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버닝>은 종수와 해미와 벤이라는 세 개의 꼭짓점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 세계는 삶 혹은 죽음에 대한 충동, 허무와 열망, 사랑과 광기와 무감(無感)으로 점철된 세계이다.

이 모순의 욕망들은 세 개의 꼭짓점을 태어나게도 하지만 또한 그 세 개의 꼭짓점을 뒤흔들고 지각변동처럼 삼각형을 회전시키기도 한다. 뒤에서 상세히 써 내려가겠지만 그런 지각변동에 의해 벤과 종수는 그 본래의 자리가 뒤바뀌게 되는 결과를 맞는다. 사라진 듯 보이던 해미라는 점 또한 새로운 자리를 열어젖히며 끝없이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세 개의 꼭짓점에 대하여: 종수, 해미, 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버닝> 스틸컷. 종수(유아인)의 모습. ⓒ CGV 아트하우스


그 세 개의 꼭짓점이 처했던 본래적인 위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먼저 종수라는 꼭짓점을 보자. 종수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소개가 필요한 자리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그런데 그의 밥벌이와 관련된 일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언급된 적이 없다. 그 일은 그저 그의 짐 진 뒷모습을 통해서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의 직접적 현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소설 쓰는 일은 막판의 결정적 전환점 이전에는 영화 속에서 결코 보여지지 않고 입증되지 않는다. 즉 그것은 그의 상상적 현실이다. 해미와 관련해서도 그의 현실은 이와 마찬가지의 양상을 보인다.

해미와 첫 섹스를 한 뒤로 종수는 해미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 사랑은 그의 마음 안에만 있다. 벤과 어울려 다니는 해미를 다만 바라보고 그 두 사람의 구경꾼이나 되어주면서 종수는 멀찍이 물러나 있다. 그는 온전한 가족 또한 갖고 있지 못하다. 아버지는 구속기소돼 재판 중이고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에 집을 나갔다. 결혼한 누나의 존재는 그의 입 언저리에서만 소문처럼 떠돈다.

 버닝

<버닝> 스틸컷. 벤(스티븐 연)의 모습. ⓒ CGV 아트 하우스


벤은 어떠한가. 벤은 정확히 종수와 대조되는 실제적 현실을 소유하고 있다. 포르쉐를 굴리고 반포의 고급 빌라에 산다. 일인지 노는 것인지 모를 일을 하거나 하지 않으면서. 그의 주변에는 늘 우아한 조명이 있고 웃음이 있으며 은은하게 이야기가 흐른다. 갤러리 옆 카페에서 이뤄진 가족들과의 티타임 장면까지도, 그의 현실에는 한 줌의 그늘도 끼어들 틈이 없음을 증명해 보인다. 해미를 알게 된 이후로는 그가 해미를 원하는 때마다 해미와 함께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가 해미를 차지하는 기쁨은 해미라는 존재 자체에서 충족되지 않는다. 그 기쁨은 종수 앞에서 그 둘의 친밀함을 전시함으로써 완전해진다. 그것이 그의 '재미'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해미의 경우는 따지자면 종수의 처지에 더 가깝다. 파주라는 고향을 공유하고 있으며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만 하루하루를 날 수 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서너 평 남짓의 고지대 자취방에서 먹고 잔다. 삶의 의미를 찾는 자, 그레이트 헝거에 대한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되뇌는 해미의 모습 또한 소설을 쓴다고 늘 말로만 자신을 소개하는 종수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해미와 종수를 가르는 지점이기도 하다. 해미가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길 기대하며 떠나 건너간 곳은 아프리카이다. 허나 정작 그곳에서 해미가 발견한 것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일에 관한 풍경이었다. 반면 종수의 경우 그가 처음의 자리를 떠나와 도착하게 된 곳, 어찌됐든 그가 무언가를 쓰기 위해 노트북을 펼쳐놓은 곳은 파주이다. 그가 나고 자란 땅, 파주. 그리고 거기서 다시금 떠나와 도착하는 장소는 다름 아닌 해미의 자취방이었고. 해미와 몸을 섞었던 그곳은 고향보다 더 깊은 고향일지도 모르는 장소인 것이다. 해미가 공중을 바라는 자라면 종수는 더 깊은 땅에 발을 눌러 딛고 싶은 자이다. 

