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KGC인삼공사 프로배구단의 경기. 1세트 흥국생명 김연경이 동료의 득점에 기뻐하고 있다. 2021.2.19

19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KGC인삼공사 프로배구단의 경기. 1세트 흥국생명 김연경이 동료의 득점에 기뻐하고 있다. 2021.2.19 ⓒ 연합뉴스

 
'학교폭력 논란' 이후 깊은 수렁에 빠졌던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이 시즌 최다 4연패 사슬을 끊고 모처럼 기사회생했다. 흥국생명은 19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도드람 2020-2021 V리그 여자부 5라운드 KGC인삼공사와의 홈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1(25-18 22-25 25-17 25-22)로 승리했다.

흥국생명은 핵심선수였던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가 학교폭력 논란으로 구설수에 휘말리며 팀에서 한꺼번에 이탈한 뒤 연패의 수렁에 빠졌다. 특히 최근 3경기에서는 연속으로 0-3 셧아웃 완패를 당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16일 IBK기업은행전에서는 0대 3으로 완패했는데 시즌 최소 득점과 최다 점수차 패배라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박미희 감독의 리더십과 흥국생명의 선수단 관리 능력도 덩달아 도마에 올랐다. 흥국생명을 둘러싼 논란이 어느덧 배구계를 넘어 사회적 이슈로까지 문제가 커지면서 여론의 과도한 관심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선수들은 경기에 집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팀 분위기가 뒤숭숭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삼공사를 만난 이날의 흥국생명은 그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선수들의 눈빛에서부터 한번 해보자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4연패 기간 동안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불안한 서브 리시브로 공격 전개 작업부터 어려움을 겪었던 흥국생명이지만 이날은 리시브가 살아나며 세터 김다솔의 토스도 안정감을 찾았다. 이다영이 있을 때만 해도 출전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경기력도 기복이 심했던 김다솔이지만, 이제는 어엿한 주전 세터로서 남은 시즌 동안 팀을 이끌어가야 하는 상황이기에 자신감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또한 지독한 슬럼프로 '불운아'라는 놀림까지 받던 외국인 선수 브루나의 부활은 흥국생명에게 있어서 이날 승리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부상으로 팀을 떠난 루시아를 대신해 시즌 중 팀에 합류한 브루나는 그동안 팀에 녹아들지 못하고 부진했다. 하필이면 입국 직후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으며 치료를 받고 합류하느라 컨디션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16일 기업은행전에서는 외국인 선수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단 1득점, 공격 성공률은 7.69%에 그치는 최악의 부진을 보이며 있으나마나한 선수로 전락하기도 했다. 쌍둥이 자매도 없는 상황에서 브루나의 부진은 자연히 에이스 김연경의 부담이 가중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날 만큼은 모처럼 흥국생명에게 '승리를 부르나'였다. 1세트 초반부터 세터 김다솔과의 호흡이 맞아떨어지며 공격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192cm 장신을 이용하여 높은 타점에서 내리꽂는 브루나의 강타는 상대 수비가 알고도 막기 힘들었다. 브루나는 이날 팀내 30득점에 공격성공률 45.61%를 기록했으며 블로킹도 3개나 잡는 등 한국에 온 뒤 사실상 처음으로 외국인 선수다운 활약을 펼쳤다.

김연경은 여전히 김연경이었다. 최다득점은 브루나였지만 김연경도 24점에 공격성공률은 더 높은 51.21%를 기록하며 팀 공격을 이끌었다. 특히 1세트에만 7득점에 87.50%(7득점)이라는 놀라운 공격 성공률로 4경기만에 첫 세트승을 이끈 김연경의 활약이 초반 분위기를 흥국생명으로 끌어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2세트에 인삼공사의 반격으로 세트스코어 1-1이 된 고비에서 김연경은 중요한 고비마다 어려운 공격을 책임지면서 해결사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김연경은 이번 학교폭력 사태로 인하여 본의아니게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서야했다.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다영의 SNS 저격과 팀 내 불화설이 도마에 오르며 그 대상으로 지목된 김연경도 덩달아 이름이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사건이 커지면서 쌍둥이 자매가 전력에서 이탈하고 팀은 연패에 빠지자, 리더이자 에이스로 팀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홀로 고군분투해야했다. 국내 복귀와 도쿄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자발적으로 연봉을 삭감하는 '페이컷'까지 감수했던 김연경으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연경은 슈퍼스타답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선수이자 리더로서 묵묵히 자신이 해야할 일에만 전념했다. 학폭논란으로 여러 선수들이 논란에 휘말린 것은 흥국생명과 배구계에는 비극이었지만, 한편으로 김연경의 미담과 프로의식이 재조명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패를 탈출한 인삼공사전에서도 공격이나 수비가 성공할 때마다 주먹을 불끈쥐며 열정적인 파이팅을 불어넣었고, 동료가 좋은 플레이를 펼쳤을 때는 누구보다 크게 환호하고 박수를 치며 독려하는 모습으로 팀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경기를 마친 뒤 흥국생명 선수들은 마치 우승이라도 차지한 듯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흥국생명에서만 7년째 지휘봉을 잡고 있는 박미희 감독은 "챔프전 우승보다 오늘 경기 승리가 더 기쁘다"며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흥국생명 선수단이 학폭 사태 이후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담감을 안고 싸워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흥국생명은 여전히 2위 GS칼텍스(16승 9패, 승점 48)에 5점차로 앞서며 리그 선두(18승 7패 승점 53)자리를 지키고 있다. 봄배구 진출은 이미 확정적이다. 하지만 더 이상 시즌 초반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나 '흥벤져스' 소리까지 듣던 그 팀은 아니다. 흥국생명은 앞으로 남은 경기와 플레이오프에서도 매 경기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악전고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패를 탈출한 경기에서 흥국생명 선수들이 보여준 투지와 집중력은 오히려 어우흥 시절의 절대강자스러운 모습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스포츠에서 포기하지 않는 투지와 프로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흥국생명 선수들 스스로에게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을 경기가 될 전망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이번 사태는 흥국생명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기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선수단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낡은 고름을 짜내고 진정한 '원팀'으로 거듭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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