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방송된 KBS <대화의 희열3>의 한 장면

17일 방송된 KBS <대화의 희열3>의 한 장면 ⓒ KBS

 
'한국축구의 아이콘' 박지성과 차범근이 자신들의 축구인생을 돌아보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17일 방송된 KBS2 토크쇼 프로그램 <대화의 희열3>은 지난 주에 이어 박지성과 차범근, 두 전설의 두 번째 이야기를 방송했다. 2부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수많은 고비를 이겨내고 정상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는지 극복의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박지성은 2005년 8월 10일 영국 맨체스터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데브레첸(헝가리)과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예선 3라운드 1차전에서 교체출전으로 맨유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에버턴과의 2005-06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에도 당당히 선발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경기를 앞두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프리미어리그에 온 걸 환영한다(Welcome to premier league)"라고 격려해준 이야기를 공개했다.

당시 토트넘에서 활약중이던 국가대표 팀 동료 이영표와의 일화는 짠하면서도 감동적이다. 박지성은 "본래 저는 주로 왼쪽 공격수로 활약하는데 그날따라 퍼거슨 감독이 나를 오른쪽으로 배치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설명했다. 이어 "이영표가 처음 걷어낸 공이 제 발에 맞고 흘러서 다시 이영표한테 갔다. 걷어내겠지 했는데 안 걷어내더라. 그래서 '뭐지? 뺏길 텐데?'라고 생각했다"라고 말 해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박지성은 상대 문전에서 하필 이영표의 공을 빼앗아 웨인 루니에게 패스했고 바로 골로 연결됐다. 그에겐 빛나는 순간이었지만 이영표에게는 뼈아픈 흑역사였다.

진정한 명장면은 그 뒤에 탄생했다. 내심 미안했지만 프로로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던 박지성은 이영표의 등 뒤를 지나치며 살짝 손을 뻗었고 이영표도 말 없이 그 손을 잡아줬다. 눈을 마주치지도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두 선수가 서로에게 갖고 있던 애틋한 감정이 교차하는 장면이었다. 국가대표팀에서,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에서 오랜 세월 함께 고락을 나눈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한국 팬들 입장에서도 더 뭉클할 수밖에 없었다.

박지성의 맨유 시절 가슴 아팠던 순간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첼시와의 2007-08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었다. 당시 토너먼트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박지성의 결승전 선발 출전을 많은 이들이 기대했지만 정작 그는 명단에 아예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퍼거슨 감독은 이미 챔피언스리그 결승 경험이 있던 오언 하그리브스를 선택하고 그를 제외했다. 

박지성은 당시 관중석에서 부모님과 함께 결승을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했음을 고백했다. "전반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만큼 정신이 없었다. 내가 팀이 이기도록 응원해야하나 고민하기도 하고 솔직히 퍼거슨 감독 욕도 했다. 그러다가 후반에 조금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이겨야지', '내가 부족했으니까'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당시 맨유는 승부차기 끝에 첼시를 꺾고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박지성은 팀의 승리를 지켜보며 "물론 기뻤지만, 온 마음으로 기뻐하지는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이후로도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어엿한 '맨유맨'으로 인정 받았다. 2009-10시즌 리버풀전에서 그림같은 결승 다이빙 헤더골을 성공시키며 가슴의 엠블럼을 치며 환호하던 순간, 2010-11시즌 울버햄턴전에서 멀티골을 터뜨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던 순간 등 박지성이 맨유에선 만들어낸 명장면들이 거론됐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박지성이 꼽은 자신의 인생 경기는 2010-11시즌 36라운드 첼시전이었다. 박지성은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엄청난 활동량과 투지를 바탕을 중원을 장악하며 그에게 '두 개의 심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계기가 됐다. 박지성은 당시 상대였던 첼시의 마이클 에시엔이 경기 도중에 "그만 좀 뛰라"고 호소했던 걸 거론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맨유는 이날 첼시를 꺾고 사실상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바 있다.

이어 또 다른 레전드인 차범근의 현역 시절 이야기가 언급됐다. 박지성 시대에 EPL이 최고였다면, 차범근이 활약하던 시절에는 독일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였다.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1년간 총 308경기에 나서서 98골을 기록했다. 독일의 저명한 축구언론인 '키커'지에서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루메니게, 케빈 키건 등과 함께 최고 선수 평점 1,2위를 다투는 특급 선수였다. 1979년에는 독일잡지 '슈테른'에서 마더 테레사 수녀, 에드워크 케네디 상원위원, 슈미트 수상 등과 함께 '세계 4대 상승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차범근이 독일 무대에서 인정받는 선수로 자리잡기까지의 과정은 지금보면 블랙코미디의 연속이었다. 그가 현역을 보낸 시절은 지금만큼 해외진출이 활성화된 때가 아니었다. 차범근은 "세계 무대를 가려면 월드컵 출전 같은 타이틀을 가져야 했는데 당시는 우리가 월드컵 무대에서 낙방을 거듭했다. 대표선수를 7년 정도 하면서 너무 괴로웠다"라며 "유럽같은 큰 무대에 나가서 우리가 뭐가 문제인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고 해외진출의 꿈을 키운 계기를 설명했다.

