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년 전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매일 방송을 달구던 한 국가가 있었다. 바로 미얀마이다.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 전 해 11월 8일 이루어진 미얀마 총선이 부정선거라며 민 아웅 흘라잉 사령관을 앞세운 군부는 정국 불안을 안정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1년, 미얀마 해직 기자들은 인터넷이 끊긴 미얀마에서 VPN(가상 시설망)으로 자신들의 소식을 알리려 애썼다. 그들 자신이 체포와 구금의 위협을 감수하며 전한 미얀마 1년의 기록, 그 기록을 MBC <다큐 플렉스>가 전한다. 

초록은 동색이랄까. 미얀마 군부가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하여 러시아를 지지했다. 주권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군부가 정권을 쥔 미얀마의 국민들은 1년이 지난 지금도 군부독재의 미얀마를 거부한다. 민주주의 미얀마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중이다. 
 
 MBC <다큐플렉스>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의 한 장면

MBC <다큐플렉스>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의 한 장면 ⓒ MBC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민주 정부 하의 미얀마는 10%대의 경제 성장을 일구며 세계가 주목하는 아시아의 신흥 경제 부흥 국가로 발돋움하려 하고 있었다. 과거 '버마'였던 나라, 아름다운 자연 환경은 인기있는 동남아 관광지 중 하나였다. 그런 환경에서 젊은이들을 K팝에 열광하고, 요즘 세계의 젊은이들처럼 인터넷 세상을 자유롭게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쿠데타에 저항하는 젊은 세대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란 젊은이들, 이른바 MZ 세대에게 군부 독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이었다. 2030세대를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불길한 것을 물리친다는 취지로 냄비를 두드렸던 미얀마의 전통적 풍습을 되살린 냄비 시위를 매일 저녁 벌였다. 비무장 민간인으로 저항을 한다는 의미의 세 손가락 경례를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군부는 거침없었다. 2월 9일 한 소녀가 군인 실탄에 사망했다. 그로부터 청년들의 희생이 잇달았다. 한 달이 지나며 진압은 더욱 강도가 세지자, 시민들은 CDM,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저마다의 생업을 포기했다. 이런 불복종 운동은 미얀마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MBC <다큐플렉스>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의 한 장면

MBC <다큐플렉스>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의 한 장면 ⓒ MBC


학교도 문을 닫았다. 교사들은 거리로 나섰다. 그러자 군부는 거리로 나선 교사들의 직위를 정지시켰다. 아이들은 그때부터 1년이 넘게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군부의 교육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도 없다고 했다.

학교를 가지 못한 아이들, 군부의 인터넷 통제로 온라인 수업조차 여의치 않다. 미래가 있지만, 더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의사의 꿈을 꾸던 수재 청년 타이자 산은 쿠데타 후 저항 시위 지도자가 되었다. 까칠하게 마르고 수척해진 얼굴로 한 달 만에 나타나 한국의 제작진들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주인공, 그의 꿈은 2살 배기 딸을 다시 만나는 평범한 일상이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군부가 장악한 국영 방송 외에 DVB, 세븐 데이즈 등 미얀마의 주요 언론과 방송사가 폐쇄되었다. 젊은이들은 SNS를 통해 전 세계에 미얀마의 현실을 알리려 했지만 그조차도 와이파이 등 인터넷 차단으로 막혔다. 젊은 세대는 더욱 분노했다. 몽유와 지역이 고향이던 깐 웨이포는 나라가 후진하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졸업 논문만 앞둔 대학원을 포기하고 고향 몽유와의 파업위원회 회장이 되어 시위를 이끌고 있다.

몽유와대 전 총학생회장이었던 웨이 오 나잉은 뛰어난 연설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당연히 수배 대상이 되었던 그는 체포되었고, 얼마 뒤 처참하게 고문당한 모습으로 국영 방송에 등장했다. 지난 1년 동안 8000여 명의 시민이 법 505조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지난밤에 체포된 청년이 다음 날 시신으로 돌아온 경우도 있다.

이런 미얀마 국민들에게 우리 영화 <택시 운전사>는 거의 국민 영화처럼 대접받는다. 그들에게 광주는 곧 미얀마이고, 광주를 통해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 한 걸음을 더 내디딘 과정이 미얀마 시민들에게는 '희망'이다.
 
 MBC <다큐플렉스>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의 한 장면

MBC <다큐플렉스>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의 한 장면 ⓒ MBC

 
그러나 희망은 멀다. UN조차도 미얀마 사태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에 미얀마 시민들의 1년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아시아에서 한국이 유일하게 참여한 세계에서 단 10개국만 규탄 성명을 냈다. 국제 사회조차 힘이 되지 않는 상황, 그래서 미얀마 젊은이들은 스스로 시민방위군, PDF를 결성했다. 군부의 민간인 학살을 목격한 일부 경찰과 군인들이 합류했다. 아직은 변변한 무기조차도 없는 상황, 국민이 보낸 지원금으로 훈련한 이들은 지난 9월 7일 소수 민족 지역과 시민군 캠프를 근거지로 정부와의  내전을 선포했다.

지난 1년 미얀마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 팬데믹까지 덮쳤지만 군부는 제대로 된 방역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들은 산소통조차 구하기 힘들어 죽어간다. 화장장은 관을 줄 세우다시피하고, 관조차 구할 수 없는 시신들이 널렸다. 양곤의 한 외곽 마을 미얀마 키친 프로그램이 나눠주는 먹거리에 늘어선 줄이 장사진을 이룬다.

"평화로운 바람이 오기 전에 태풍이 지나가야 한다.
어둠이 지나고 나면 다시 햇빛이 나올 것이다.
무릎 꿇지 않을게. 손들지 않을게."


우리나라에 외국이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따얌의 노래 <별>이다. 평범한 청년이던 따얌은 조국에 닥친 불행에 더는 그래도 있을 수 없다. SNS를 통해 저항의 노래를 전한다. 따얌과 같은 청년들이 매주 주말마다 모여 거리에서 저항의 노래를 부르며 미얀마의 현실을 알리고 있다.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져 가지만 미얀마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얀마 젊은이들은 투쟁 중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5252-jh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MBC다큐플렉스 - 미얀마 청년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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