그레이트 헝거의 춤: 의미와 무의미

 영화 <버닝>의 한 장면

<버닝> 스틸컷. 해미(전종서)의 모습. ⓒ CGV 아트하우스


해미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그녀는 종수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귤을 까고 깐 귤을 맛깔스럽게 먹는 마임을 선보인다. 그녀가 말하는 마임의 요령은 '없는 걸 잊으면 된다'는 단순한 논리에 있다. 없는 것을 잊는다는 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부정의 부정, 그것은 없음이 있음이 되게 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일견 리틀 헝거가 그레이트 헝거가 되는 과정과도 같아 보인다. 허기라는 욕구를 쫓던 리틀 헝거가 그 허기의 자리를 삶의 의미로 채워가면서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가는 과정. 그런데 사실 그 허기는 실제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손 안의 동그란 구멍을 귤이라는 '의미'로 채우라는 주문과도 같은 것인데, 그렇게 할 때조차 그 구멍 자체는 메워지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다.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것, 무엇으로 채워야 할 것으로써 구멍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구멍을 구멍의 있음으로 바라볼 때 리틀 헝거는 비로소 그레이트 헝거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곳에 '무의미가 있다'는 걸, 무의미야말로 삶의 의미인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때 말이다. 이것이, 해미가 아프리카에 간 것이 삶의 의미가 아닌 무의미를 찾으러 간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그러나 해미는 여전히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삶의 의미를 찾는 춤으로 오인하고 있다. 그레이트 헝거의 춤이 '삶의 의미를 찾는' 춤이라는 이야기를 벤의 친구들에게 떠들어대고, 그 춤을 그들 앞에서 직접 춰 보일 때의 해미는 그 때문인지 어떤 가짜가 그녀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가 그녀의 진짜를 내보이는 장면은, 아프리카 지평선의 석양 장면을 묘사하면서,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말할 때이다. 물론 그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파주의 석양 아래에서 웃옷을 벗고 유연하고도 강한 새처럼 춤추는 장면일 것이다. 언뜻언뜻 화면에 잡히던 젖꼭지에서도 깃털이 돋아날 것 같은 새의 춤. 때는 분명 어스름이었는데도 끓는 듯한 태양의 맛이 느껴지는 건 그녀의 춤이,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를 삼켜줄 태양을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해미는 그 춤 이후 정말이지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다. 고인 침을 삼켜가며 먹었던 귤이란 게 사실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귤이었던 것처럼. 아무리 여러 번 이름을 부르고 먹이를 주어도 종수 앞에 나타나지 않는,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던 고양이 보일이 같이. 하지만 이런 엇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벤으로부터의 메타포적 그물망이 영화 안의 모든 서사를 다 집어삼킬 듯 압도하는 와중에도, 귤은 고양이 보일의 메타포가 될 수 없으며 해미의 메타포도 될 수 없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해미의 말처럼, 고양이 보일은 자신의 '똥 덩어리'만은 숨기지 못한 채로 분명 해미의 집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해미 또한 종수의 눈앞에 분명 있었고 종수와 실제로 사랑을 나누었다. 무엇보다 종수는 해미가 없는 것을 잊을 수 없다. 해미의 자취방에서 행했던 마지막 자위의 시간에 종수는 마치 해미가 그곳에 있는 것 같은 환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해미가 없다는 걸 잊으면 그런 환상을 만날 수 있는가. 그런 환상과 함께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종수는 그 짧은 환상 장면 직후,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해미는 귤이 아니다. 해미는 귤이 될 수 없다. 귤은 해미의 메타포가 아니다. 여기가 바로 영화의 후반부에서 극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메타포의 사슬이 끊기는 지점.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던 메타포의 연쇄가 중단되고 찢겨나가는 지점인 것이다. 벤의, 벤에 의한, 벤을 위한 메타포가, 벤을 통해 이염되었던 막강한 메타포의 고리가 파열되는 지점인 것이다.

