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일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지이프로덕션 , 윤스코퍼레이션

 
어느 날 우두커니 서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가 있었다. 사는 게 대체 뭔가,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은 건가하는. 마흔 살의 찬실도 길을 잃었다. 나의 마흔도 그랬다.
 
나의 마흔은 어두웠다. 만혼으로 얻은 딸애의 독박육아에 지쳐 있었다. 아이 키우다 삶이 다 끝날 것 같아 우울했다. 육아가 싫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모성이 천성이라 우겨대는 사회에서 막돼먹은 엄마라 고백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찬실은 뻑적지근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아이 하나 낳아보지 못한 채 마흔에 들어선 게 억울하다. 오직 일만 하고 살았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 영화와 결혼한 듯 살았는데, 이제 이 영화와 이혼해야 하는 건가, 떠나간 연인을 회한하듯, 지난 인생이 가뭇없다.
 
운전하다 영화를 다루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게 됐다. 개봉을 앞둔 영화를 소개하는 꼭지였는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소개되고 있었다. 김초희 감독은 찬실(燦實)이 '찬란한 열매'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를 보고서야 박복하달 수밖에 없는 주인공 찬실에게 왜 그렇게 거룩한 이름을 부여했는지, 왜 복이 많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신인감독이어서인지 김초희라는 이름은 낯설었는데, 굳이 서울 말씨를 쓰려 애쓰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부산 여자'였다. 부산 여자를 몇 알고 있는데, 이들은 누구도 부산 말씨를 본격적으로 쓰지 않는다. '사투리'를 구사하다 차별당한 경험이 서울 말씨를 쓰도록 종용했을 것이다. 따지자면 이들에겐 서울말이 사투리일 텐데 말이다. 지독한 서울 중심적 사고다. 문득 이 부산 여자들의 진짜 말씨가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PD로 꽤 여러 해 함께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떤 이유인지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고, 그때 글이라도 써야겠다, 하며 쓰게 된 게 이 영화의 시나리오였다고 한다.

영화 속 찬실이 "별거 아닌 게 원래 제일 소중한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김 감독은 복닥거리는 삶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조용히 길어 올린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사하게 된 달동네의 수많은 계단은 그 계단을 매일 오르내릴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은유한다. 매일 올라야 하는 계단처럼 피할 수 없는 찬실의 고난과,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요란한 극적 장치 없이 도란도란 이야기된다.
 
사랑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지이프로덕션 , 윤스코퍼레이션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계단의 한 곁에 찬실(강말금)이 세든 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작고 오래된 집의 늙은 주인(윤여정) 역시 노인이 되는 날까지 이 계단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아래 세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아 좋구나' 싶은 것은 타인의 철없는 일회성 감흥일 테지만, 매일을 노동처럼 오르내리는 높은 계단에 한 번씩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부질없는 세상을 조감할 독보적 낭만만은 빼앗기지 않기를.
 
까막눈인 자신의 처지가 하도 갑갑해 이제라도 글을 배우겠다고 나선 할머니. 글을 읽지 못하는 부끄러움은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삶을 주눅 들게 했을 것이다. 늙어서라도 글을 배우겠다고 달려든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터, 언어를 가지는 일은 곧 자신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지 않은가.

다큐멘터리 영화 <시인 할매>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은 늦게 얻은 글로 시를 쓴다. 자의식이 가득한 미사여구를 구사하지 않으면서도, 지식을 한껏 과시하는 고담준론을 펼치지 않으면서도, 이들이 써 내려간 투박한 삶의 시는 얼마나 곡진하던가. 자신의 삶이 담긴 언어로 이와 연관된 세계를 수줍게 펼칠 때, 그들의 부박한 언어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 퍼득이며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던가. 찬실집 주인 할머니가 받침도 다 틀리게 어눌하게 꾹꾹 눌러 쓴 글씨, "사랑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는 찬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밖에 없다.
 
할머니는 내 엄마를 떠올리게 한다. 내 엄마와는 다르게 살았을 그의 인생이지만, 늙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이들을 한데 모이게 한다. 게다 그가 딸을 먼저 보냈다는 상황은 자식 둘을 앞세운 나의 엄마를 자꾸 틈입시킨다. 다만 딸을 먼저 보낸 그의 일상이 내 엄마보다 기운차 다행이랄까. 저 모진 계단을 하 세월 오르내린 강단이리라. 딸의 부재는 그로 하여금 만학의 길에 들어서게 했고, 빈 방에 사람을 들여 온기를 피우게 했다. 사람이 다시 사람다워지는 수단은 결국 사람밖에 없다는 깨달음의 발로일까.

"할머니들은 다 알아요 사는 게 뭔지."
 
