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웃음만 주던 예전의 성리학자가 아니다. 강을준 감독이 이끄는 프로농구 고양 오리온이 한층 진화한 '성리학개론'을 앞세워 무서운 상승세로 올시즌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오리온은 13일 원주종합체육관에서 벌어진 2020-2021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원주 DB와의 정규리그 3라운드에서 89–65로 대승하며 최근 2연승을 내달렸다. 최근 7경기에서 6승을 챙긴 오리온은 12승 8패로 단독 2위까지 뛰어오르며 선두 안양 KGC 인삼공사(12승 7패)를 불과 반게임 차이로 추격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조기종료된 지난 2019-20시즌 최하위(13승 30패)에 그친 팀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반년 사이에 전혀 다른 팀이 됐다.

말그대로 '강을준 감독의 재발견'이라고 손색이 없을만한 성과다. 오리온은 지난 시즌 성적부진으로 사임한 추일승 전 감독의 뒤를 이어 강을준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처음에는 의외의 선임에 기대보다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

강을준 감독은 2011년 창원 LG 사령탑에서 사임한 이후 무려 9년만의 프로무대 복귀였다. 공백기간동안 방송 해설위원을 잠시 맡았던 것을 제외하면 대학 등 아마무대에서도 지도자 활동경력이 전무했다. 많은 농구팬들은 강 감독의 복귀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지만 마냥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었다.

역대 프로 사령탑 중에서 공백기가 길었던 지도자치고 제대로된 성과를 낸 인물은 드물다. 이충희(창원LG-대구 오리온-원주 동부), 신선우(창원 LG-서울 SK) 등 과거에 성과를 냈던 감독들이라도 달라진 현대농구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실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9년은 역대 프로농구 감독중 가장 오랜 공백기를 거쳐 사령탑으로 복귀한 사례였다.

강을준 감독은 현역 시절 실업 삼성전자에서 수비형 센터로 활약했지만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프로무대에서 지도자로서의 성과도 그리 특출난 편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창원 LG 시절 3년간 모두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성공했으나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고, 특히 단기전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감독으로서의 역량보다는 오히려 작전타임에서 보여주는 기발한 어록으로 더 화제를 모았다. '코트의 성리학자'라는 별명도 강 감독 특유의 개성강한 영남 사투리 발음 때문에 '승리'가 성리처럼 들린다는 데서 비롯된 패러디였다.

사실 말이 좋아 성리학자지, 냉정히 말하면 시작은 그 조롱과 냉소의 의미에 더 가까운 별명이었다. 마치 옛날 스포츠 만화의 대사를 연상시킬 만큼 뭔가 오글거리는 화법, 작전타임에서 전술적인 이야기보다는 선수들의 정신력을 강조하거나, 스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듯한 지도철학은, 흔히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농구만 추구하는 '꼰대'같은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그만큼 농구팬들 사이에서 강을준 감독은 희화화된 이미지가 강했고, 성적보다는 이대성같은 개성강한 선수들과 어떤 '해프닝'을 일으킬지 더 기대하는 반응이 더 많았다.

하지만 강을준 감독의 오리온은 세간의 성급한 선입견을 보란 듯이 성적으로 불식시키고 있다. 전초전이었던 컵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리그에서도 순항을 거듭하며 최근의 성적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3일 고양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고양오리온-울산현대모비스 경기. 100승을 달성한 고양오리온 강을준 감독이 선수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3일 고양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고양오리온-울산현대모비스 경기. 100승을 달성한 고양오리온 강을준 감독이 선수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엇박자' 우려 강을준·이대성 조합 성공적

모두가 엇박자를 우려했던 강을준 감독과 이대성의 조합은 현재까지는 성공적이다. FA로 오리온 유니폼을 입은 이대성은 올시즌 경기당 16점, 5리바운드, 5.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첫 해부터 팀의 에이스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모비스와 KCC를 거치며 뛰어난 개인기량에도 벤치의 활용도에 따라 기복을 타는 선수였던 이대성은, 오리온에서는 강을준 감독의 신뢰와 밀당 속에 커리어 하이 시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트레이드 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오리온은 지난 11월 11일 모비스-KCC와 함께 3각 트레이드를 통하여 포워드 최진수를 내주고 국가대표 센터 이종현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모비스에서 잦은 부상으로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던 이종현은 고려대 선배인 이승현과 다시 함께하게 된 오리온에서 심리적인 부담을 덜고 조금씩 부활의 나래를 펴고 있다. 오리온은 이종현 영입 이후에만 6승 1패의 상승세를 이어가며 전혀 다른 팀이 됐다.

강을준의 오리온은 올시즌 '고공농구'라는 새로운 팀컬러를 구축했다. 현대농구가 스피드와 공간활용을 강조하는 스몰라인업을 추구하는 트렌드와 달리, 장신 빅맨 2~3명을 한꺼번에 투입하는 고전적인 빅 라인업으로 오히려 역발상을 노린 것.

오리온은 제프 위디-디드릭 로슨-이종현-이승현까지 4명의 정상급 빅맨을 보유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더블 포스트-트리플 포스트까지 가동하고 있다. 수비력이 좋지만 공격력이 다수 부족한 위디, 부상전력과 경기체력 문제롤 오랜 시간을 소화하기 힘든 이종현, 골밑수비에 능하지만 3점슛까지도 가능한 이승현, 각기 다른 선수들의 장단점을 상호 보완해주는 구조다.

교체 가능성까지 거론되던 위디는 지난 DB전( 21점 8리바운드 5스틸 4블록)에서는 올시즌 첫 20득점을 돌파하는 등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승현도 그간 혼자 외국인 선수까지 상대해야 했던 수비와 체력적 부담에서 벗어나 플레이가 한층 여유로워졌다. 2옵션 로슨은 제한된 출전시간 속에서도 높은 생산성을 보이며 오리온의 경기플랜에 다양성을 더하고 있다.

강을준의 고공농구는 아직 완성된 전술이라고는 할 수 없다. 때로는 볼이 제대로 돌지않거나 스피드에서 문제점을 초래하여 역공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SK나 DB전처럼 높이의 장점만 극대화되었을 때는 상대팀에 그야말로 알고도 막기 힘든 악몽을 초래한다. 대부분의 상대팀들은 오리온이 트리플 포스트를 가동하면 지역방어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오리온으로서는 미스 매치를 활용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 페인트 존 공략이 수월해지는 이점이 생긴다.

무명 선수 출신이었던 강을준 감독은 오히려 지도자가 된 이후 더 많은 화제와 관심을 받으며 농구인생의 뒤늦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리온은 추일승 감독 시절이던 2015-16시즌 우승 이후로는 팀성적이 하향곡선을 그리며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강을준 감독의 선임이 지금까지는 기대했던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신의 한수로 재조명받고 있다. 더 이상 웃음거리가 아닌 진짜 승리 공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강을준의 성리학개론 2막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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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준 고양오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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