벤을 타고 흐르는 메타포의 선분들

 영화 <버닝>의 스틸컷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그렇다면 찬찬히 벤의 그 메타포들을 더듬어 올라가볼 필요가 있겠다. 벤을 타고 흐르는 메타포의 선분들을. 선분의 한쪽 끝에는 파스타가 있다. 벤은 요리가 왜 좋은가에 대해,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그것이 만들어져서'라고 말한다. 요리를 만들어 취식하는 그 과정을, 제물을 빚어 스스로에게 바치는 일에 빗대면서 말이다. 파스타 조리기구들이라는 선분의 다른 끝엔 뷰티박스가 있다. 욕실 벽장 안에 고이 보관된 그 뷰티박스는 여자의 얼굴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그 위에다 색을 입히는 화장이 끝나면 제물로 태워져 사라질 얼굴들을. 화장(化粧)이 화장(火葬)의 동음이의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 한 선분을 이야기해볼까. 그것의 한 축에는 비닐하우스가 있다. 버려지고 쓸모없는, 그저 태워지기만을 기다린다는 비닐하우스. 비닐하우스와 짝을 이루는 것은 한 여자일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여자, 아니 어쩌면 삶의 의미를 극단적 무의미로 바꾸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여자,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기를 바라는 여자.

그런 여자를 알아보고 지목하는 것은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도덕 법칙에 의한 것이다.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사람들이 홍수에 떠밀려 익사하게 되는 것 같이. 말하자면 신의 뜻대로인 것이다. 태워지길 기다리는 비닐하우스 또한 벤이라는 신의 눈이 단번에 알아보고 지목할 것이다. 신과 벤이라는 점으로 이뤄진 또 한 선분은 이 영화에서 특히 중요한 메타포이다. 한순간 뒤집히게 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메타포의 전복: 벤에게서 종수에게로
 
종수와 해미와 벤이 처음으로 함께 어울리게 된 곱창 집에서 해미는 아프리카의 일몰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눈물을 흘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신기하다'였다. 벤은 감정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말하듯 그는 자연 혹은 신과 같은 존재이다. 감정도 판단도 없는 존재. 그의 내면에는 권태만이 빽빽이 들어차 있을 것이다. 권태를 떨치려는 끝없는 몸부림의 차원에서 그는 재미라는 걸 쫓는다. 해미에게 작고 까만 돌을 쥐여 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재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재미를 위해서 돌을 줍는 그 장면은 그의 페이스에 따라 어느 날에는 파스타 만들기로, 어느 날에는 화장(化粧)으로, 또 어느 날인가에는 화장(火葬)으로 변주되리라.

 영화 <버닝>의 스틸컷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해미가 사라진 뒤로 여러 날 동안 벤을 미행하던 끝에, 종수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어느 카페에 든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때 벤은 책을 탐독하는 중이었다. 무엇에도 쉽게 질리고 하품을 연발하곤 하던 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펼쳐진 책은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집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한다. "종수씨가 포크너 좋아한다길래."

새 얼굴의 여자 친구와 카페를 나서며 벤은 또 한 번의 고백을 한다. 해미가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종수'라는 말을 했다고. 그때 난생 처음으로 질투가 났다고. 벤은 신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느낄 필요가 없는 신. 그런 그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나. 종수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종수가 읽는 걸 따라 읽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종수로 인해 벤이 전에 없던 '감정'이라는 것을 갖게 된 것이다. 감정 없음만이 존재 증명으로써 작동되던 신의 서사에서, 그 감정 없음이라는 본질이 빠져나가버리게 된 셈이다. 신의 지위를 보장받을 근거가 그에겐 더 이상 없게 된 것. 이것은 정확히 그가 인간의 층계 위로 내려설 수밖에 없도록 되어버린 지점을 가리킨다.

