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더이상 전술의 문제가 아니다. 리더가 자신의 팀을 운영하는 방식, 그리고 리더십의 명분과 성과에 의하여 진지한 내부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 대표팀은 11일 부산의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열린 2019 EAFF(동아시아축구연맹) E1 챔피언십(동아시안컵) 남자부 첫 경기에서 홍콩에 2-0 승리를 거뒀다. 전반 추가시간 황인범, 후반 38분 나상호가 득점을 올렸다.

최근 A매치 3연속 무득점의 사슬을 끊었고 겉보기엔 무난한 승리를 거둔 것 같지만 정작 내용은 여전히 답답했다. 한국은 FIFA 랭킹 139위로 전력상 큰 격차를 보이는 홍콩을 상대로 80%에 육박하는 일방적인 볼 점유율에도 불구하고 골을 뽑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나마 세트피스에서 겨우 활로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선수들간의 유기적인 플레이를 통한 필드 골로는 끝내 득점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결국 볼점유율은 이날도 큰 의미가 없었던 셈이다.

벤투호 출범 이후 밀집수비 공략에 어려움을 겪고있는 것은 대표팀의 고질병이 되어가고 있다. 벤투 감독은 부임 이후 꾸준히 유럽스타일의 점유율 축구를 대표팀에 이식하고 있지만 효율성에는 의문 부호가 붙고 있다. 벤투호가 좋은 경기를 보여준 것은 주로 홈에서 열린 평가전이었고, 원정 경기나 라인을 깊숙이 내리고 수비를 하는 팀을 만나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벤투호의 첫 패배인 2019 아시안컵 8강 카타르전(0-1)을 비롯하여, 최근 카타르월드컵 2차예선 북한-레바논 원정(0-0)에서도 같은 패턴을 고수했으나 상대 수비를 끝내 뜷지 못했다. 대회 최약체인 홍콩전은 벤투호의 밀집수비 공략법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볼 수 있는 유일한 시험 무대였지만 이번에도 경기는 비슷한 '고구마' 양상으로 흘러갔다. 유럽파가 빠졌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최정예 멤버가 모두 모였을 때도 경기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국 전술의 '창의성' 부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설상가상 벤투 감독은 선수들의 활용법에서도 의문부호를 자아냈다. 문선민, 김보경, 김승대, 이정협 등 K리그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선수들이 대거 출전했지만 이들은 소속팀에서 보여주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약팀인 홍콩의 전력이 문제는 아니었다. 선수들이 소속팀에서 뛰던 포지션과 플레이 스타일을 고려하지 않고 기존 유럽파 주전들이 뛰던 자리를 '땜빵'하는 형식으로 기용하다보니 선수들간 동선이 겹치거나 창의적인 플레이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벤투 감독이 한국 지휘봉을 잡은지도 1년이 넘었고 이번 대표팀에 합류한 선수들 대부분이 벤투호 유경험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직도 선수파악이 덜 되었나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더 큰 문제는 벤투호의 불안요소에 대한 지적이 벌써 하루이틀이 아닌데도 벤투 감독이 문제점을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벤투 감독은 좋지못한 경기력이나 점유율 축구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도 별다른 해명이나 대안없이 '마이 웨이'만을 강조하고 있다. 성과가 좋으면 소신이라고 하겠지만,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데도 반성조차 없다면 불통이자 독선에 불과하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과연 벤투 감독의 축구 철학이 한국 대표팀에 적합한지 혹은 한국축구를 진정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할 시점이다. 엄청난 투자를 들여 외국인 감독과 스태프들을 기용하면서도 한국축구가 발전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하루하루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 축구는 2000년대 들어 총 11명의 대표팀 감독이 거쳐갔고 이중 현재 파울루 벤투까지 절반이 넘는 무려 6명이나 외국인 감독을 기용했다. 외국인 감독 열풍의 선구자라고 할수 있는 거스 히딩크 감독 시절에는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하며 한국축구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자국 축구인들을 두고 굳이 외국인 감독을 기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우수한 외국인 지도자를 통하여 선진축구의 흐름과 철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외국인 감독은 한국 체육계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수 있는 학연-지연 등 각종 내부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고 한국축구를 객관적인 시각로 바라볼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히딩크 감독은 바로 외국인 지도자에게 기대했던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항했고, 단순히 월드컵 성적을 넘어 현대적인 대표팀 운영 시스템을 정립하며 한국축구가 세계로 나아갈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히딩크 이후의 외국인 감독들은 이렇다할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딕 아드보카트(2006 독일월드컵 본선 1승1무1패)나 고 핌 베어벡(2007 아시안컵 3위)처럼 단순히 실패라고 하기는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8개월 단기 계약이었던 아드보카트 외에는 단 한 명도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했고 한국 축구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지도력에 의문부호를 남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대 대표팀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운 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초반에는 2015 아시안컵 준우승 등 성과가 좋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수많은 문제점을 드러내며 한국축구를 위기로 몰아넣은 끝에 경질당했다.

한국축구는 2019년 현재 포르투갈 출신의 벤투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고 있다. 지난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국내파' 신태용 감독이 강호 독일을 격파하는 등 선전했지만 조별리그의 벽을 넘지못하며 좀더 수준높은 외국인 감독을 모셔와야한다는 여론이 당시에는 우세했다. 축구협회는 유럽의 여러 거물급 감독과 접촉했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조건의 차이로 협상이 무산된 끝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벤투 감독이었다.

그런데 히딩크는 논외로 하더라도, 벤투 감독이 1년 넘게 한국 감독직을 맡으면서 보여준 성과들이 과연 본프레레나 슈틸리케보다도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아시안컵에서는 2004년 본프레레(8강)이후 최악의 성적을 냈고, 슈틸리케조차 무실점 전승으로 통과했던 아시아 2차예선에서조차 헤메고 있다. 슈틸리케와 마찬가지로 점유율 축구를 고집하지만 '전술의 창의성이 없다'는 것과, '쓰는 선수만 고집한다'는 단점도 흡사하다.

물론 2000년대 이후 외국인과 국내파를 막론하고 한국축구에 점유율 축구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계속되어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한국축구 고유의 장점으로 여겨지던 스피드와 역습, 압박, 체력같은 고유의 장점들은 오히려 희미해져 버리고 있다는 것. 아무리 명품이라도 몸에 맞지않는 옷이라면 어설픈 모방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대표팀 감독은 개인의 축구철학을 시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선수들에 가장 맞는 축구를 구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자리다. 심지어 국내파인 허정무나 신태용 감독이 이끌던 시절과 비교해도, 이럴거면 굳이 왜 벤투라는 외국인 감독을 써야만 했던건지 의문부호가 들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공교롭게도 벤투와 함께 한국 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던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 키케 플로레스, 심지어 히딩크 전 감독조차도 지도자로서의 커리어에 급격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이름값있는 외국인 감독은 무조건 한국 감독보다 나을 것이다.' '외국인 감독이라 수준높은 축구 철학을 보여줄 것이다' 같은 환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과연 한국축구가 이대로 벤투를 언제까지 믿고 기다려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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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 동아시안컵 슈틸리케 점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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