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이리와 안아줘>의 한 장면.

MBC <이리와 안아줘>의 한 장면. ⓒ MBC


악역은 대개 착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을 위해 존재한다. 주인공의 좌절도, 성장도, 성공도, 악역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할이 보조적이라고 해서 존재감마저 보조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 드라마는 '정의로운' 주인공의 '정의 구현'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이 속에서 악역이 돋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주인공의 선하고 착한 매력이 부각될수록, 극의 긴장감은 '나쁜 놈'에 의해 고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 다양한 감정을 넘나들며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뽐내는 악역은 주인공의 존재감을 압도하기도 한다. 현재 방송 중인 MBC <이리와 안아줘>처럼 말이다.

<이리와 안아줘>에는 연쇄 사이코패스 살인마, 윤희재(허준호 분)가 등장한다. 최근 드라마에 등장한 사이코패스들은 대개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른 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영위하는, 화이트칼라 살인마가 많았다. 재력과 권력을 많이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폭력성이나 살인 충동을 딱히 제어하거나 감출 필요가 없었다. 이들이 저지른 죄는 그들 자신의 철두철미함이나 완벽함보다는, 그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무마되는 경우가 많았다.

살인 장면 없이, 카리스마만으로 공포 완성

 MBC <이리와 안아줘>의 한 장면.

MBC <이리와 안아줘>의 한 장면. ⓒ MBC


이들에 비한다면 윤희재는 조금 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다. 기술이 있어 착실하게 마음만 먹었다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늘 자극을 추구하고 책임감이 없는 그에게 '가정'이란 '내 등에 칼 꽂지 않을 내 새끼'들이 있고, 나를 대신해 그들을 보살펴줄 여자가 있는 곳에 불과하다.   

무려 12명을 살해한 윤희재는 아들 윤나무(채도진, 장기용 분)의 친구, 길낙원(한재이, 진기주 분)의 부모까지 죽인다. 가진 것 많고, 마냥 해맑은 그들이 '내 자식을 나약하고 구차하게 만드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윤나무와 길낙원은 이 살인사건으로 인해 엇갈린 삶을 살게 된다.

극의 모든 갈등이 시작되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이리와 안아줘>는 직접적인 살해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크리스마스트리 조명만이 밝게 빛나는 어두운 거실에 망치를 든 허준호의 모습과, 밝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에 튄 핏자국 등 간접적인 연출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있었음을 전달할 뿐이다. 보통의 드라마들이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해 잔혹한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선정성 시비를 상장처럼 안고 가는 것과 대비된다.

여러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자극에 길들여진 시청자라도, 윤희재 캐릭터가 밋밋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허준호는 직접 살해 장면을 연기하지 않고도 분위기와 말투, 싸늘한 눈빛만으로 그 어떤 사이코패스 캐릭터보다 위협적이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이런 윤희재와 맞서는 또 다른 사이코패스는 박희영(김서형 분)이다. 박희영은 피해자와 유가족 중심이 아닌, 화제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기자다. 윤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국민의 오감을 자극할 만한 '팩트'만을 쫓는다.

악역 연기 맘 고생에 잠 설치기도

 MBC <이리와 안아줘>의 한 장면.

MBC <이리와 안아줘>의 한 장면. ⓒ MBC


윤희재와 박희영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다. 감옥에 갇힌 윤희재는 박희영을 이용해 자신의 뒤통수를 친 아들 윤나무의 인생을 쥐고 흔들고, 박희영은 윤희재 사건에 쏠린 세상의 속물적 관심을 이용해 명성을 얻는다.

박희영은 피해자 가족의 상처에 대해서도 "내 보도를 통해 세상이 피해자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면 더 좋은 일 아니냐"는 나름의 논리를 펴는가 하면, 끔찍한 연쇄살인마를 앞에 두고서도 "나 아니었으면 쓰레기 범죄자에 불과했던 너를 잔혹한 악의 대명사, 셀레브리티로 만들어줬다"며 코웃음까지 친다.

대개 드라마 속 사이코패스는 '살인자'나 '범죄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박희영은 어떤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는다. 그래서 박희영이 보여준 사이코패스적 면모가 여러 드라마 속 캐릭터 중 더 독보적으로 느껴진다. 공감 능력과 사회성이 결여된, 극도의 이기주의와 자기애로 똘똘 뭉친 박희영의 모습이, 사회화된 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이코패스 박희영은 그래서 때로 더 악랄하고 진절머리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것은 배우 김서형의 몫이었다.

허준호의 연기를 더 다양하게, 더 입체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김서형의 역할이었다. 윤희재의 악랄함과 폭력성은 박희영을 통해 사회로 흘러나오고, 세상에 달관한 듯한 태도를 보이던 윤희재의 분노는 박희영 때문에 발현된다. 두 사람이 맞붙는 장면마다 흐르는 긴장감은 <이리와 안아줘>의 집중도를 높이는 1등 공신. 이런 박희영이 지난 28일 방송된 21회 말미,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박희영이 하차한 뒤 윤희재와 아들 윤나무의 갈등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 지를 지켜보는 것도 <이리와 안아줘>의 후반부 관전 포인트다.   

연기력 만으로 표현의 한계 허무는 배우들 

 tvN <무법 변호사>의 악역, 차문숙(이혜영 분)과 안오주(최민수 분).

tvN '무법 변호사'의 악역, 차문숙(이혜영 분)과 안오주(최민수 분) ⓒ CJ E&M


아무리 악랄한 악역이라도, 결국은 시청자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캐릭터 설정상 동정이나 지지를 받지 못할 수는 있지만, 캐릭터의 행동이 설득력을 잃게 되면 스토리 속에 녹아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본 적 없고, 이해도 되지 않을 악역일수록, 그를 연기하는 배우들에게는 더 세심한 연기력이 요구된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윤희재 역할을 받아들인 뒤 악몽에 시달렸다는 허준호나, 박희영을 연기하며 잠을 설칠 만큼 마음이 힘들었다는 김서형이 느낀 부담감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드라마는 영화보다 표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노골적인 화면 묘사가 불가능하다. 최근 종영한 tvN <무법 변호사>에서 악역 안오주를 연기한 최민수가 "담배도 못 피우고, 흉기도 못 들고, 욕도 하면 안 된다. 표현의 한계점을 느껴 힘들다"고 토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드라마 속 악역들은 배우의 연기력에 빚지는 부분이 많고, 그만큼 배우에게도 고난도의 연기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허준호, 최민수, 이혜영, 김서형, 유오성 등 최근 드라마에서 악역을 연기한 배우들의 면면과, 그들의 연기 경력만 따져 봐도 쉽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이들의 연기를 본 시청자들은 "연기 좀 살살 해달라"는, 장난 섞인 불만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들이 만드는 중압적인 분위기에 심장을 졸이고, 궁지에 몰린 주인공들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법 변호사> 속 이준기-서예지의 복수 활극에 통쾌함을 더한 것도, <이리와 안아줘> 장기용-진기주의 멜로에 절절함을 더하는 것도, 결국은 바로 이 '나쁜 놈'들 덕분. 아무리 역할이 못되고 미워도, 그들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이리와 안아줘 허준호 김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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