라캉 식으로 말한다면 '윌리엄 포크너' 혹은 '질투의 감정'이라는 팔루스를 종수로부터 건네받음으로써 그가, 거세된 여성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던 그에게 이제야 비로소 '대상 a'라는 욕망의 구멍이 생기게 된 것이다.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와 연결지어 본다면 '윌리엄 포크너' 혹은 '질투의 감정'은 장관의 수중에 들어온 '편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라캉이 인용하는 애드가 앨런 포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에는 두 개의 삼각형이 나온다. 첫 번째 삼각형은 왕-왕비-장관 사이의 삼각형이고 두 번째 삼각형은 경감-장관-뒤팽 사이의 삼각형이다. 이 두 삼각형은 정확히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구조의 첫 번째 자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바보의 자리이다. 이 자리를 처음에는 왕이, 다음에는 (장관의 집을 이 잡듯 뒤지지만 편지를 못 찾는) 경감이 차지한다. 두 번째 자리는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 자로부터 자신을 황급히 숨기기는 하지만 반쪽은 드러낸, 완전히 숨지 못한 자의 자리이다. 이 자리를 처음에는 (편지를 테이블 위에 단지 뒤집어 놓아 둘 수 있었던) 왕비가, 다음에는 (편지를 우편함에 봉투만 바꿔서 아무렇게나 꽂아두었던) 장관이 차지한다.

세 번째 자리는 모든 것을 다 보는 자의 자리이다. 처음에는 장관이, 다음에는 뒤팽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장관의 자리이동이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다 보는 자리에 있다가, 다음에는 바로 완전히 숨지 못한 자리, 왕비의 자리, 여성의 자리로 이동한다. 다름 아닌 편지에 의해서. 편지를 갖게 됨으로 인해서. 이 같은 자리 이동을 일컬어 라캉은 '거세'라 한다.

벤이 정확히 이 운동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다 보는 전지전능한 신의 자리에 있다가, 희생제물로서의 여성이 되는 운동. 그런 자리 이동을 재현해 보이기라도 하듯 벤은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파주의 한 공터에 처음으로 종수보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마치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벤의 그 두 번에 걸친 고백을 듣는 자는 종수이다. 경제적 상황이라는 물질적 조건과 해미와의 물리적 인접성, 메타포의 창조와 장악 능력까지, 벤은 종수에 대해 일관되게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듯 보였다. 그런 벤이 종수에게 내밀한 고백을 행하는 순간, 둘의 위계는 일시에 교란되고 전복된다. 감정 없음이라는 신적 속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고백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고백 혹은 고해성사라는 형식 자체가 위계를 담지하고 있기도 하다. 고백을 듣는 자 앞에서 고백하는 자는 그 고백에 의해 잠정적인 약자의 위치에 놓인다. 결국 벤은 종수에게 신의 자리를 탈환 당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벤이 종수로 하여금 신의 자리를 탈환하도록 했다.

메타포의 파열: 새로운 존재의 탄생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삼각형의 회전의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벤이 해미의 자리로 가고 종수가 벤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사건. 그 사건의 나머지 축은 새 자리를 열어젖히며 되돌아오는 해미가 담당한다. 벤에게 질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계기는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종수'라는 해미의 '말'이었다. 그것이 벤의 메타포를 전복시키는 결정적 계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해미는 종수에게 권능을 부여한 영적 지주에 다름 아니다.

해미로 인해서만 종수는 종수가 되고 종수는 점점 더 종수가 되어간다. 유령처럼 끝없이 돌아오는 해미에 의해서. 이 모든 것들은, 삶의 무의미와 죽음 충동이, 허무와 열망, 사랑과 광기와 무감(無感)이 세 인물의 내면을 각기 다른 시차로 뒤흔들어 놓은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결정적인 사건은 아직 이야기되지 않았다. 그 사건은 앞서 언급했던 메타포의 파열과 연관된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또한 그것은 아직 어딘가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사랑의 이야기와도 연관된다. 기술했다시피 등을 감싸 안은 해미가 자신의 자위를 도와주는 짧은 환상 장면 직후, 종수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는 깨닫는다. 해미는 귤이 아니고 해미는 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귤은 결코 해미의 메타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가 바로 해미에 대한 종수의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과 사랑이 극에 달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없는 것을 잊으면 된다는 귤에 관한 메타포를 실행할 수 없도록 단절시키고야 마는 그 폭발적 힘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버닝> 스틸컷. 왼쪽부터 종수(유아인), 해미(전종서), 벤(스티븐 연)의 모습.

