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의 부제는 '마이크로헤비타트(Microhabitat)'다. 검색해보니 '미소서식처'라는 뜻이었다. '특정한 생물체나 미생물이 서식하는 국소 지역'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친구의 집을 전전하는 주인공 미소(이솜 분)의 다소 난해한(?) 기행과 이후의 정착과 썩 잘 어울리는 부제이다. 
 
 영화 <소공녀> 포스터

영화 <소공녀> 포스터 ⓒ CGV아트하우스

 
미소(이솜 분)는 가사 도우미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를 산다. 5만 원이 채 안 되는 일당으로 밥을 사먹고, 담배를 사고, 단골 바에서 위스키 한 잔을 하고, 백발을 방지하는 약값과 월세와 세금을 적립한다.

2014년 새해 첫날, 담배값이 거의 두 배에 가깝게 인상된다. 평소 피우던 담배가 비싸 사지 못하고 4000원 짜리 담배를 사들고 오며, 미소는 방을 빼기로 결정한다. 그녀의 일당으로는 담배와 위스키와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집을 모두 누릴 수가 없다. 미소는 겹겹이 옷을 껴입은 채, 낡은 여행 가방에 여타의 짐을 매달고, 과거에 밴드를 같이 하던 지인들에게 잠자리를 부탁한다.

그리고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다

제 팔뚝에 직접 주사 바늘을 찌르는 문영(강진아 분)은 그다지 집이 필요없어 보였다. 현정(김국희 분)은 혼자에게만 부과되는 가사 노동에 힘겨워 하고 있었다. 대용(이성욱 분)은 20년 간 월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집을 쓰레기로 채우고 매일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록이(최덕문 분)의 부모님은 자손의 생산을 기대하며 미소를 감금한다. 넓은 집에서 안락하게 사는 정미(김재화 분)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밝히는 미소에게 당황한다.

보통 집은 안락, 평온, 휴식 등의 단어와 연결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늑한 휴식을 취하는 곳, 집이란 그런 곳이다. 그러나 미소가 만난 밴드의 멤버들은 누구도 집 안에서 그런 아늑함을 느끼고 있지 못하다.

<소공녀>에서 집은 멤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가치들을 보호하고 대물림하는 공간이다. 집은 미소의 친구들을 옭아매고 속박하며 정해진 역할을 부여하는 곳이다. 집이 있는 그들은 집이 없는 미소만큼도 행복하지 못하다. 그건 돈이 없는 자나 많은 자나 적당해 보이는 자나 매한가지이다.

자신이 누군인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은 그들은 행복을 느낄 수가 없다. 그들은 불행한 시간을 그저 받아들이며, 일상이 된 고되고 팍팍한 삶을 감내할 뿐이다. 미소의 친구들은 '집'의 요구에 순응할 뿐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집이 그들을 점령했다.
 
 영화 <소공녀> 한 장면

영화 <소공녀>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그러나 누구도 미소가 될 수는 없다

미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 미소는 월세가 오르자 포기해야 할 목록을 살피다 과감히 집을 포기한다. 비록 궁핍할지언정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미소에게 정미는 '염치도 없다'는 말로 미소의 취향을 폄하한다.

절약과 성실이 미덕인 사회에서 정미의 이런 말은 일견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미소의 취향에 값을 매기고 그 값을 점차 인상하는 것은 미소의 의사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제도가 미소의 취향에 값을 매길 뿐이다. 제도는 '염치도 없이' 가난한 자의 주머니를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미처럼 '집도 절도 없는 자'의 분수를 잃은 소비를 경계한다. 끊임없이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에 살면서 늘 소비를 절제해야 한다. 무수한 취향에는 가격이 매겨지고, 우리는 지불 가능한 가격에 맞춰 취향을 선택하고는 안도한다. 수입과 지출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점을 찾아 헤매며 강박적으로 '소확행'을 찾는다. 미소처럼 기꺼이 집을 놓아버리는 선택은 할 수가 없다.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의 소설 <소공녀> 원제는 '세라 이야기'다. 소설 주인공 세라는 미소처럼 집이 없다. 세라는 아버지의 재력으로 최고 사립 기숙학교의 가장 좋은 방을 차지했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 다락방으로 쫓겨나고 하녀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세라는 가장 좋은 방에 기숙하는 부잣집 딸로 있든 하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든 변함없는 세라였다. 어떤 환경에서도 세라는 '세라다움'을 잃지 않는다. 좀 더 가졌다고 젠 체하지 않으며, 없다고 자괴감에 빠지지도 않는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다.

미소 역시 '미소다움'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미소다움'은 어쩐지 꿈만 같다. 수입에 비해 상당한 지출을 차지하는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들이키는 미소는 마치 만화처럼 허무맹랑하다. 집을 과감히 포기하는 미소의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 생경함, 그 자체이다.
 
 영화 <소공녀> 한 장면

영화 <소공녀>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세라처럼 여전히 한결같은 미소를 행복이라는 관념이 아닌 실체로 이해하려 하자 영화는 갑자기 너무나 불편해진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다'는 미소와 달리, 집은 있어도 생각과 취향은 없는 삶이 차라리 편하다. 햇볕을 가리는 알렉산더 대왕을 향해 비켜 달라 부탁한 철학자 디오게니소스가 될 수는 없다.