차범근은 1978년 5월에 '박스컵'이라는 국내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출전했다가 당시 초청으로 왔던 독일 프랑크푸르팀 코치의 눈에 띄어 독일 진출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당시 국내에서는 그의 독일 진출을 바라보는 여론이 부정적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국부 유출' '대표팀 전력 약화'를 거론하며 차범근의 해외진출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로부터 약 25년뒤 해외로 진출한 박지성이 '국위선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차범근은 26세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어렵게 독일에 진출했지만 다름슈타트와의 데뷔전에서 2도움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현지 언론에서도 차범근을 '다름슈타트의 비밀병기'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정작 차범근은 독일에서 10여년간을 뛰면서 "잘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여기서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은 공포감을 느꼈다"며 당시 받은 중압감을 설명했다. 

또한 차범근은 군대에 두 번 가야만 했던 웃지 못 할 사정도 밝혔다. 차범근은 독일에 진출하자마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공군은 복무 기간이 길어 인기가 없었고, 이에 공군은 의가사제대를 조건으로 그를 영입했다. 차범근은 "1976년 10월에 입대했는데 그렇게 계산(의가사제대)하니까 1978년 12월 31일이 제대 날이었다. 그래서 독일에 갔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독일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국내에서까지 화제가 되자 군복무에 대한 특혜와 형평성 논란이 불거졌고, 여권 만료일이 임박하여 국내에 귀국하자마자 바로 재입대를 해야했다. 의가사 제대라는 약속은 사라졌고 그는 복무기간을 5개월 더 채우고 제대했다. 시대의 한계가 낳은 촌극이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차범근은 결국 다시 독일무대로 진출하여 UEFA컵 우승을 두 번이나 차지하며 화려한 커리어를 쌓는데 성공했다. "한국에 있을 때 많이 우승을 해봤기 때문에, 처음 우승했을 때는 UEFA컵이 얼마나 큰 대회인지 잘 몰랐다. 30대에 레버쿠젠으로 이적 이후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을 때는 너무 우승을 하고 싶었다. 차범근은 당시 결승전 영상을 회상하며 그때 했던 인터뷰처럼 우승하고 나서 '너무나 행복했다'"라고 회상했다.

차범근의 실력이 워낙 뛰어다보니 상대의 집중견제도 점점 심해졌다. 독일 진출 초창기 때 겔스도르프에게 당한 치명적인 부상은 지금도 유명하다. 차범근 본인도 "참혹했던 사건"이라고 회상할 정도로 심각했다. 당시 겔스도르프의 거친 백태클에 차범근은 요추가 부러졌고, 당시 병원에서는 축구를 못 할 수도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독일 현지언론과 팬들도 차범근의 부상에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구단에서는 고소를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보였다.

하지만 차범근이 택한 길은 놀랍게도 복수가 아니라 용서였다. 차범근은 "만감이 교차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안정이 됐다. 경기 중에는 다양한 상황이 나올 수 있다. 구단에서 고소를 위한 서류를 준비해서 찾아왔을 때 '사인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부상을 입힌 선수와는 레버쿠젠에서 팀 동료로 다시 만났고 지금까지도 가까운 친구로 지낸다"고 말했다. 

차범근은 선수생활 후반기 두 번째 UEFA컵 우승을 이루고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은 다 이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독일에 지도자로 남느냐, 한국으로 돌아가느냐의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그는 한국을 떠날 때 "독일에서 좋은 축구를 배워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축구발전에 기여하겠다"고 팬들과 한 약속을 떠올렸다. 

그가 독일에서 찾은 답은 '유소년 교육'이었다. 차범근은 "공을 차는 감각은 성인이 되어 훈련으로 만들 수 없다"면서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후원하는데 축구인으로서의 소명을 찾았다. '차범근 축구대상'을 통하여 박지성, 이동국, 황희찬 등 수많은 한국축구의 주역들을 발굴해냈고 그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차범근과 박지성에 이어 현 시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은 손흥민이다. 차범근은 "(손흥민으로부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선배님 기록을 깰 겁니다라고 하더라"라며 어린 후배의 당돌한 포부를 듣고 움찔했던 일화를 언급했다. 손흥민과 대표팀 생활을 함께하기도 했던 박지성은 "요즘 세대인 것 같다. 자기가 할 말은 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감도 분명하게 지려고 노력한다"라고 호평했다.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생활과 환경에 적응하며 겪은 고충도 빠질 수 없다. 차범근은 음식 때문에 애를 먹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한식을 먹고 가면 팀동료가 마늘 냄새가 난다고 조롱했다. 한식을 먹고서는 경기를 뛰기가 어려워서 식사 때마다 항상 스테이크 두 개를 시켜 먹었는데 창피했다. 동료들이 흉은 봤을지 모르지만 경기에서 골을 넣어주니까 별말이 없더라"고 웃으며 회상했다.

