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중국을 상대로 전 세트를 15점 이하로 막으며 세트 스코어 3-0으로 승리했다. 한국 여자배구 역사에서 이런 경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물론 에이스 주팅이 빠졌다곤 하지만 중국 대표팀 내에서 그는 한국의 김연경(엑자시바시)처럼 존재유무에 따라 전력이 완전히 달라지는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다. VNL이 작은 대회라는 뜻은 아니지만 아시안게임 결승이나 올림픽 같이 더 중요한 경기가 아니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한국은 '역대급 경기'를 펼쳤다.

김연경이 한국 대표팀의 '시작과 끝'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중국은 김연경에게 집중적으로 목적타 서브를 구사하며 한국의 에이스를 괴롭히려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상대의 공격과 서브가 집중되는 것에 익숙한 김연경은 정확한 서브리시브와 탄탄한 수비로 중국의 작전을 무력화시켰다. 공격성공률(38.7%)은 썩 높지 않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여지 없이 강한 스파이크를 중국 코트에 내리 꽂았다.

그리고 중국전에서 김연경 못지않게 한국 승리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한 선수는 바로 이효희 세터(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였다. 도미니카 공화국전 3세트부터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코트를 밟은 이효희는 정확하고 다양한 볼배급과 영리한 경기운영, 그리고 젊은 후배들을 다독이는 리더십으로 대표팀을 잘 이끌었다. 문제는 이효희가 곧 불혹을 바라보는 한국 대표팀의 최고참 선수라는 점이다.

이효희 유무에 따라 심하게 차이 났던 대표팀의 경기력

 리우 올림픽 이후 2년 만에 대표팀에 컴백했지만 이효희의 기량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리우 올림픽 이후 2년 만에 대표팀에 컴백했지만 이효희의 기량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 한국배구연맹


이효희는 V리그 여자부의 대표적인 '우승 청부사'다. V리그 원년부터 올해까지 여자부 6개 구단 가운데 4개 구단을 거친 이효희는 자신이 속했던 팀들을 모두 챔프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뛰어난 높이를 갖추지도 못했고 강한 서브나 공격력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지만 정확하고 안정된 토스로 세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세터의 교과서' 같은 선수가 바로 이효희다.

하지만 V리그 정상급 세터로 명성을 떨치던 이효희도 유독 대표팀과의 인연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에 182cm의 장신세터 김사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대 대표팀 사령탑들은 비슷한 기량이라면 블로킹에서 강점을 보일 수 있는 김사니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효희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이 끝난 후 김사니가 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대표팀의 주전 세터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국가대표 세터' 이효희의 커리어 역시 충분히 화려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견인한 이효희는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도 주전 세터로 활약하며 한국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3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이효희는 후배들에게 대표팀 자리를 물려 준 채 소속팀에 전념했다.

그렇게 2년 간 대표팀을 떠나 있던 이효희가 2018 VNL 대회를 앞두고 이다영(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이나연(GS칼텍스KIXX) 세터와 함께 차해원호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물론 차해원 감독 역시 불혹을 앞둔 이효희를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두 젊은 세터의 성장을 돕기 위한 멘토 역할을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VNL 1주차 벨기에전과 도미니카전에서 한국은 이효희가 아닌 이다영이 선발 세터로 출전했다.

하지만 국제대회 경험이 많지 않은 이다영은 공격수들과의 원활한 호흡을 맞추지 못했고 차해원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이효희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문제(?)는 이효희 세터가 들어간 후 대표팀의 경기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도미니카전 역전승과 중국전 완승에서 이효희 세터의 지분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당장의 성적을 위해서라면 이효희 세터를 주전으로 활용하는 것이 상식적인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올해 한국 나이로 39세가 된 이효희가 김연경 세대의 마지막 목표라 할 수 있는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대표팀의 주전 세터로 활약할 확률은 썩 높지 않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당장의 성적 부진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젊은 세터들에게 기회를 주고 국제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 어쩌면 이효희의 기량이 건재하다는 걸 확인한 지금이 이효희의 후계자를 키울 수 있는 적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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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배구 2018 FIVB VNL 이효희 이다영 이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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