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좌파 세력과 좌파 언론에 대항하기 위해 출마했습니다. 미국은 결코 사회주의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미 대선 직전 유세에 나선 트럼프 발언 중)

'매카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1950년대 얘기가 아니다. 심지어 버니 샌더스에 비해 굉장히 '중도적'인 조 바이든을 '좌파'라 몰아붙인다. 코로나19 위기를 전하는 언론을 향해 "투표 못 하게 하려는 것"이라며 욕설을 서슴지 않는다.

오랜 방송 진행 경험을 바탕으로 TV 카메라와 미디어 친화적인 트럼프의 유세전은 이렇게 '쇼'이자 '막말 대잔치'이지만, 극렬 지지자들을 자극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절박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낙선한다면 천문학적인 부채를 상환해야 한다. 그간의 의혹들로 인해 기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절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절박함이 불러온 것은 미국사회의 전반적인 퇴행이다. 트럼프 지지자와 반트럼프 세력 간의 폭력 시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통행마비는 기본이요, 총기 판매가 급증한 것도 모자라 유세 현장에 기관총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바리케이드도 기본이란다. 백화점이든 상점이든, 대도시를 중심으로 대선 결과에 따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력 시위와 폭동을 대비 중이다. 이쯤 되면, 퇴행을 넘어 공황 상태다. 가히 '신세계'라 할만 하다.

신세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발코니에 서서 마스크를 벗고 있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발코니에 서서 마스크를 벗고 있다. ⓒ 연합/EPA

 
절박한 것은 트럼프나 바이든뿐만이 아닌 것 같다. 트럼프의 재선을 막으려는 유권자들도, 열성적인 트럼프 지지자들도 절박하긴 마찬가지다. 이를 방증하듯, 1억 명이 넘는 유권자들이 우편투표를 포함한 사전투표로 몰렸다. 전통적으로 투표율이 높으면 '진보'가 유리하다지만,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미 유력 언론들이 조 바이든 공개 지지에 나섰다. 각종 여론조사 지표 역시 조 바이든의 우세를 점쳤다. 4년 전에도 그랬다. 트럼프의 당선을 예상한 이는 극소수였다. 이번엔 어떨까.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카오스다. 이를 방증하듯, 역대급 사전투표 열기와 달리, 대선일인 '슈퍼 화요일'이 다가올수록 바이든과 트럼프의 여론조사 지지율 격차가 좁혀졌다.

투표 결과가 어찌 됐든 혼란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이 압승한다 해도, 우편투표의 투명성을 근거로 트럼프가 소송전을 벌이고 선거 불복을 선언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트럼프가 대법원 판결까지 끌고 간다면, 말 그대로 '헬아메리카'가 펼쳐지는 건 시간 문제다. 이 또한 트럼프가 공공연히 암시해온 시나리오다.

이같은 퇴행과 난맥상을 그저 트럼프가 불러온 비극이라고 치부하면 오산이다. 간접선거와 선거인단제도, 승자독식 방식으로 요약되는 미국의 선거제도, 즉 단순한 듯 복잡하고 때때로 국민들의 의사를 100% 반영하지 못하는 듯한 이 선거제도의 맹점이 '트럼프 재선' 시나리오를 짜줬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의 뉴미디어 그룹 VOX와 넷플릭스가 공동제작하고,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가수 셀레나 고메즈, 존 레전드가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멘터리 <익스플레인 : 투표를 해설하다>는 미국의 선거제도가 이미 망가질 때로 망가졌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지난 9월 공개, 우편투표의 열풍까지 반영된 따끈따끈한 다큐다.  

제작진에 의하면, 불합리한 투표권과 만연한 금권선거, 기득권을 강화시키는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자신의 당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망친 주범들이다. 25분 짜리 3편으로 이뤄진 이 다큐야말로 미국은 왜 트럼프라는 희대의 정치인을 탄생시켰는지, 그렇다면 왜 다시 '투표'와 '선거'인지에 대한 짧고 명쾌한 해설이라 할 수 있다.

누가 미국의 선거제도를 망쳤나

미국인들이 자랑하는 건국 헌법에 투표권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투표 자체가 백인 남성들의 특권이었다. 이를 흑인들에게, 여성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들에게, 그리고 18세까지 유권자들에게 나눠주는 과정 자체가 미국 민주주의의 발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투표가 특권이 아닌 시민의 권리로 만드는 과정 말이다.

이를 두고 주지사 출신인 배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는 "시스템이 조작됐고, 사람들이 분노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유색인종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뉴욕주 하원의원은 "미국의 민주주의는 고장났다"고 단언한다. <익스플레인 : 투표를 해설하다>의 1편 '권리와 특권 사이'는 정치인들이 투표권을, 선거 규정을 법률(이라 쓰고 정치적 이익이라 부르는)에 의해 조절하는 시스템 자체가 문제라고 말한다.

