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이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을 말하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 갈무리.

윤여정이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을 말하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 갈무리. ⓒ BAFTA

 
"처음부터 영화나 극장에 빠진 사람이 아니다. 우연히 배우가 됐다. 21살 때 데뷔작인 <화녀>(1971)에서 유명해졌고 당시에는 내가 아주 대단한 여배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후 결혼했고 이혼했고 '싱글맘'이 됐다.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무슨 역이든 다 했다."

최근 영화 <미나리>의 북미 배급사 A24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된 배우 윤여정의 인터뷰 중 일부다. "두 아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며 겸손을 보인 윤여정. 21살 시절 윤여정을 스타로 만든 김기영 감독의 <화녀>가 무려 50년 만에 재개봉한다.

'천재' 김기영 감독의 <화녀>에서 한 중산층 가정을 파멸로 몰고 가는 가정부 명자를 연기한 윤여정은 제10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상, 제8회 청룡영화상에서는 여우주연상, 제4회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배급사 측은 <화녀>에 대해 "<미나리>로 현재 연기 인생 정점을 맞이한 배우 윤여정의 처음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인 동시에 "20대 신인 배우 윤여정의 독보적 비주얼과 파격적인 연기"를 강조하며, "한국영화 사상 가장 독창적인 세계관을 가진 김기영 감독의 시대를 앞서간 뛰어난 연출력과 획기적인 촬영 방식, 파격적인 서사, 독특한 미술 등 다채로운 볼거리를 선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게 다 '윤여정 효과' 덕택이리라. 윤여정은 지난해 말부터 영화 <미나리>로 미국 내 각종 영화상 여우조연상을 휩쓴 것을 넘어 영국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거머쥐었다. 급기야 오는 26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LA에서 열리는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고, 그렇게 윤여정에게 쏠린 기분 좋은 관심이 넉 달째 지속되는 중이다.

그 기간 동안 윤여정의 인터뷰는 물론 개별 수상소감들도 소셜 미디어 상에서 화제를 모았다.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이 대표적이다. 화상 인터뷰에서 윤여정은 "'고상한 척'(snobbish)하는 걸로 유명한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아서 더 기쁘고 영광"이란 직설적이면서도 유쾌한 소감을 전해 관심을 끌었다.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상은 로컬" 소감에 필적할 만한 어록 수준이었다고 할까.

윤여정은 대중적 관심의 척도라 할 수 있는 광고를 통해서도 맹활약 중이다. 70대 여성 배우로서는 이례적으로 맥주 광고를 촬영했고, 젊은 여성들이 주 고객층인 의류 포털 광고를 찍기도 했다.

넉 달 가까이 국내외 미디어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잡음 하나 나지 않는 윤여정을 향한 열광은 오는 26일(한국시간) 전 세계인의 이목이 쏠린 아카데미상 시상식 당일 정점을 찍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무려 50년 만에 <화녀>까지 스크린으로 소환한 윤여정, 우리는 왜 이 70대 여배우에게 이토록 열광하는가.

묘한 생활감, 쿨한 어른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주인집 할머니로 인상깊은 열연을 선사한 배우 윤여정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주인집 할머니로 인상깊은 열연을 선사한 배우 윤여정 ⓒ 지이프로덕션 , 윤스코퍼레이션

 
인터뷰를 잘 안 하기로 유명한 윤여정. 평생 배우로서 윤여정이 진행한 인터뷰보다 <미나리>를 찍고 난 이후에 진행한 인터뷰가 더 많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국내외의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여러 인터뷰나 그간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윤여정만의 관록은 무엇일까.

먼저 연기. 김기영 감독의 영화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하지만 일찍이 결혼과 미국 이민, 이혼과 연기자 복귀를 거치면서 풍파도 겪을 만큼 겪었다고 윤여정은 얘기한다. 특히 "두 아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누누이 밝혀왔던 것처럼, 이혼 이후 연기자 복귀는 1980년대 연예계에선 상상도 못할 파격이었을 터.

그래서였을까. 여러 어머니를, 중년 여성을 연기한 윤여정의 연기는 확실히 자기만의 개성이 도드라진다. 재벌가 혹은 상류층 여성을 연기하거나 하류층 혹은 밑바닥 인생을 연기할 때도 윤여정은 윤여정이란 얘기다. 그것은 때로는 꼿꼿함으로, 또 다른 표현으론 자기애로 드러나곤 한다.

타락한 욕망에 스스로 무너져가는 재벌가 안주인(영화 <돈의 맛>)을 연기할 때도, 종로 탑골공원을 배회하는 소위 '박카스 할머니'(영화 <죽여주는 여자>)로 변신했을 때도, 소매치기 아들의 골수까지 빼먹는 매정한 엄마(드라마 <네멋대로 해라>)를 연기했을 때도 그러한 윤여정표 연기는 생생하게 빛을 발했다.