늙어가는 게 너무 좋다는 사람들을 보면 의기소침해진다. 느려지고 무뎌지는 노쇠는 내게 환영할만한 것이 되지 못하기에. 아마도 이들에겐 자신이 경험한 늙음의 모델이 긍정적이거나, 삶을 소비 없이 사랑하며 지켜왔기 때문이리라.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늙으니까 그거 하나는 좋아"라는 할머니의 말은,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그 길고 굽은 계단을 쉴 새 없이 오르내리며 자식 키우고 먹고 사느라 고단했을 그의 삶이 묻어나고 만다. 이제 늙었으니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재우침 당할 일은 없을 테니, 지긋지긋한 근면의 질곡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오늘 하고 싶은 거만 하고 살아"라는 할머니의 말은 쓸쓸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 남편 무 자식의 사람만이 누릴 자유인 것도 틀림없다.
 
그래도 살자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지이프로덕션 , 윤스코퍼레이션


이제 찬실을 얘기해 볼까. 실직으로 돈이 너무 없는 그는 후배 소피(윤승아)의 가사도우미로 일하기로 한다. 소피에게 불어 개인교습을 하는 김영(배유람)이 시나리오를 쓰는 신예 감독이라는 사실에 찬실은 흥미를 느낀다. 찬실 역을 한 강말금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영을 연기한 배우 배유람도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주로 우스꽝스런 인물로 등장했던 그의 이미지는 싹 사라지고, 진중한 청년 역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말금은 혜성같이 등장한 배우다. 2007년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해 2010년 영화에 첫 출연한 뒤 이후 조단역을 오가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배우 강말금은 이름부터 놀랍지 않은가. '말금', '맑음'이 연상되기도 하고, 뜬금없이 '마지막 금'이 떠오르기도 한다. 김초희 감독처럼 경상도 말을 쓰는 그는, 참 안 풀리는 삶의 실타래에 우두망찰하는 마흔 살 싱글 여성의 낙망을, 이름답게 과잉 몰입 없이 맑게 연기했다. 일품이다. 그 감독에 그 주인공이라고나 할까.
 
할머니 집에 사는 장국영 귀신(김영민)과 조우한 찬실은 그의 존재에 대해 어떤 거부감도 공포도 없다. 마치 오래 동거해온 사람처럼 귀신인 그를 승인한다. 굳이 장국영이라고 한 이유는 김초희 감독이 한때 장국영을 좋아했기도 했고, 정말 가버리고 없는 사람이기에 자신이 처한 상실의 지점과 맞닿아 있기도 한 듯하다. 찬실에게 당신이 뭘 원하는지 잘 찾아보라며 자꾸 삶에 끼어들며 참견하는 그의 존재는, 찬실이 아직은 붙잡고 있는 삶에 대한 희망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른다. 힘들어도 살아주기를, 별것 없는 인생이라도 더 용기 내 주기를 바라는 자신의 염원이 만든 또 다른 자아.
 
마흔이 되도록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는 삶이니, 연애라도 뻐근하게 해보리라 영에게 다가간다. 영이는 연하지만 어떤가.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인간의 나이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연애의 성공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사랑이라고 우기며 그렇게라도 자신의 막막하고 외로운 처지를 벗어나려는 미망으로는 사랑을 얻을 수 없지 않은가. 오직 영화만 보고 달려왔던 자신이 가여워 어떤 보상이라고 해주고 싶었을 찬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혼자만의 달뜸으로 이루어지던가. 구원받으려 잡은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인 걸 알았으니, 수수밭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줄을 놓을 수밖에.
 
빅문을 보며 치성을 드리는 할머니를 보자 찬실도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본다. 참 크기도, 참 밝기도 한 달이다. 찬실의 낙망을 위로하러 온 후배 동료들과 길고 고불거리는 계단을 내려가며, 그는 큰 달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그리고 덩그마니 고요히 떠있는 달에게 이렇게 말을 건다.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무슨 소원일까. '찬실이 참 별거 아닌 소원을 빌었네' 생각하며 돌아오다, 차 밖에 뜬 달을 보니 문득, 굉장한 소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열심히 살아온 마흔 살의 찬실이기에 다짐하듯 바라봄직한 소원 아니겠는가?
 
이 지점에서 참 뜬금없는 걸 알지만, 참 뜬금없는 바람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찬실처럼 예술을 하는 이들은 삶이 참 막막할 것이다. 다른 일로 돈 벌면서 예술 하라는 말은 실상, 예술을 여전히 정당한 노동 혹은 가치 있는 일로 보지 않는 발상이다. 이들은 최소한으로 검박하게 삶을 유지하지만, 찬실처럼 급박한 위기에 처하면, 이마저도 무너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실들은 다시 실의를 딛고 일어서겠지만, 이럴 때 기운 내라는 입바른 소리 말고 정말 해줄 것은 없을까?

나의 제언은 이렇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했으면 좋겠다. 찬실의 위기는 단지 개인의 의지로만 구제되는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의 삶을 지켜줄 안전망이 찬실들이 바라는 진짜 위로가 될 것이다. 봉준호법도 좋지만, 예술인들은 오늘 하루를 살 돈이 필요하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 게시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감독 강말금 기본소득 윤여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