타인의 취향, 남들처럼 살고 싶다

캐리어 끄는 미소는 동화 속의 세라보다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감정이입이 보다 쉬운 것은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안재홍 분)이다. 섹스도 할 수 없을 만큼 추운 방에서 봄에 하자는 말은 어찌나 애잔한지, 돈이 전부가 아니라 해도 너무 없는 것은 불행을 불러온다. 이 추운 방에서 그래도 행복하다는 사고의 전환은 자포자기로 비쳐질 뿐이다.

잘 곳을 찾아다니는 미소가 안타까운 한솔은 미소와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자원한다. 그는 빈곤에 안주하지 않으려 잠시의 고통을 미래의 행복과 교환하려는 '능동적인' 결정을 내린다. 빈곤에 지친 한솔은 남들처럼 번듯하게 살고싶다. 시간은 한솔의 바람대로 돈을 축적해 미소와 한솔의 거주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영화 <소공녀>의 시간적 배경은 2014년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땀흘리고 온 한솔이 목격할 것은 천정부지로 오른 부동산 가격이라는 것을, 2018년을 사는 우리는 잘 안다. 한솔은 그가 생각하던 집을 얻을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할 것이다. 분수를 지키기 위해 차선의 선택을 하면서 한솔은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하지 않는 미소와 헤어질 거라는 게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현실에 반전은 그리 없다. 미소와 맛집 데이트를 꿈꾸는 한솔은 따라가기 힘든 타인의 취향에 매번 좌절하며 행복과는 점점 멀어질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사막의 땡볕에 '정신 차린' 한솔은 미소에게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과 취향을 지키려는 미소가 한솔은 부담스러워질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영원히 행복했다는 해피엔딩은 동화 속에서나 가능하다.
 
 영화 <소공녀> 한 장면

영화 <소공녀>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미소는 이미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있을 터였다. 타인의 취향은 늘 미소와 한솔보다 저만치 앞서 나갈 것이다. 재화처럼 부모의 집을 물려받지 않은 이상, 가진 것 없는 그들이 남의 취향을 쫓기 위해서는 발버둥치며 살아야 한다. 물질적 어려움이 없는 재화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 타인의 욕망 안에 갇힌 집 가진 친구들처럼 살기 보다, 미소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술집 접대부로 추정되는 민지(조수향 분)는 미소처럼 이제 다른 집을 찾으려 한다. 민지가 살던 집은 다른 사람의 집이다. 미소는 눈물을 흘리는 민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먹고 싶다는 닭백숙을 해먹인다. 늘 친구들의 집에 계란을 사들고 들어간 미소가 민지에게 닭백숙을 해먹이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미소가 친구들의 집을 떠나며 남기는 메모지에는 작은새가 한 마리 그려져 있다. 미소는 이미 집을 떠난, 자신을 속박하는 세계를 떠난, 알에서 깨어난 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그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계란의 깨지듯 미소의 친구들은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할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으로 표상되는 속박들, 자신과 타인이 동시에 만들어낸 굴레들을 벗어날 때,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좋아하는 일을 하려는 민지는,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되려 한다. 그건 매우 힘든 일이지만 스스로 알을 깬 가치있는 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으로 타인의 취향에 기여하는 바람직한 일을 찾고자 한다.

록이의 부친상에서 밴드의 멤버들은 재회한다. 그들은 잠시 머물렀던 미소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는다. 미소와의 추억은 따뜻하다. 현실은 그대로이지만 행복한 한때는 미소를 짓게 한다. 친구들은 이제 알을 깨기 위해 그들의 세계에 부리질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들을 가두었던 알을 깨기 위한 작은 변화를 모색할 것이다. 멤버들의 재회가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지고, 혼자가 편하다는 문영이 청첩장을 돌리는 장면은 그들의 변화를 예고한다. 그 변화는 미소처럼 전격적이지 않아도 '나답게' 이루어진다.
 
 영화 <소공녀> 한 장면

영화 <소공녀>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나답게'에 이르자 실체로 미소를 이해하려 할 때 느끼던 불편함이 해소된다. '미소다움'은 미소의 것이었다. 집은 새로 태어나려는 자가 깨어야 할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머물고 있는 '나' 자신이다. 미소가 '미소다움'으로 집을 떠나듯, 누군가는 '나다움'으로 충만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찾으려는 행복이 실은 타인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며 옭아매는 무언가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우리는 조금 더 만족하는 삶에 가까워진다. 

영화 <소공녀>에서 행복은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다움'으로 자신에게 충실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며 '나답게' 살려 할 때 행복과 가까워진다. 집은 타인의 취향을 대변하며 미소가 집을 나오듯 알을 깨고 나와 자신의 취향을 찾을 때 보다 만족스러워진다.

끝으로, 사우디로 날아간 한솔이 그만의 '마이크로헤비타트'를 지어 돌아오길 바래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양선영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소공녀 소공려리뷰 미소한솔 마이크로헤비테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한 귀퉁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