. 유독 한국이 이런 내용을 대중문화에서 풀어내는데 인색했다는 게 더 사실에 가까울 테다. 할리우드에서 <알리타: 배틀 엔젤>의 원작인 일본만화 <총몽>이나 BBC/HBO 드라마 <이어즈&이어즈>에서 해당 개념은 전면적으로 구현되고 있기에 장르 애호가들에게는 이 영화가 선보이는 내용은 하드 SF라기 보단 B급 장르영화의 매력에 더 가깝게 와 닿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존에 독립영화 관객층에겐 생소한 소재임은 확실하다.
 
<트랜스>는 하드 SF 장르영화를 표방하고 트랜스휴먼 실험 과정이 이야기의 주요 전개를 끌고 가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실험에 뛰어드는 동기는 한국독립영화에서 끊이지 않고 활용되는 소재에서 출발한다. 바로 학교폭력과 '왕따' 문제다. 아직은 낯선 소재인 트랜스휴머니즘이나 해외 장르영화에서 각광받지만 국내에선 소수에게만 알려진 여러 음모이론들이 난무하는 이야기이지만 주인공들이 금단의 실험에 도전하게 되는 배경에는 지극히 '한국적'인 익숙한 이야기가 놓여진 것이다.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트랜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랜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주인공 고민영은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소심한 여고생이다. 그녀는 마태용이 중심에 있는 소그룹에게 지속적인 학대와 폭행에 시달려 섭식장애까지 겪는 중이다. 하지만 학교 내에서 그녀를 위한 구원의 손길은 통 보이지 않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수난의 나날은 끝이 없어 보일 만큼 계속된다.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견디기 위해 민영은 가족이 다니는 교회 전도사와 상담도 하고 기도도 해보지만 현실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장르영화를 표방하지만 고민영이 당하는 학원폭력 묘사는 결코 약하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고민영이 괴롭힘에 시달리던 교실에서 느닷없는 비명이 울려 퍼진다. 마태용이 교실 밖에 처참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용의자로 민영이 지목되어 졸지에 수사선상에 오른다. 여기에 마태용 패의 보복성 폭행은 끊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사태를 관망하던 괴짜 동급생 이태는 민영에게 수상쩍은 실험을 제안한다. 그는 벼락을 세 번이나 맞고도 살아남은 전학생 나노철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피력한다. 이제 아웃사이더 3인방은 기괴한 실험으로 한데 묶이기 시작한다.
 
이야기 전개는 통상적인 기-승-전-결 서사구조와는 궤를 달리한다. 영화는 극중에서 피이태가 누누이 설파하는 일종의 음모적 실험에 따라 병렬적으로 흘러간다. 실험의 핵심인 이태의 논리대로 지금 내가 보는 게 세상의 진실이 아니라 그저 뇌내 뉴런의 전기신호를 통해 인식하는데 불과하다는 전제를 깔고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면서도 미묘하게 달라지는 식으로 전개된다. 극중에서 거듭 강조되는 트랜스 상태 그 자체를 구현하려는 듯 시도다. 그래서 이야기는 마치 타임루프 혹은 평행세계 설정처럼 민영과 이태, 노철 3명의 역할과 상황이 조금씩 바뀌면서 변주되는 식으로 일어난다. 느슨하게 영화를 보고 있다간 마치 동일한 내용이 고장이 난 테이프처럼 반복되는 느낌일 테다.
 
그런 3차례의 변주가 연속된 다음에는 혼란에 빠진 주인공 민영이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이 시작된다. 감당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한 민영은 마침내 모종의 결단과 실행에 이른다. 그녀의 최종적인 선택은 무모해 보이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녀가 겪던 '끝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기꺼이 저지를 법한 결단일 것이다. 인류 최초로 '트랜스휴먼'이 되건, 실험의 실패로 모진 꼴을 당하건 지금보다 더 나빠질 건 없을 테니 말이다. 영화는 국내에서도 소수의 열혈독자층을 거느린 본격 하드 SF의 테크니컬 측면에 밀착하기보다는 주인공들의 극단적 선택에 바탕이 되는 잔인한 현실에 대한 관객의 공감에 호소한다.
 