<버닝> 스틸컷. 왼쪽부터 종수(유아인), 해미(전종서), 벤(스티븐 연)의 모습. ⓒ CGV 아트하우스


이제 영화 안의 리듬은 어쩐지 전과 같지 않고 스크린 가득 생기가 돈다. 종수는 일어나 그의 최초의 소설을 타이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이어 파주의 공터가 펼쳐진다. 처음으로 벤의 등이 보인다. 종수는 여러 차례 벤을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해미의 방에서 종수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장면이 줌아웃으로 처리된다는 점과 갑작스러운 계절 변화 등이 그 살해 장면을 소설 속 장면으로 읽히게도 하지만, 인물들의 욕망 서사를 따라 읽는 데 있어 그 장면이 실제인가 아닌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종수의 거듭남일 테다.

피 흘리는 벤과 함께 자신을 감쌌던 모든 피 묻은 것들을 불 속에 던져 넣고 종수는 알몸이 된다. 온전한 처음이 된 것처럼, 완전무결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이 장면은 고백에 얽힌 일련의 과정들에 의해 벤 스스로 인간 여성의 자리에 감으로써 종수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벤에 의해 이루어진 전복 운동은 여전히 메타포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종수에 의한 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실천은 벤의 메타포가 불가능성으로 드러나는 지점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 사슬 바깥으로 튀어 오르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전복: '버닝'이라는 진짜 메타포

그런데 이쯤에서 나는 지금껏 공들여 끌고 온 이 모든 전개를 다시금 라캉의 괄호 속에 집어넣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라캉의 엄밀한 구분을 따를 경우, 벤의 메타포는 메타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메토니미(metonymy), 즉 환유에 가깝다. 그 대상과 인접한 것이라면 무엇으로도 치환 가능한 구조이자, 그러한 전위를 통해 무엇인가를 은폐하는 역할을 하는 것.

예컨대 벤은 파스타 조리기구나 뷰티박스뿐 아니라 벤 그 자신의 제물로 쓰기 위한 뭔가를 빚어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도구를 숨기고 있다. 비닐하우스는 여자와 버려지고 쓸모없는 모든 희생자들을 숨기고 있다. 단적으로 요리가 주는 즐거움은 살인이 주는 향유(jouissance)를, 그리고 제물을 받아 즐기는 신은 살인자 벤을 숨기고 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벤의 메타포는 환유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것은 가짜 메타포이거나, '벤'만의 메타포가 된다. 사실 벤은 메타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메타포가 무엇이냐'고 해미가 묻자, 그건 종수에게 물어보라고 벤은 질문을 떠넘긴다.

메토니미가 아닌 메타포, 진짜 메타포는 계열들을 따라 이동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모든 계열들을 응축시키며 대체할 하나의 기표를 창조해 냄으로써 달성된다. 영화 속에서 메타포는, 그 진정한 응축의 메타포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영화의 마지막, 포르쉐와 벤과 종수가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불타오르는 장면에 있다. 종수에 의해 불타는 것은 포르쉐와 벤과 종수의 옷이지만 그 이미지 뒤에는 더 많은 거대한 것들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그 화염은 일차적으로 해미에 대한 복수를 의미한다. 또 그것은 종수 자신을 그토록 오래 괴롭혀 오던, 어머니의 옷을 태운 일에 대한 죄책감을, 그 깊은 늪과 같던 트라우마를 태워 없애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종수는 자신 안의 도려내고 싶은 부분을 벤에게 투사하여 불사르는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그 불은 또한 벤으로 대표되는 부의 편중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분노이자 비명이다. 벤을 불태운다는 것은 벤의, 벤에 의한, 벤을 위한 가짜 메타포를 불태우는 걸 의미하기도 할 터이다. 이 모든 것들이 집약되고 응축된 '버닝'이야말로 영화의 진짜 메타포로써, 영화 안의 상상적 체계를 한순간 뒤집어 엎고 스크린과 분리되어 스크린 자체를 줌아웃한다.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감독조차 의도하지 않았던 영화의 욕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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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음이라는 이름을 쓴다. 사회운동, 기록 및 비평, 시 창작을 한다. 멸종반란,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에서 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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