일례로, 미국의 경합주 중 하나인 플로리다 주는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투표권을 박탈해 버렸다.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이들 전과자들은 법적 투쟁을 불사해야 했다. 이들의 권리를 박탈한 공화당 출신 주지사가 얻는 이익은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표심이다. 제작진은 개표 결과를 제시하며 이를 통해 근소한 차로 당선된 정치인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플로리다만이 아니었다. 비단 공화만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각 주가 자율적으로 통제하는 투표권은 역사적으로 인종문제와 결부된 사안이었다. 이른바 '유권자 억제'다. 가급적 사람들을 투표장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와 투표를 요식행위로 만들고, 각 당의 유불리에 따라 정치를 특권층만의 잔치로 만드는 것 말이다.

설상가상 보수적인 대법관이 우세인 미 대법원은 2013년 투표권법에 대한 규제를 풀어버렸다. 연방정부의 승인 없이 주 정부가 선거법을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왜 지난 9월 작고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미국 연방대법관의 후임으로 '젊은 보수'라 일컬어지는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지명했는지 설명하는 역사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바뀐 투표권법에 의해 불이익을 받는 것은 흑인과 유색인종, 그리고 하층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투표권 제한도 문제지만 투표를 하기 위해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 역시 까다롭다. 신분확인법 자체가 투표권 제한으로 연결되는 셈이다. 투표라는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거나 행사하려고 해도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하는 이들이 상존하거나 늘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19의 확산이 이런 문제들을 훨씬 더 악화시켰다.

미국인들이 이번 대선에서 왜 우편투표에, 조기투표에, 부재자 투표에 몰려들었는지가 설명된다. 이렇듯 투표권 제한이란 불합리가 기본권 제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의 투표와 선거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불합리는 대놓고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트럼프 시대에 더 강화됐다.

당선 직후 트럼프는 지난 대선의 부정투표 여부를 발본색원하겠다고 나선 바 있다. 최근 들어 미 우정청의 신뢰성을 공격하며 선거 이후 우편투표 자체를 무력화시킬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런 가운데 다큐 제작진은 후반부 직접 투표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 백인, 부유층, 노년층이라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투표권 제한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란 얘기다. 투표권 자체가 누구에게는 투쟁의 산물인 나라, 투표를 막기 위해 정치인들이 제도를 바꾸고, 이를 대법원이 승인해버린 나라 미국의 현실이 이 정도다.

고장난 시스템의 수혜자
 
 미국 대선을 사흘 앞둔 주말인 10월 31일(현지시간) 오전.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문구가 적힌 깃발과 성조기를 부착한 차량이 경적을 울리면서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에 모여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유한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 앞에 위치한 공립도서관 주변 주차공간은 순식간에 대형 트럭과 픽업트럭, 승용차 등 각종 차들로 가득 채워졌다.

미국 대선을 사흘 앞둔 주말인 10월 31일(현지시간) 오전.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문구가 적힌 깃발과 성조기를 부착한 차량이 경적을 울리면서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에 모여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유한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 앞에 위치한 공립도서관 주변 주차공간은 순식간에 대형 트럭과 픽업트럭, 승용차 등 각종 차들로 가득 채워졌다. ⓒ 연합뉴스

 
<익스플레인 : 투표를 해설하다> 제작진은 이와 함께 대선 TV 광고를 비롯해 선거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여하는 미국의 정치현실이 누구를, 어떤 계층을 위한 것인지, 또 이렇게 당선된 정치인들이 게리맨더링을 통해 기득권을 어떻게 공고히 해나가는지를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

그리하여 내레이션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말한다. 간접투표 제도를 채택한 미국이라서 가능한 '투표 독려'였다.

"유권자 등록을 하세요! 기다리지 말고, 지금 바로!"

어찌됐든, 스스로를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이며 공산주의 사회로부터의 수호자라 자부해온 미국의 선거제도가 망가진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야말로 이 망가진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이자 그 시스템의 최고 수호자다.

4일 오전, 투표가 끝나고 개표에 돌입한 시점까지도 바이든과 트럼프의 접점이 예상된다는 현지 소식이 들려 온다. 이 자체만으로도 이미 트럼프는 일정 정도 승리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미 고장나 버린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 불복을 이어갈 여지가 생겼고, 이미 그 여지를 만들어 놨을지 모를 테니 말이다.

비극은, 역대급 진흙탕 선거의 결말이 어찌 끝나든, 그 결과 자체가 오랜 시간 '위대한 민주주의'를 이끌어온 민주당과 공화당의 합작품이란 사실이요, 그 결과로 고통받는 이들은 백인, 남성, 부유층들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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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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