한계를 인식하고 선택에 집중한 저예산 SF의 매력
 
"트랜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랜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마노엔터테인먼트

 
<트랜스>는 본격 SF의 진입장벽을 완화하기 위해 독립영화 관객들에겐 익숙한 사회적 폭력을 가져와 설득력을 보강했지만, 이야기 전개에 있어선 분명히 통속적인 진행과는 선을 긋는다. 영화 속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다층적 현실인식에 맞춤형으로 비선형적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래서 영화가 표방하는 트랜스 개념과 음모이론에 가까운 설정들을 인지해야 스토리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건 타협할 수 없는 핵심 줄기라 창작자가 결심한 게 분명해 보인다.
 
물론 독립영화가 극복하기 힘든 저예산과 장르영화 전통의 미약함은 일정한 한계를 드러낸다. 일단 이 영화가 구현하는 SF 수위는 '하이파이'라기보다는 '로-파이'에 가깝다. 하지만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돈은 별로 없어도 주제에 제대로 부합되게 만들어보려 한 진심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트랜스 실험의 상징적인 아이콘인 '테슬라 코일'은 영화를 보고 난 이들이라면 잊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시각적 체험을 선사할 테다. 어릴 적 몇 가지 이채로운 실험을 보고 과학자의 꿈을 꿔본 이들이라면 영화를 보자마자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트래스>는 꼭 칼 같은 고증이 아니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SF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증명을 해낸다. 여기에 적절히 어우러지는 사운드의 반복 변주는 전자음악계 EDM 사운드 속성과 통하는 절묘한 호흡을 선보인다. 해외의 B급 SF 장르에 친숙하다면 큰 무리 없이 영화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을 정도다.
 
본 작품에서 특히 돋보이는 강점이라면 주인공의 동기부여와 사건 발로가 지극히 한국적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공감되는 이슈에서 출발해 비대중적 소재와 결합되는 연결고리는 적절한 안전대책 기능을 소화한다. 이와 함께 하드 SF에 속하는 주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결기가 단연 돋보인다.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하면 외국의 축적된 유산에 비길 바 못 되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한눈팔지 않고 영화 속 주인공처럼 절박하게 질주한다. 꼭 이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결의에 차 있는 모양새다.
 
그런 굳건한 자세로 장르물의 정도를 걷는 경우는 요즘 한국독립영화에서 퍽 드물어진 풍경이다. <트랜스>는 비록 서구나 일본의 정통 하드 SF에는 못 미친 미완의 작업이지만 근래 출판계를 중심으로 활성화 중인 국내 SF 주요 경향과 결을 달리하는 점이 흥미롭다. 소프트한 소재나 정치적 올바름과의 결합 중심으로 흐르는 국내 SF 경향을 감안하면 <트랜스>의 시도는 희소성 면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도내리 감독의 이름 세 글자를 메모해 놓는다. 다음에는 어떤 작업을 선보일지 궁금해질 만큼 흥미로운 영화적 체험이다.
 
<작품정보>
 
트랜스 Trans
2020|한국|SF/스릴러/판타지/미스터리
2022.11.17. 개봉|93분|15세 관람가
감독 도내리
주연 황정인(고민영 역), 윤경호(피이태 역), 김태영(나노철 역)
출연 이유빈(마태용 역), 박진수(최병구 역), 이충배(박인득 역), 이영지(양미경 역),
배윤범(형사 역), 권혁미(전도사 역)
제작 도내리
촬영 윤병선
편집 이학민, 도내리
제작 네거티브필름
배급 (주)마노엔터테인먼트
 
2021 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021 8회 춘천SF영화제 춘천의 시선상 장편-한국독립SF경쟁
2021 19회 뉴욕시티호러필름페스티발 Best SF Feature
2021 8회 헐리우드호러페스트 Best SF Feature
2021 6회 LA사이파이필름페스티발 Best Film Bronze
2021 5회 시네마페스트 Silver Award
2021 7회 판타지사이파이필름스크린플레이페스티발 BEST SCI-FI FEATURE FILM
2021 3회 팝콘인터네셔널필름페스티발 BEST STORY
2021 5회 다크베인호러페스트 BEST FEATURE FILM
2021 54회 휴스턴국제영화제 Platinum Level Award-Winning
2022 9회 SF어워드 영상부문 대상
트랜스 도내리 감독 황정인 윤경호 SF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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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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