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계에서 시작된 학교 폭력 폭로가 연예계로 급속히 번지는 중이다. 이틀이 멀다 하고 새로운 이름이 오르내리고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와 가해자로 지목된 이, 혹은 소속사가 일종의 진실 공방을 벌이기도 한다.

최근 연예·문화면을 장식하는 학교 폭력 관련 뉴스는 당사자 양측을 넘어 이들의 직업 전선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양새다. 배우 지수가 논란이 된 KBS 드라마 <달이 뜨는 강>은 배우 본인이 과거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재촬영에 들어갔다. 박혜수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디어엠>은 예정된 방송 일정을 무기한 미루고 있다. 함께 일한 동료 배우와 스태프, 제작사까지 불똥을 온몸으로 맞은 셈이다.

상황의 심각성, 예측 불가능성을 인지한 연예계에선 이런 폭로 양상을 두고 발 빠르게 대응을 준비 중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간 시시비비와 처벌은 사법부의 몫이지만 그로 인한 여파는 고스란히 동료들에게도 미치고, 그로 인한 물질적 피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는 대형 및 중소기획사를 비롯해 주요 제작사 관계자와 접촉해 학교 폭력 폭로와 관련, 이들이 어떻게 상황을 인지하고 대처하고 있는지 알아봤다.

생방송 수준의 촬영 감내하고 있는 스태프들
 
'달이 뜨는 강' 지수, 해보고 싶던 달 지수 배우가 15일 오후 비대면으로 열린 KBS 2TV 새 월화드라마 <달이 뜨는 강> 온라인 제작발표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달이 뜨는 강>은 고구려가 삶의 전부였던 공주 평강과 사랑을 역사로 만든 장군 온달의 운명에 굴하지 않은 순애보를 그리는 퓨전 사극 로맨스 드라마다. 15일 월요일 밤 9시 30분 첫 방송.

배우 지수 ⓒ KBS

 
연예계로 확대된 학교 폭력 관련 이슈는 드라마를 넘어 예능으로, 동시에 각 매니지먼트 회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디어엠>은 지난 2월 26일 첫 방송예정이었으나 편성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KBS 시청자청원 게시판에는 '학교폭력 의혹 배우 박혜수의 하차를 청원한다'는 글이 12일 현재 4천 명 이상의 동의를 얻고 있다. 재촬영에 들어간 <달이 뜨는 강>은 지수를 대신해 배우 나인우가 온달 역으로 투입됐다.

KBS 2TV 새 예능 <컴백홈> 또한 출연을 예정한 조병규가 학교 폭력 의혹에 휩싸이자 결국 그의 출연을 보류하다고 발표했고, SBS 예능 프로그램 <맛남의 광장>에 출연했던 에이프릴 이나은은 폭로 이후 출연 분량 대부분이 편집됐다. 이나은이 참여한 SBS 드라마 <모범택시>도 60% 이상 사전 촬영이 진행된 상황이지만 여론을 수렴해 배우 표예진과 함께 전면 재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폭로 현상이 이어지며 제작사와 방송국은 금전적 손해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일부 관계자들은 "대체 다음은 누구인지 알려 달라"며 기자들에게 업계 소문을 구하기도 했다. 제작사는 재촬영으로 늘어난 제작비에 힘겨워 하고 있고, 해당 프로그램 스태프들은 생방송 수준의 촬영을 감내하고 있다. 일부 배우들은 선의로 출연료를 받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출연료가 상대적으로 적고 여러 작품 일정에 얽혀 있는 조연과 단역 배우들은 마냥 그 흐름을 따를 수만은 없어 발을 구르고 있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제작 현장에선 이번 논란으로 캐스팅 등 드라마 제작 시스템에도 일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에 "캐스팅 전에 (연예인의) 과거를 캘 수도 없고 난처하다는 분위기"라면서 "학창시절 생활기록부 제출을 요구하겠다는 곳이 있다는 소문도 있더라. 하지만 그걸로(생활기록부로) 뭘 알 수 있겠냐"고 토로하기도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제작사 차원에서 (출연 연예인을) 사전에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학교폭력 관련 서약서를 쓰는 정도가 전부이지 않을까"라며 "현재 방송 제작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매니지먼트가 1차로 필터링을 했어야 했다. 제작사는 매니지먼트와 계약하는 입장이기에 위험 부담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 드라마 제작 프로듀서는 "출연진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 등에 한해 손해배상 관련 조항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계약서에 구체적으로 조항을 넣을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며 "상대적으로 이런 논란에서 자유로운 40대 이상의 배우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하는 게 안전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20, 30대 배우들은 SNS 등이나 주변 평판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갈 수도 있다"고 답했다.

