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 '주연'과 '조연', 그리고 '단역'의 구분은 있을지언정, 연기와 인생의 주연, 조연은 따로 없습니다. 액터 인사이드는 연기를 해오며 온갖 희로애락을 겪었을 배우들을 응원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영화 <보이스>에서 피싱조직 관리부장을 연기한 배우 이운산.

영화 <보이스>에서 피싱조직 관리부장을 연기한 배우 이운산. ⓒ 사람엔터테인먼트

 
어느 조직에 가나 헌신적인 중간 관리자가 있는 법이다. 악당이든 아니든 이들은 시스템을 가장 잘 이해하며 동시에 잘 굴러갈 수 있도록 후임을 훈련시킨다. 뛰어난 리더도 중요하지만 조직이 오래가기 위해선 중간 직책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국내 최초로 보이스피싱을 소재로 한 범죄 액션 영화 <보이스> 속 관리부장 또한 그런 존재 중 하나였다.

지난 9월 15일 개봉한 후 누적 관객 100만에 근접한 <보이스>에서 배우 이운산은 짧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중국에 근거지를 둔 거대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관리부장은 말 그대로 수많은 상담원을 관리 감독하는 악당 중 하나다. 때론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구슬리는 관리부장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다. 9월 27일 서울 압구정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운산은 "관리부장은 오디션을 통해 따낼 수 있는 역할 중 가장 큰 역할이었다"며 운을 뗐다.

이운산의 연구

대중에겐 아직 생소하지만 이운산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출신으로 대학로 연극무대부터 단계를 밟아온 배우다. 졸업 이후 연기 경력만 놓고 보면 14년 차다. <비스티 보이즈> <극한직업> <광대들: 풍문조작단> 등 여러 영화에 조·단역을 맡아오다가 이번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비중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게 됐다. "평범한 느낌보다는 개성 있는 캐릭터로 오디션을 준비해갔는데 감사하게도 기회를 주셨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제 또래 배우들 상당수가 관리부장 역할 오디션을 보러 갔더라. 나름 관리부장이 왜 한국을 떠났고, 중국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생각하며 준비했다. 한국에서 맹목적으로 돈만 벌기 위해 양심에 가책은 전혀 안 느낀 채 여러 일을 하다가 사고를 쳐서 중국으로 쫓겨간 것이고, 더러운 뒤처리도 꽤 했을 거라 상상했다. 그렇다고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

천 본부장(박명훈)을 깎듯하게 모셨겠지만 나름 불만도 쌓였을 거다. 일하는 과정에서 많이 맞기도 했을 거고. 그래서 곽 프로(김무열)에게 옮겨 탄 거지. 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명훈 선배랑도 그런 얘길 하며 촬영했다. 떼돈을 벌어 한탕 하겠다는 생각이 있던 차에 곽 프로가 똑똑하니까 동경했을 테고, 동시에 한국에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했을 것이다.

인물 설정만 놓고도 한참 얘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배우가 역할을 세심하게 준비했다는 방증이다. 이운산은 "평소엔 남들과 비슷하게 보이스피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역할을 준비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며 "여러 다큐멘터리나 유튜브를 보며 피해자의 심리를 이해하려 했다. 마음이 안타까웠지만 그래야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관리부장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같은 범죄집단 멤버인 박명훈, 김무열과 호흡하면서 이운산은 "다들 여러 아이디어를 공유해주셔서 연기하기 매우 편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설정상 캐릭터 이름이 없었는데 박명훈의 제안으로 관리부장의 이름이 생기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이운산은 "상업영화에서 조연으로 큰 배역을 맡아 정말 애착이 많았다"며 일화를 전했다.
 
조연출분 성함이 석동이었는데 명훈 선배가 그 이름을 불러줘서 촬영하기도 했다. 김무열 배우도 사실 본인 것만 할 수도 있었는데 관리부장을 수족처럼 부려야 하는 만큼 개연성에 대한 생각을 말하기도 했고, 변요한 배우는 액션 장면에서 서로 의견을 공유해 현장에서 만들어낸 장면이 있다.
 
 영화 <보이스>에서 피싱조직 관리부장을 연기한 배우 이운산.

영화 <보이스>에서 피싱조직 관리부장을 연기한 배우 이운산. ⓒ 사람엔터테인먼트

 
연영과 성실파 '권태배' 라인의 실체

연극 <환상동화> 속 한스 역이 그의 첫 대학로 무대 데뷔작이다. 이후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우왕 역을 맡으며 난생 처음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던 그는 분명 순탄친 않은 배우 생활을 해왔다. 사실 <환상동화>도 예정대로라면 2007년 10월부터 무대에 올라야했지만, 일부 배우들 사정으로 공연이 미뤄졌고 2008년 봄이 돼서야 진행될 수 있었다. 
 
그때 입시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울을 났다. 무대 연기가 너무 좋았다. 선배님들, 연출님들과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게 즐거웠다. 넌버벌(가능한 대사 없이 비언어적 표현으로 극을 꾸미는 성격의 공연)이나 탈극장 퍼포먼스 같은 실험적 공연도 경험했다. 극단 차이무 객원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많이 배웠지.

중3 때 교회 성극을 한 뒤 무대의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막연하게 대학 가면 연극동아리도 하고, 강변가요제나 대학가요제에 나가봐야겠다는 생각만 했는데 진로를 고민하며 진지하게 돌아봤던 것 같다. 매너리즘에 안 빠지고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러다가 연기를 하면 50, 60살이 돼도 도전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고3 때 3월 1일 나름대로 의식을 치른답시고 삭발을 했다(웃음). 당시 전 이과였는데 부모님 몰래 수능 시험을 예체능으로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군대 또한 호루라기 연극단을 나오는 등 이운산은 20대와 30대 중반까지 연기와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동갑내기이자 과 동기였던 배우 현빈, 권율과 한 방에 살기도 했는데 당시 학교 동문은 성실하게 연기를 배우는 이들의 거처를 '권태배 라인(권율, 김태평, 이현배의 준말로 김태평은 현빈의 본명, 이현배는 이운산의 본명이다)'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실 지금도 늘 긴장하며 오디션 보고 불안하기도 하다. 여전히 배우라고 하기엔 스스로 부족함이 느껴지더라. 30대 초중반까지 내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데 슬슬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자기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하면 어느 정도 전문가가 돼야 하는데 말이지. 친구들은 나름 자기 일에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는데 난 아니라고 생각될 때마다 힘들긴 했다. 좀만 더 버티자 다짐할 때 작품이 하나씩 오더라.

버틸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다. 그간 고생하며 기다려주신 가족 덕에 버티는 것 같다. 20년 가까이 연기에 집중하며 달려왔는데 이제 산 중간 정도 올라왔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할 때 주변 선배, 후배들을 보면 아직 내가 멀었음을 느낀다. 날 응원하고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진짜 제대로 열심히 해야 한다. 그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더라. 보다 섬세하고 예민하게, 동시에 편안하게 익숙한 듯 연기하고 싶다.

<보이스> 이후 그는 또 다른 영화 <유체이탈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 <달리와 감자탕> 등 몇 편의 작품 또한 출격 대기 중이었다. '구름 사이로 우뚝 솟은 산'이라는 그의 이름처럼 느려보이지만 하나둘 쌓아 올린 내공이 어느 순간 높고 밝게 빛을 발하길 기대해 본다.
이운산 보이스 보이스피싱 관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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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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