<하녀>를 비롯해 윤여정의 과거 작품들을 빼놓지 않고 보아왔다고 고백한 바 있는 정이삭 감독 역시 그러한 개성에 주목했을 터.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미나리>의 할머니이자 어머니가 범상치 않은 'K-할머니'로 극에 활력을 불어 넣은 것 또한 그러한 윤여정만의 관록이자 개성이 영화 안에 잘 녹아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생활감. "나에게 대본은 내 성경"이고 "대사를 철저히 외우기 위해 연습을 많이 한다"는 윤여정. 50년 넘게 연기를 생업으로 삼아온 장인이 전하는 기본기는 분명 소중한 조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연기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볼 수 없는, 직업인으로서의 기본기 말이다.

하지만 그 뿐이 아니다. 윤여정은 캐릭터에 묘한 현실감 내지는 생활감을 부여한다. 1990년대 '김수현 드라마'의 속사포 대사나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에서 엿보이는 착착 감기는 '대사빨'이 전부가 아니다.

확실히 윤여정이 연기하는 중년 여성들은 어떤 날카로움이나 당당함을 매력이자 무기로 숨기고 있었다. 그것이 제 욕망이든 생활고이든 상관없이, 윤여정은 매 캐릭터에서 순간순간 인간이자 여성 본연의 본질을 드러내는 수고를 멈추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윤여정의 그러한 연기 지평이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한층 넓어졌다는 사실이리라. 비교적 근작인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집주인 할머니를 떠올려 보시길. 크지 않은 배역임에도 불구하고 윤여정은 온갖 평지풍파를 겪어왔으리라 짐작되는 한 인간의 면모를 비범하게 그리는 동시에 궁지에 몰린 딸 같은 주인공 찬실을 품어 주는 인생 선배의 모습을 따스하게 그려냈다.

<미나리>의 '순자'가 특별한 것도 그래서다. 윤여정은 지극히 한국적 캐릭터를 한국어 연기로 소화하며 미국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순자 또한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캐릭터에 윤여정이 온정을 불어 넣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철 지난 촌스런 명제와 달리 꾸준히 해 온 자신만의 연기를 통해 한국 이외의 관객들과 소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멋진 여성 윤여정
 
 23일 오후 온라인으로 진행된 영화 <미나리> 관련 기자 간담회. 리 아이작 정 감독과 스티븐 연은 미국 LA 현지에서 배우 윤여정, 한예리는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에 각각 자리했다.

배우 윤여정 ⓒ 부산국제영화제

 
"연기자가 가장 연기를 잘 할 때는 돈이 가장 급한 경우다." (윤여정의 과거 인터뷰 중)

그리고, 쿨한, 상식적인 어른에 대한 갈망. 윤여정은 과거 인터뷰에서 종종 생계형 배우로서 고충을 겪었던 과거를 솔직하게 드러내곤 했다. 더불어 나이 듦에 대한 본인 마의 시선과 연예인이자 여성 배우로서 겪어왔던 고충들 또한 솔직담백하게 드러내기로 유명했다. 이재용 감독이 실제 여성 배우들에게 영감을 얻어 제작한 모큐멘터리 장르 <여배우들> 또한 그런 윤여정의 면모가 잘 드러난 작품이기도 하고.

중장년에 접어들며 넓어진 윤여정의 지평은 그러한 솔직함과 함께 일종의 거리두기를 통해 강화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했지만 이후 결혼과 이혼 등으로 인해 생계형 배우 생활을 겪어야 했던 개인사가 배우이면서 엄마이자 한 개인으로서 윤여정을 훨씬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그러한 개인사와 단단함이, 또 솔직함이 배우라는 직업의 화려함이나 과시욕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그러한 윤여정만의 개성이 연기에도 묻어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쿨함'이 잘 드러난 것이 <윤스테이>를 비롯한 나영석 PD의 예능이었고.

일흔 넷 나이에도 "담배를 피우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애연가이자 "요즘 넷플릭스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얼리어답터' 할머니이며 봉준호 감독 앞에서 "감독들이 원래"라거나 "나는 왜 캐스팅하지 않느냐"며 농담을 건넨 줄 아는 유쾌함의 소유자인 배우 윤여정.

그런 윤여정은 한 분야에서 꾸준히 노력하면 일흔 넷에도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될 수 있음을 보여준 '꿈은 이루어진다'의 장본인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물론 본인은 "크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그리고 오는 26일(월요일), 세상은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수상 여부로 한바탕 떠들썩할 것이다. 수상을 하게 되면 한국 영화계의 쾌거이자 미국 내 아시아 영화인들의 부상이 부각될 것이며, 수상이 불발되면 여전한 아카데미의 보수성이 지적될 예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여정은 이미 그 어떤 배우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개척했고 성취해냈다. 영화인들은 물론 관객들 모두에게 '나이 듦'의 미학을 설파하면서.

멋진 배우이자 전세계 젊은이들과 여성들에게 용기를 준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를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윤여정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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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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