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조

드라마 <빈센조>의 한 장면 ⓒ tvN



 
DC코믹스 '배트맨' 시리즈의 주인공 배트맨은 '다크 히어로'의 전형으로 불린다. 부유한 재벌이라는 진짜 신분과 정체성을 음침한 박쥐 코스프레와 첨단장비 속에 감추고, 도시의 뒷골목을 누비며 악인을 응징하는 배트맨은 이른바 현대판 자경단이라고 할수 있다. 양지의 법과 질서만으로는 결코 처리하지 못하는 강력하고 위험한 악인들을 음지에서 초법적인 수단으로 대신 응징한다는 것이 배트맨의 매력이다. 그래서 그는 다크나이트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사회성 짙은 범죄물이나 미스터리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면서 한국판 '다크나이트'에 가까운 주인공 캐릭터들도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지난 9일부터 첫 방송을 내보낸 SBS 금토드라마 <모범택시>는 억울한 피해자를 위해 복수를 대신해주는 이야기를 다룬 '사적 복수 대행극'을 표방한다. 베일에 가려진 택시회사 무지개 운수를 중심으로 주인공인 택시기사 김도기(이제훈)가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악인들을 응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의가 실종된 사회, 전화 한 통이면 오케이'라는 문구는 <모범택시>의 줄거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문구다. 

tvN 주말드라마 <빈센조>의 주인공 빈센조 까사노(송중기)는 한국계 이탈리아 마피아 출신 변호사다. 당초 금가프라자에 감춰준 금괴를 찾는다는 개인적 목적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빈센조는 우연한 계기에 '바벨그룹'이라는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마주친 뒤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결국 약자들을 대신하여 권선징악을 집행하는 영웅으로 거듭난다. 

바벨그룹과 그들을 변호하는 로펌 우상은 이른바 우리 사회의 '타락한 기득권' 전체를 상징하는 집단이다. 검찰과 언론까지 좌지우지하면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되는 바벨을 상대로 빈센조는 범죄자 출신답게 '악인의 방식으로 악을 응징한다'는 철학을 내세운다. 폭력, 살인, 납치, 조작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한만큼 몇 배로 갚아주는 것이 빈센조의 복수 방식이다.

최근 종영한 JTBC 범죄수사극 <괴물>의 주인공 이동식(신하균)과 한주원(여진구)은 '괴물을 잡기 위하여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동식은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누명까지 뒤집어쓰며 '가해자로 몰린 피해자'라는 기구한 운명을 살아야했던 인물이다. 처음에 이동식을 유력한 용의자로 여기고 대립하던 한주원은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면서 오히려 이동식과 의기투합하여 진짜 괴물들을 사냥하는데 앞장선다.

두 사람은 경찰임에도 극중에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증거 조작, 은닉, 협박, 거짓말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대하고 견고한 권력과 사회적 카르텔로 뭉쳐 있는 진짜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법과 질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빈센조>나 <모범택시>의 주인공들이 판타지에 가까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괴물>은 더 현실적이다. 초인적인 능력도 외부의 지원도 없이 거악과 외롭게 맞서 싸워야했던 이동식과 한주원의 처절한 상황은, 이들이 광기어린 괴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SBS 금토드라마 <모범택시>

SBS 금토드라마 <모범택시> ⓒ SBS


 
드라마가 담아내는 사건들은 현실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있다. <모범택시>는 지적장애인들에 대한 인권유린과 착취,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형을 받는 성범죄자, 지능화된 10대들의 학교 폭력 등 실제로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유명한 사건들의 떠올리게 한다. <괴물>은 가상의 도시 만양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둘러싸고, 그 이면에 자리 잡은 도시 개발을 둘러싼 이권다툼과 부패한 기득권끼리의 유착관계라는 사회적 문제를 조명하면서 '인간의 욕망이 있는 곳 어디서나 괴물이 나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국내 드라마에서 과거처럼 마냥 정의롭고 반듯한 주인공 대신, 이렇게 명분이나 수단에 연연하지 않는 '무법자형' 캐릭터가 점점 득세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그만큼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부조리한 현실들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과 무관하지 않다. 드라마에는 극중 인물들의 대사를 통하여 법과 제도의 한계, 진정으로 약자들을 보호하는데 관심이 없는 사회 시스템의 모순 등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무법자들은 단죄하는 대상이 거대한 권력자이든 어린 학생이건 개의치 않는다. 악인들의 악행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복수의 방식 역시 과격하고 잔혹해진다. 영화 속 배트맨처럼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무법자들이 악인들을 응징하는 장면들이 화끈해질수록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도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드라마라도 사회 질서 자체를 부정하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만의 정의를 구현하려는 무법자들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점은 다시 생각해봐야할 부분이다. <빈센조>는 판타지와 권선징악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살인 등을 과도하게 등장시킨다.

<빈센조>는 주인공의 대사를 통하여 "마피아는 조직끼리 싸우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현실의 마피아가 어떤 범죄집단인지를 생각하면 어불성설이다. 극중 빈센조의 잔혹한 활극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한국 사회를 싸잡아 대책없는 막장 세계관으로 묘사하면서, 정작 진짜 실존하는 심각한 범죄집단인 이탈리아 마피아의 살인과 폭력을 '폼나게' 미화한다는 것은 심각한 모순이다.

tvN 월화드라마 <마우스>의 주인공 정바름(이승기)은 최근 드라마에 범람하고 있는 무법자형 주인공들의 모순과 한계를 짚어낸 캐릭터이기도 하다. 성실한 순경이던 정바름은 사고 후 기억을 잃고 자신이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뇌를 이식받아 살인 충동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진짜 사이코패스는 오히려  정바름 본인이었고, 평범한 인간의 뇌를 이식받으며 점점 보통 사람처럼 연민, 죄책감같은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살인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흉악 범죄자들을 대신 응징하는 것으로 일종의 자기 만족과 영웅 심리에 빠져있던 정바름은 본인의 실체와 과거를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시청자들은 <빈센조>와 <모범택시>의 주인공들처럼 다크 히어로가 악인들을 대신 응징해주는 활극을 예상했지만, <마우스>는 드라마적 포장과 주인공 보정을 한꺼풀 벗겨내면 그 역시 '사적 복수'라는 또다른 이름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문제인식을 짚어냈다.

<괴물>의 주인공 이동식과 한주원은 목표했던 악인들을 소통하는데는 성공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끝까지 자신들의 행위 자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한주원은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받았던 이동식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평생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또한 이동식은 "죄는 죄지은 놈들이 받는 것"이라며 오히려 그간 자신이 진범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저질렀던 각종 범법행위에 책임을 지기 위하여 한주원에게 자신을 체포해줄 것을 요구한다. 한때 괴물로 흑화했지만, 결국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면 다시 구원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이었다.

무법자형 히어로들이 활개치는 이야기들은 당장의 오락적인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키는 데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현실의 공감대와 설득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여운이 없는 공허한 판타지에 그치고 만다. <괴물>이나 <모범택시>처럼 사회의 현실과 부조리를 반영하되, 어느 정도 주인공들의 정체성과 한계에 대한 부분도 묘사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실수에 대한 반성을 히어로들도 수반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권선징악의 활극'이라는 명분으로 자극적이고 반사회적인 설정들이 지나치게 난무하는 최근의 드라마들이 '지켜야할 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할 이유다.
모범택시 빈센조 괴물 마우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