차범근과 박지성은 서로의 명장면에 대하여 언급했다. 박지성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후반 막판 6분 사이에 3골을 몰아넣었던 제 6회 박스컵 '전설의 말레이시아전'을 거론했다. 당시 1-4로 지고 있던 한국은 차범근의 헤트트릭에 힘입어 4-4로 극적인 무승부를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이 경기는 영상 자료가 소실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

차범근은 "지금 생각해도 꿈 꾼 것 같다. 골을 넣으려고 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다보니 계속 들어가더라. 경기를 마치고 나온 후 아이 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다리를 움켜잡으며 '차범근이 도시야'라며 열광하는데 내심 뭉클하더라"라고 회상했다.

차범근은 2010 남아공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열린 한일전 친선경기를 박지성의 최고 경기로 꼽았다. 박지성은 일본 선수 4~5명을 홀로 제치고 그림같은 골을 성공시켰다.  이후 일본 관중석을 무표정하게 쓱 훑어보고 달려가는 이른바 '산책 세리머니'로 한국 팬들을 열광시켰다.

차범근은 "야유하던 일본 관중들을 조용히 잠재우는 게 너무 근사했다"고 극찬했다. 박지성 "경기 전날 인터뷰에서 일본 대표팀을 일부러 조금 낮춰서 이야기했다. 일본대표팀의 능력이 이전만 못하다고 했더니 일본 팬들이 경기 당일날 야유를 보냈고, 저도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해준 것"이라며 당시의 사정을 설명했다.

전설들에게도 선수생활 마지막 경기의 순간은 다가왔다. 무릎통증으로 선수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박지성은 2013-14시즌 네덜란드 리그 PSV 아인트호벤에서의 마지막 리그 홈경기(NAC 브레다)를 치르고 은퇴했다. 원소속팀(퀸즈파크레인저스)와의 계약기간이 남아 있던 상황이라 당시엔 박지성 본인만 알고 있었던 은퇴 경기였다.

의외로 차범근은 "마지막 경기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1988년 두 번째 UEFA컵 우승이후 선수로서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둘 수 있는 경기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차범근은 자신의 마지막 경기에서조차 감독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어린 선수에게 출전 기회를 흔쾌히 양보하고 경기에 나서지 않았다. 대신 아들 차두리를 벤치에 데리고 와서 마지막 경기를 함께 관람했다. 훗날 차두리가 부친의 뒤를 이어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설의 한 챕터가 끝나는 순간이 또다른 전설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묘한 여운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겨우 2골 차이로 100골 달성을 놓친 것에 오히려 주변에서 많은 아쉬움을 표한 것을 두고 "1골은 한국축구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 또 1골은 유소년 축구에 바친다는 의미로 대신하겠다"는 멋진 표현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한편으로 두 전설의 신화가 이뤄지기까지 주변 도우미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차범근은 가족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며 아내 오은미씨에 대하여 "선수생활을 마치고 돌아보니 한순간 한순간이 너무 고마웠다"고 고백했다. 또한 자신에 이어 축구의 길을 걸었던 차두리에 대하여 "축구를 했으면서도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고, 아빠(의 명성)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며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다. 차범근은 아들 차두리의 국가대표 은퇴식에 참석하여 꽃다발을 선물하며 "이제 차범근의 아들로 태어난 것 후회 안 하지?"라며 격려했고 차두리는 부친의 품에 안겨 한동안 눈물을 멈추지 못하기도 했다. 

박지성의 든든한 조력자는 아버지였다. 박지성의 부친은 전문 에이전트나 매니저가 아님에도 그의 일에 너무 개입한다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지성은 "결과적으로 제게 큰 도움이 됐다.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오직 축구에만 신경 쓸 수 있게 해주셨다"며 감사를 표했다.

MC 유희열은 토크를 정리하며 차범근과 박지성의 위상을 "각 세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처럼 차범근과 박지성도 우리들이 계속 축구를 사랑하게 만들어준 아이콘"이라고 정리했다. 

우리는 흔히 차범근과 박지성을 한국축구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어떤 분야나 사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남들이 가지 않는, 가보지 않은 길을 택했다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훗날 누군가는 그들을 뛰어넘을 수도 있겠지만, 선구자들이 남들보다 앞서 피, 땀, 눈물로 '최초의 길'을 개척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이 이룬 성공이라는 최종적인 결과보다도, 어떻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왔는지 그 과정의 가치를 더 기억해야할 이유다.
대화의희열 박지성 차범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