매니지먼트 협회, 제작사 협회 등 논의 시작해
 
 OCN <경이로운 소문> 배우 조병규 인터뷰 사진

배우 조병규 ⓒ HB엔터테인먼트


이처럼 학교 폭력 폭로 이슈로 제작사와 매니지먼트사 간 책임 소재까지 운운하는 분위기가 나오면서 일선 매니지먼트 관계자 또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대형 기획사에서 중견 신생 기획사까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배우의 인성, 과거 행적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참고로 배우 나인우의 경우, 소속사 쪽에서 과거 및 방영 이후에 문제가 일절 없음을 약속한다는 취지의 서약서까지 쓰고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연예인 계약 관련, 해당 연예인의 품위와 인성 문제를 다루는 조항은 이미 존재한다. '매니지먼트 표준계약서' 제5조 3항엔 '을은 연예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대중문화예술인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되며, 갑의 명예나 신용을 훼손하는 행위를 해서도 아니 된다'라는 문구가 있고, 제17조 1항엔 '갑 또는 을이 이 계약상의 내용을 위반하는 경우, 그 상대방은 위반자에 대하여 14일간 유예기간을 정하여 위반사항을 시정할 것을 먼저 요구하고, 그 기간 내에 위반사항이 시정되지 아니하는 경우에 상대방은 계약을 해제 또는 해지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해당 조항을 근거로 소속 연예인에게 계약해지 및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되어있지만 최근 몇 년간 있었던 다양한 사고 사례, 즉 '미투'와 현재 '학폭' 등을 연구해 계약서를 보충, 정리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슈가 된) 사건들이 회사와의 전속계약 체결 이전에 일어난 경우가 많아 보이는데 이에 적합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개정되면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전했다. 연예인 검증 시스템 마련 및 보완에 대해 이 관계자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전속계약을 맺고 일하는 게 업계 관행이다 보니, 특별히 생활기록부나 범죄기록 증명서 등을 요구하거나 확인하진 않는다"고 답했다.

중견 기획사 출신으로 최근 신생 회사를 설립한 한 관계자는 "요즘 SNS 발달로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이젠 스타성뿐만이 아니라 인성도 중요한 시기가 됐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계약을 맺을 때 생활기록부를 요구하진 않지만 과거 일을 면밀하게 물어보고 있다. 계약서에도 2년 전부턴 품위 유지뿐만 아니라 학교 폭력, 성범죄 관련 내용을 분명하게 넣고 있다"며 "연예인을 꿈꾸는 친구들이 많을 텐데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다면 자신의 행동이 어느 날 갑자기 되돌아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현재 시스템으론 제작사나 방송국이 매니지먼트사에, 혹은 매니지먼트사가 연예인 당사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긴 어려워 보인다. 과거의 일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기 때문. 법무법인 정세 김민기 변호사는 9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출연 계약 이전의 부적절한 행위로 (연예인이) 손해배상금을 지급한 사례는 없었다. 위약금을 청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계약서에 '과거 학교폭력 등 그런 행위를 한 적이 없음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넣을 수는 있지만, 지금의 계약서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의견을 전했다.

이 때문에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아래 드제협)나 한국연예매니지먼트(아래 연매협) 차원에서의 공론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송병준 드제협 회장은 "최근 연매협, 연기자노조 측을 만나서 논의했고, 일련의 사태와 연관해 호소문을 준비 중이다. 호소문은 이른 시일 안에 발표할 것"이라 알리면서 "계약서 조항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아직 구체적으로 만들진 않았다. 최대한 필터링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 중"이라 밝혔다.

이어 그는 "1차적으론 제작사와 방송국 간 문제겠지만 매니지먼트사와 소속 연예인 모두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라며 "만에 하나 피해자가 아닌 사람, 잘못된 소문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면 정말 중대한 문제"라고 우려를 표했다.

전문가들 "언론의 검증과 사회적 각성이 절실"
 
'올해의 브랜드 대상' 에이프릴 이나은, 해맑은 눈부심 한국소비자포럼  주최로 12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열린 <2020 올해의 브랜드 대상> 시상식에서 라이징스타 여자아이돌 부문의 에이프릴(윤채경, 김채원, 이나은, 양예나, 레이첼, 이진솔)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에이프릴 멤버이자 배우인 이나은 ⓒ 이정민

 
이런 우려와 함께 현업 종사자들 사이에선 폭로 방식만이 최선인지 여러 의견도 나온다. 한 중견 기획사 관계자는 "진실한 사과를 받고 싶고, 과거를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라면 1차적으로 폭로만 할 게 아니라 직접 해당 소속사에 연락하는 방법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했다. 그는 "피해자 입장에선 작은 복수를 원할 수도 있겠지만,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일방적으로 올리는 폭로는 너무도 많은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 뿐 근본적 해결이 될 순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전문가들은 대체로 지금의 폭로 양상은 이미 잠재돼 있는 것이며 구조적 문제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검증 없는 언론 보도에 대한 반성도 촉구했다.

이종혁 광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미투 운동이라는 게 넘볼 수 없던 권력에 도전하는 형태로 벽을 깼다면 그 흐름이 스포츠 스타, 연예인으로 넘어온 건데 이제 폭로는 중요하지 않다. 이 시점에서 학교나 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라며 "(언론의 보도 방식이 누가 먼저 보도하는지 경쟁하는) 경마식 저널리즘은 안된다. 학교 폭력은 더 이상 스토리가 필요하지 않다. 누가 폭로하고 누군가 인정하고 사라지는 것 이상으로 나올 얘기는 없다. 유명인 사례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학교나 선생님들이 어떻게 흡수하고 있는지 다루고, 일종의 캠페인을 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이종임 경희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객원교수는 "성과주의, 무한경쟁이 신념화되고 우리 사회에서 공정성이 잘 작동 안 한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의 부당 성공 사례에 대중 분노가 반영되는 것"이라 분석했다.

그는 "SNS 폭로의 파급력이 크다는 걸 학습한 상황에 언론의 역할에 대한 실망도 작용하면서 미투 운동, 여러 해시 태그 운동이 벌어진 것"이라면서도 "폭로에 의존하는 방식은 자극적이고 관계자를 대상화시키며 사실 판단을 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언론 보도가 이뤄지며 스타들을 무대 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에만 집중하게 하는 점은 우려스럽다"는 의견을 전했다.

이 교수는 "한국의 교육시스템, 스타 육성 과정에서의 인성교육, 대중의 역할까지 다각적 차원에서 토론과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며 "언론은 폭로 글을 그대로 옮겨 보도할 게 아니라, 대중의 공정성 요구를 응징 및 사회에서 해당 스타를 격리하는 식으로 이끌어가지 않게 현실 문제를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교폭력 학폭 스포츠 달이 뜨는 강 디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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