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구> 포스터.

영화 <덕구> 포스터.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주의!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덕구>는 상업 영화가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말초신경을 자극해 생각 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관객이 스스로 영화에 집중하고 이모저모 살펴보면서, 감정을 이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 내 돈 내고 영화를 보면서, 이런 노력까지 해야 하나"라고 물으신다면, 몰입하기 쉬운 영화도 필요하지만 스스로 집중하려는 영화도 필요하다는 제안을 소심하게 해 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실망한 경험을 한 번쯤은 하셨을 것입니다.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독립영화의 저항력은 바로 이러한 탈상업성이라는 다양한 시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게 지금 한국 영화의 자양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할아버지 역을 맡은 한 대배우의 자연스러움이 충분히 몰입을 도와줍니다.

300원짜리 불판 닦기, 그리고 비싼 장난감 가격

 영화 <덕구>의 한 장면.

영화 <덕구>의 한 장면.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가 이 영화에서 느낀 첫 번째 대비 구조는 '불판 닦기'와 '장난감 가격'입니다.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비 구조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마침 어린이날도 있고 해서, 이 부분에 현실적인 감정 이입을 했습니다. 상품을 만들어 내는 자신의 노동과 하나의 상품을 구매하는 능력에 대한 가치 비교의 순간입니다.

영화에서 덕구 할아버지(이순재 분)는 고깃집 불판을 하나 닦을 때마다 300원을 받습니다. 할아버지가 둘째 손녀의 어린이집 퇴원 시간에 늦어가면서까지 반나절 정도 동안 닦은 개수는 26개. 보너스를 합해 8000원을 받아 들었습니다. 물론 단체 손님이 몰린 경우에는 더블로 600원이지만, 이는 평시가 아닌 만큼 계산에서 제외하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덕구(정지훈 분)에게 사주고 싶은 '큰 박스 로봇'은 7만5천 원. 그러니까 불판 250개가 즐비하게 쌓여 있는 가격입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작은 박스 2만3천 원으로 계산하면, 대략 불판 100개 정도입니다. 하루에 아이를 위한 불판 닦기 100개, 충분히 해 볼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영화 <덕구>의 한 장면.

영화 <덕구>의 한 장면.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하지만 계산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아이 장난감만을 사기 위해 불판을 닦는다면, 문제가 없지요. 하지만 아이의 장난감은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별한 시기에만 사주는 아이의 장난감 비용을 노동 수익의 10%라고 잡았을 때, 월 200만 원 정도 버는 월급쟁이가 아이에게 20만 원짜리 장난감을 사주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잘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더해져야만 가능하고, 아이는 평소에 잘 챙겨주는 엄마보다는 무심한 아빠의 허점을 이용해 결제를 시도합니다. 할아버지가 소형 로봇 상자를 사기 위해서는 휴일 없이 한 달에 1000개의 불판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결국 장난감을 사주지 못하고, 빵을 사 들고 귀가한 뒤 손주에게 된통 당하게 됩니다.

보상금을 훔쳐 간 며느리, 그러나 현실을 알고 보니

영화가 보여주는 두 번째 대비 구조는 할아버지의 한국과 며느리 바네사(체리쉬 마닝앗 분)의 인도네시아입니다. 영화는 구태여 할아버지가 인도네시아로 가는 장면을 삽입합니다. 사실 할아버지는 동남아 출신 며느리를 막무가내로 쫓아내고, 혼자 손자 손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노동자인 자신의 아들이 노동 현장에서 사고로 죽은 보상금을 이 며느리가 훔쳐서 달아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사로 쓰면 이런,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될 것 같습니다. 우리 언론이 잘하는 일이지요.

동남아 여인, 남편 사망 보상금 훔쳐 일주일 만에 도망가
-두 아이는 고스란히 늙은 할아버지의 몫

그런데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가 동남아에서 목도한 현실은 참 달랐습니다. 며느리는 희귀병에 걸린 인도네시아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돈을 송금했고 이에 사죄하러 왔지만, 할아버지는 거두절미 하고 '동남아 여인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며 이를 내쳤습니다. 여기에는 어쩌면 깊은 편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못 살면 부도덕하고 사람이 그르다는 편견. 그런데 이러한 편견은 우리에게도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반복해서 줬습니다.

 영화 <덕구>의 한 장면.

영화 <덕구>의 한 장면.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마지막 대비구조는 늙음과 유년입니다. 영화는 역시나 상투적으로 아이의 자장면과 할아버지의 각혈을 대비구조로 삼고 있습니다(상업성이 부족한 부분입니다. 자장면이 공감을 얻던 시설이 언제인데…). 아이의 식욕과 성장, 소멸하는 할아버지가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비를 '눈물'에서 찾고자 합니다. 아이는 잘 웃고, 또 잘 웁니다. 영화에서 아이는 많이 울고 많이 웃습니다. 아이니까요. 성장의 양분이지요. 그래서 아이가 울 때 울지 못하고, 웃을 때 웃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른의 책임일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영화에서 딱 한 번 울었습니다. 아들이 공사판에서 죽어도, 도둑질한 며느리를 내쫓을 때도 심지어 불치병에 걸렸다고 통보를 받는 순간에도 할아버지는 무심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아이를 찾기 위해 '훔친 돈'의 일부를 다시 벌어, 집에 되돌아 왔을 때 비로소 눈물을 흘립니다. 할아버지도 마지막 안식처가 필요했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울음 연기가 잘 연상되지 않는, 대 배우의 '내면 통곡'을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 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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