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일부러 홈쇼핑 채널을 돌려본다. 쇼핑이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TV를 보는 사람들에게 홈쇼핑은 단순히 지나가다 눌러보는 채널이 아니다. 화장품에서, 옷, 신발, 그리고 먹거리, 식자재에 이르기까지 TV로 쇼핑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홈쇼핑 채널이 인기를 끌수록 그곳에 종사하는 이들의 주가도 오른다. 조카가 오랜 취준 끝에 홈쇼핑 회사에 입사하자, 조카의 엄마는 성과급 자랑한다. 쇼호스트들의 어마어마한 몸값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돈이 모이는 곳,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연간 20조 원이 움직인다는 홈쇼핑 시장을 tvN의 수목 드라마 <킬힐>이 배경으로 삼았다. 
   

여자들에게 '킬힐'은 자존심이라는 이야기는 전해들은 적이 있다. 제목처럼 드라마 <킬힐>은 주인공 우현(김하늘 분), 모란(이혜영 분), 옥선(김성령 분)의 킬힐에 주목한다. 검은 구두를 신고 사장의 아내를 만나 고개를 조아리던 모란은 회사 앞에 차가 멈추자, 붉은색 킬힐을 갈아 신는다.

이때 킬힐은 을이던 그녀가 UNI 홈쇼핑의 전무로 기세등등하게 문을 열어젖히기 위한 갑옷과도 같다. 우현도 다르지 않다. 방송을 위해 나서는 그녀에게 킬힐은 필수적이다. 킬힐을 신고 전장과도 같은 현실에 나서는 여성들의 모습, 드라마는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녹록지 않은 삶

홈쇼핑 회사로 매일 출근해야 하는 삶은 녹록지 않다. 한때는 UNI 홈쇼핑 에이스였지만 이젠 휴지를 파는 처지에 몰린 쇼호스트 우현의 처지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녀 정도나 되는 사람이 뭐 그리 아등바등할 게 있냐고 수군거린다. 하지만 우현에게 삶은 만만치 않다. 아나운서를 꿈꿨지만 거듭된 낙방은 그녀를 홈쇼핑 쇼호스트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여전히 정상에 오르는 일은 힘에 부친다. 그런데 그 정점을 찍기도 전에 미끄럼틀을 탈 처지다.  

남들은 그녀의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는 줄 알지만, 지금은 실직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신세다. 그뿐인가. 남편을 꼬드겨 사업을 하겠다던 남편의 형은 시어머니에게 사업 자금을 요구하고, 그 사업 자금을 위해 시어머니는 우현네에 손을 벌린다. 가장으로 딸 하나 번듯하게 키우고 싶은 처지, 그런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위태로운 우현의 처지와 달리, UNI홈쇼핑의 에이스 옥선은 여전히 승승장구 중이다. 어디 직업뿐인가. 이제 명문 정치가 자제로 3선 국회의원에 당대표를 넘보는 이가 그녀의 남편이다. 거기에 든든한 아들까지. 

이 정도면 완벽하다. 하지만 홈쇼핑 에이스라는 옥선의 커리어도 남편과 시댁 어른들 앞에서는 그저 선거에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를 가리는 잣대로 판가름될 뿐이다.

UNI 홈쇼핑을 좌지우지하는 모란은 다를까? 평사원에서 시작해 전무가 됐지만 사장과 사장의 아내 앞에서는 이 타이틀도 무색하다. 그래도 업무라면 견딜 만하다. 사장의 아내는 그녀를 불러, 부부 사이의 일을 책임 지운다. 사장 집안의 평화를 위해 궂은일까지 해결해야 한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왜 지들의 정해?'라고 이기죽거리지만 그 말을 드러내놓고 할 처지가 아니다. 
   

치열한 홈쇼핑 세계에서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마주한 세 명의 여자, 우현, 옥선, 모란. 하지만 꼭 브라운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의 면면이나 다름없다. 

번듯한 남편이 있으면 언제든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는 편견에 대항해야 하며, 번듯한 남편의 미래를 위해 조력자가 되라는 압박을 이겨내야 한다. 또 차곡차곡 쌓아올린 커리어가 하대의 대상이 되는 '경우 없음'과 맞서야 한다. 그것이 전장의 실태다. 드라마는 여자들의 욕망을 말하지만, 그건 욕망이라기 보다 생존을 위한 싸움에 가깝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